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예전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광해군이라는 코드를 연결시키기가 참 곤란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선조나 인조가 아니라 광해군 시대에 나온 책이다. 왜 우리 민족이 자랑할 만한-팔만대장경이나 목민심서에 버금갈 만하다고 하는-명저가 광해군이라는 '폭군'의 시대에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시대는 당연히 모든 것이 어렵고 피폐한 시대라야 마땅한 것인데, 왜 그랬을까? 소박한 의문이었다. 그만큼 내 머리 속에 광해군의 시대는 역사적 공백기, 공포정치의 시기로 비쳐졌다. 학교교육과 텔레비전 사극의 영향이리라. 대부분의 성인들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다. 요즘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인식의 전환이 있었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한명기가 쓴 이 책은 광해군 이혼(李琿)에 대한 평전이다. 어린시절과 성장기, 영광과 시련, 몰락의 삶을 골고루 그려내고 있다. 광해군은 몰락한 임금이기에 祖나 宗같은 칭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 시기의 君칭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치세를 다룬 실록은 <광해군일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비운의 정치가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서 1641년에 죽었다. 67년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가 태어난지 18년만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죽기 5년전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조선조 최대의 전란을 평생의 삶 속에 두루 겪어낸 셈이다. 한번은 주인으로, 한번은 구경꾼으로. 그는 임진란 당시에 왕세자로서 임시정부-이른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던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 그는 폐위된 왕으로서 유배지에 있었다. 결국 그는 삶의 종장을 마지막 유배지인 제주에서 맞았다. 쓸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가 유배지에서 읆었다는 시는 이러하다.

바람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장독 기운 백척 누각에 자욱하게 이는구나.
창해의 성난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띄고 있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낀 강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쓸쓸한 시다. 그의 아들(왕세자)은 유배지에서 도망치다가 죽고, 며느리(세자빈)는 목을 매 죽는다. 부인도 일찍 죽는다. 말년에는 유배지의 여종조차 구박을 했다고 한다. 말년이 참으로 비참했다.

광해군은 그의 아비인 선조와 다음 임금인 인조를 비교해가면서 보아야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내치와 외교노선은 선조와 인조의 그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으면서, 동시에 대제국 명의 몰락과 청의 등장을 지켜보던 격변기에 그가 구사한 자주적 외교노선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바가 많다. 결국 자주적 외교노선 때문에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지만, 난세에 그가 취한 노선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거의 유일한 자주노선이라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

어떤 이는 노무현을 광해군에 비기기도 한다. 미,중,일의 대립과 알력 속에서 우리 민족의 활로를 찾아가려는 점은 많이 닮았다. 그렇게 보면 대북파-정인홍 같은 의병장 출신의 청치가들이 주축이 된-는 오늘날의 민주화세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몸으로 싸운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그 세력이 실패하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하리라. 역사에서 배우라. 특히 전환기에서. 정도전, 광해군, 김옥균, 여운형. 그들을 실패하게 만든 외세와 보수파들의 힘과 정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6-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싶게 하는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
 
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 따뜻한손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은 이른바 8월 위기설을 불러오고 있다. 6자회담이라는 틀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넘길 경우 북한과 미국은 전쟁직전 단계로 간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은 이 문제의 안보리 회부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큰소리친 바가 있다. 한반도에 사는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우리는 말못할 두려움과 혼란을 느낀다. 우리가 전쟁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곳이 우리의 삶의 터전인 까닭이다.

