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내랑 가야산 남산제일봉으로 산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남산제일봉 입구에 있는 청량사에서 시작해서 남산제일봉에 오르고, 해안사 아래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은 해인사와 주변 암자를 여유있게 둘러 보고 올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박을 하는 건 우리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진복이를 돌봐 주시기로 했기 때문에 허락이 있어야 한다.)되어서 당일 산행으로 바뀌었다. 대신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남산제일봉은 부산에서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무척 힘든 곳이라 부모님께 하루만 낡은 자가용도 빌렸다.

   산행 준비물을 대충 다 챙겨두었고, 미리 사전 조사도 좀 해 두어서 가는 길에 현풍나들목에서 나와 유명한 곰탕집에서 아침을 먹고, 남산제일봉 산행을 한 다음 산채비빔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완벽하게 준비해서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렸고 현풍 나들목을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자동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초록색 액체(부동액)를 내뱉고 있었다. 예감은 안 좋았지만, 보험사에 연락을 해서 일단 견인 조치를 했다. 현풍에 있는 정비센터에서 여러가지 점검을 해 보더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며 한 세 시간 정도 수리를 해야한다고 했다. (얼굴에 성실이라고 써 붙여놓은 사장님이 믿음직스럽게 말씀하셔서 좋았다.)

   세 시간이라... 좀 난감했다. 현풍은 그냥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한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세 시간을 보내고도 예정대로 산행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가 여행가고 있다는 걸 아신 사장님이 정비센터 차를 빌려 주겠다고 했다. 멀리 가는 건 어렵고 가까운 곳에서 일단 아침 먹고, 근처의 비슬산 휴양림에나 다녀오라고 하셨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일단 차를 빌리고, 읍내의 곰탕집을 찾아갔다.

   곰탕 치고는 비쌌지만, 국물 맛이 진하고 부드러워 아내는 꽤 만족했다. 그래도 시간이 꽤 남았는지라 사진기 챙겨 들고, 예전부터 현풍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던 도동서원으로 향했다. 도동서원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재를 넘고 나니 안온한 시골 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도동서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의 5대 유학자인 김굉필을 기리는 사당과 함께 근처의 유생들이 공부했던 서원으로 사액서원이었다. 서원 앞에 400년 된 은행나무도 장관이었고 특히, 건물을 올리기 위한 석축의 기단부를 짜 맞춘 솜씨가 기가 막히게 자연스러웠다.햇볕이 들어 따뜻하고, 사람 없어 한적한 도동서원에 앉아 사진을 몇 장 찍고 있는데, 그런데 갑자기 사진기의 배터리가 나갔다. 아내와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최근에 우리집의 가전제품이 모조리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컴퓨터, 김치냉장고가 고장이 났었고, 오늘 자가용에다 사진기까지 ^^)

   도동서원에서 나와 이번에는 유가사와 비슬산으로 향했다. 비슬산에는 휴양림의 얼음공원이 볼 만하다는 정비센터 직원의 말 때문을 들른 곳인데, 실망 그 자체였다. 거기까지 차를 몰고 간 시간과 주차료, 입장료 모든 게 아깝더라. 얼른 방향을 유가사 쪽으로 향했으나 유가사 입구에서 그냥 차를 돌리고 말았다.

   정비센터에 들르기 전에 우리가 쓴 기름을 채워넣고 돌아왔다. 그러나 차는 한창 조립하는 중이었다. 그냥 서 있기 뭐해서 이번에는 마을 구경을 나섰다. 마침, 당당한 고가(古家)가 눈에 띄어 그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여느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내려왔다. 돌아오니 오후 3시 30분 수리가 얼추 끝났다. 차를 건네 받고 진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해가 곧 질테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돌아오는 길, 거기서 가까운 관룡사 아래의 쌈밥으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창녕과 영산 사이, 화왕산 아래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관룡사는 아내와 가끔 갔던 곳이다. 관룡사에 닿으니 해가 곧 지려고 했다. 절에는 답사를 나온 듯한 대학생 일행들 밖에 없었다. 우리는 절을 휑하니 둘러 보고, 용선대로 향했다. 이른 아침, 해가 뜰 때의 용선대는 진짜 장관이지만, 해가 다 기울어가는 때도 온 하늘에 붉으스름한 기운이 퍼져 멋있었다. 우리 뒤를 이어 절에서 본 학생들이 올라왔다. 내가 단체사진을 찍어줬더니, 답례로 관룡산을 배경으로 해서 아내와 나의 즉석사진을 찍어줬다.

   용선대를 내려와 절 입구에 서 있는 창녕 석장승을 살펴 보았다. 매번 관룡사에 올 때마다 제대로 못 보고 그냥 지나친 경우가 많아서 이번에 꼭 보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보게 되어 다행이다. 잘 생겼다는 소문대로 깔끔한 모습이다.

   드디어 해는 완전히 졌고, 저녁을 먹기로 한 곳에 도착했다. 갓 지은 밥을 온갖 쌈과 집된장, 산나물을 반찬으로 해서 맛나게 먹었다. 배가 불러도 숭늉까지 다 마시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도 별로 막히지 않아 예상한 대로 도착했다.

   차 고치러 떠난 여행인 셈이 되고 말았나?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맛있는 거 먹고, 함께 다니면서 행복한 추억거리를 만들었으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래저래 또 한 번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던 듯 하다.

 * 아내는 남산제일봉의 그 멋진 경치가 못내 그리운가 보다. 공부하는 선생님들이랑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얘기를 꺼낸다. 언젠가 그런 날이 다시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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