편지11-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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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석부 들고 교실에 들어서면

인상 쓸 일 수두룩하다

앉아라 줄 맞춰라 휴지 좀 주워라

수희 나영이 지각이구나

이슬인 오늘도 결석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전달사항 몇 개 툭 던져두고 나오면

아이들 몇 명 쭐래쭐래 따라 나오며

선생님 오늘 야자 빠져야 해요

치과 가야 해요 생리통이 심해요

학원 보충 있어요 엄마 생신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점심시간에 내려와

교직 이십년 의욕도 열정도 시들해진 담임 생활

올해 애들은 유난히 천방지축이야 투덜대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으로 미운 놈 하나 없다

작년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어 시간 수업할 땐

저기 몇 놈들 정말 고운 구석 없이 밉상이더니

담임 맡은 올해 사흘 걸러 지각하고 결석하는 놈도

온 교실 제멋대로 어지르고 다니는 놈도

수업시간 꾸벅꾸벅 잠만 자는 놈도

곁에 와서 뭐라 뭐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마음 풀어진다 잔소리하다가도 픽, 웃음 나온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 녀석들

지각하고 결석하고 농땡이 칠 만한 딱하고 아픈 사정

모르는 척 쌀쌀하게 나무랄 수만 없다

아이들 처음 만나면 그놈이 그놈 같이 보이다가

차츰 얼굴이 보이고 수업 태도 성적도 따지다가

한 일년 아침저녁으로 부대끼다 보면

몇 겹의 옷 안에 가렸던 본디 맨살 드러난다

멀고 아련한 풍경 아니다 사랑은

풀썩이는 먼지 마시며 동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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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풀썩이는 먼지 마시며 동거하는 일 마다하지 않으시는

훌륭한 선생님이 많이시지요.

 

저는 아직도 아이들이 썩 예뻐 보이지만은 않는 걸 보면,

아이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의 아픈 맨살을 보듬어 주는 선생님을 보면 부끄럽지만,

그분들 덕분에 저도 옆에서 조금이라도 배우고 있으니

이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좋은 교사가 되리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저는,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선생님이 많은 학교라서

우리 학교가 참 좋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선생님'이신 모든 선생님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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