 커밍스 교수는 이 책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4년에 미국에서 간행된 책이지만, 이 속에서 다루고 있는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긴급토론용으로 쓸모가 있겠다. 책 전체는 6장으로 짜여있다. 김일성의 만주게릴라 투쟁, 한국전쟁과 미국의 북한 공습, 김정일이라는 포스트모던한 독재자, 북한핵문제의 역사적 기원과 쟁점들, 북한의 사회발전과 인민들의 생활, 김일성 사후 북한이 가고 있는 길이 각장의 소재들이다. 커밍스는 과연 한국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답게 넓고 깊은 안목으로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북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점이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 물론 냉전적 반공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만일 수 있겠다. 그러나 북한과 과 공산주의에 대한 선입견과 미국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냉철하게 관찰한다면 커밍스의 진단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미국을 선, 북한을 악이라고 보는 우리의 극단적 이원론이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미군의 공격용 헬기가 바그너 음악을 배경으로 밀림에 네이팜탄을 퍼붇는 장면일 것이다. 순식간에 숲이 불바다로 변하는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베트남 인민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네이팜탄은 베트남이 아니라 북한에 더 많이 퍼부어진 폭탄이란다. 미군의 공습으로 80% 이상의 파괴된 북한의 도시들에 대한 커밍스의 이야기는 또다른 충격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한쪽눈만 뜨고 보도록 강요당해왔다. 커밍스에 따르면, 북한이 그토록 꽉 짜인 병영국가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들에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폭격의 기억과 전후에 끝없이 이어진 미국의 핵공격 위협이 북한을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며 개미굴 같은 것으로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책임론을 강하게 거론하는 셈이다.

 북-미 관계의 해답은 이미 1994년에 나왔다는 것이 커밍스의 진단이다. '94년의 기본합의서가 미국과 북한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유익하고 건전한 토대'라는 것이 커밍스의 견해다. 클린턴이 핵과 미사일을 북-미 관계 정상화와 맞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 시도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공화당과 부시대통령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핵 위기설은 이미 10년 전의 필름을 '빨리 되감기'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 커밍스의 진단이다. 북한 외교팀이 현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사태를 이끌어가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혼란스런 대응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  혼란의 이면에 미국이 북한체제를 무너뜨리려하고 하는 야심이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한반도 전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기도 하다.

 커밍스는 5장 <사람사는 세상>에서 그가 직접 본 북한사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80년대초부터 북한을 방문했던 그가 보기에 북한은 주택과 의료, 교육이 균등하게 보장된 안정된 사회였다. 70년대 후반에 남한에 추월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경제는 남한을 늘 능가해왔다는 것이 커밍스의 지적이다. 이런 관찰을 토대로 해서 보면, 우리는 60-70년대 내내 남한이 보인 북한체제에 대한 두려움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커밍스는 냉정한 관찰자다. 그는 현실의 양면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지극한 폐쇄사회인 북한이 가진 결점들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낸 성취와 가능성을 인정하기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문제에 관해서 균형잡힌 시각에 목말라왔다. 커밍스의 책은 그 목마름을 달래준다.

 여담하나. 아내는 내가 보는 책이 <다빈치 코드>인 줄 알았단다. 책표지가 붉은 것도, 제목의 위치까지 비슷하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다빈치 코드>를 못 보아서 모르겠다. 이것은 번역본에 대한 불만이다. 번역제목이 원작 제목-North Korea: Another country-에 비해서 책내용을 나타내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의 붉은 색과 김정일 부자 사진도 마음에 안 든다. 아무래도 남한 사람들은 김부자의 사진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거든. 책표지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부분들에서 커밍스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책의 판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기우이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송자라는 극존칭과 개이름인 '시열이'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가 송시열이라는 인물이 가진 위치, 명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송시열이라는 창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조선후기의 역사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는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 효종의 북벌계획, 2차에 걸친 예송논쟁, 숙종시기의 잦은 정권교체-이른바 '환국'-와 상대당에 대한 부정과 살육의 역사가 들어있다. 조선후기 당쟁사의 대부분이 여기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송시열은 '노론'이라는 당대의 집권당을 이끌었던 이론가이자, 정치가로서 그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

결국 모든 비극의 씨앗은 서인들의 인조반정에 있었다. 명청교체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체적으로 경영했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은 '구데타'이면서 '역사의 퇴보'를 의미했다. 허울좋은 '재조지은'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결과로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게 된다. 씻을 수 없는 국가적인 모욕을 당하게 된다. 송시열이 활동한 시기동안 일어나는 국가적인 사건들-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효종의 북벌론, 예송논쟁-도 결국에는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사건인 셈이다.

동아시아가 격변기였듯이, 조선의 국내사정도 격변기였다. 임진왜란은 국가지배층인 사대부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농업,상업의 발달을 촉진하고, 그 결과 사회적인 신분제는 더욱 동요하게된다. 여기에 지배세력인 사대부집단은 보수냐, 개혁이냐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은 지배체제의 재정비를 통해서 사회를 보수화, 일원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송시열은 '주자근본주의'의 깃발을 들고 그 방향을 선도했다. 이에 비해 김육, 윤휴, 윤증, 허목 같은 송시열의 경쟁자들은 다른 방식의 사회를 구성하려고 애썼다. 나는 송시열이 왜 이율곡이나 이퇴계가 아닌 '주자'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의문아닌 의문이 들었다. 지은이의 말처럼, 주자는 송시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도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할 것이며"를 넣었을 정도로 송시열은 주자 마니아였다.

숙종의 왕권강화와 당쟁의 격화는 함께 간 측면이 있다. 남인과 노론이 몇 년 단위로 번갈아 집권하면서 상대방을 도륙하는 사이에 정치는 길을 잃게 되고, 도의는 땅에 떨어진다. 공작정치와 보복, 살육이 난무하게 된다. 물론 숙종은 그것을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한다. 왕권강화를 했다지만 그 실체가 무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숙종 이후 경종, 영조시기에 더욱 격화된 당쟁응 상대당의 국왕은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조차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국왕이 설자리가 얼마나 좁았던가를 살핀다면 숙종이 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학자들의 의논을 눈여겨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산림'이라는 집단이 흥미로웠다. 글만 하는 선비들이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른바 사대부 집단을 일본의 사무라이 집단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들이 학문과 정치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땅과 노비의 주인이라는 경제적, 사회적 배경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한문이라는 그 어려운 문자는 그들의 지적인 권위를 더욱 높였을 것이다. 과연 오늘날은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 정치와 학문을 논하는 세계를 만들었는지 되새겨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새 시대를 열어간 사람들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다산 정약용은 '국사'교과서의 등장인물로 기억되어왔다.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 <목민심서>와 <경세유표>,<흠흠신서>를 저술한 학자이며, 정조를 도와서 수원성을 신축할 때 거중기를 이용한 관리라는 것이 국사교과서의 정약용에 대한 서술이다. 아마 그 이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정약용의 생각과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글 한쪽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바다. 한 개의 지식으로만 기억되어 시험을 위해서 소비되는 것.

나는 정약용이라는 인간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서 느꼈다. 참 감동적이었다. 아들과 형님, 제자들에게 보내는 유배지의 다산이 뱉어내는 글들은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고난의 시절에도 굴절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있었다.  사는 데 지치고 혼란스러워 삶을 허비할 때 정신을 추스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제 이덕일 선생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고 나니 새삼 다산이라는 인간에 대하여 놀라는 바가 더 늘었다. 참으로 거대한 인간이 여기 있구나. 모든 시대를 건너 뛰어 진실 그 자체만으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시대를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친 당대의 대표자가 여기 있구나.

기막히게도 다산의 생애는 18이라는 숫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는 1762년 (영조38년)에 태어났다. 22세가 되는 1783년 (정조7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간다. 거기서 운명의 사람 정조를 만난다. 이후 18년간의 세월은 관리로서, 정치가로서 개혁군주인 정조와 함께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 (정조24년)에 급서하자 그의 정치생활과 관료생활은 끝이 난다. 1801년 (순조1년)에 시작된 유배생활은 1818년 (순조 18년) 에 비로소 풀린다. 고향인 마재로 돌아와서 나머지 18년의 세월을 보낸 뒤에 1836년 (헌종2년)에 마재 자택에서 눈을 감는다.

다산의 생애를 읽을 수 있는 열쇠말을 찾으라면 나는 남인, 이익, 서학, 정조, 유배, 묘지명의 여섯을 들겠다. 먼저, 다산은 남인이었다. 노론의 반대당파이면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던 세력이 남인이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해서 국가제도를 개혁애햐 한다는 노선을 걸었다. 여러면에서 남인은 노론의 반대당파이면서 국왕인 정조를 적극 도우려는 당파였다.

둘째, 다산은 성호이익의 학문을 배웠다. 기존의 성리학이 고루한 논리에 빠져 시대의 변화를 읽기 못할 때 성호 이익은 성리학의 틀을 어느정도 깨고 나갔다. 실학을 주창한 셈이다. 당시 기호지방의 남인들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받아들였는데, 다산도 성호의 학문을 자신의 공부에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흑산도에 유배중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선생의 힘입니다"한 것만 보아도 다산은 성호를 새로운 학문의 개척자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다산은 정조의 개혁정치에 중요한 동반자였다. 정조가 가장 사랑한 신하이면서 정치적 동지로서 다산은 정조의 치적에 크게 기여했다. 수원성 설계를 다산이 맡은 일은 유명하다. 수언성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꿈을 담은 곳이다. 정조가 사라지면서 다산이 현실정치에 설 자리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노론의 살륙이었다. 반대당파를 철저히 분쇄하는 수법이 동원되었다.

넷째, 다산은 서학-천주학-을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과정을 통해서 평생에 걸쳐서 화근이 될 일을 하게 된다. 당시에 '주자 근본주의'를 자기들의 사상으로 삼았던 노론일당에게 제사를 폐하고 성리학의 교조를 수정하려는 남인일파의 서학수용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정약용의 발목을 걸고 넘어지는 올무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남인당파를 궤멸시키고 정약용의 집안을 폐족으로 만들고 마는 원인이 되었다. 다산은 형-정약종-은 죽고, 매형-이승훈-도 사형당하며, 다산과 중형인 정약전은 오랜세월동안 유배형을 당한다.

다섯째, 18년간의 유배생활은 다산을 정치가나 관료가 아니라 대학자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이루어진 저술의 상당부분이 정치와 행정의 경험이 있고서야 가능했다는 점에서 20,30대의 관료생활이 다산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누가 그토록 국가의 행정체계와 사상체계를 세밀히 분석할 수 있었겠는가. 오로지 국가의 중심부와 정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활동한 다산같은 사람만이 해낼 수 있었던 작업이었다.

여섯째, 다산이 지은 '묘지명'은 후대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실록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에 기대어 자신과 자신의 당파가 평가받을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다산은 이가환, 권철신 같이 옥사한 이들의 묘지명과 더불어 자신의 '자찬묘지명'도 지었다. 마재로 돌아온 말년의 다산이 했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묘지명을 저술하는 작업이었다. 50년, 100년 후를 내다본 시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묘지명이 있음으로 해서 다산의 입장에서 서술한 다산의 생애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참 다산이 근대적인 의식을 지닌 선비의 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간에 알고 있던 다산의 삶은 유배생활 18년에 국한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자료를 거의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덕일 선생의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다산의 어린시절, 관료시절, 만년의 행적 등, 생애의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어다. 개인적으로는 다산의 곡산부사 시절의 행적들이 특히 인상깊었다. 당대에 그 같은 원칙을 갖추고 행동했던 지방관이 얼마나 되었을까. 참으로 백성을 귀하게 대접할 줄 아는 관리로서, 그는 배운대로 실천하는 선비였다. 다산은 어느 자리에 있던지 빛을 잃지 않았다.  결코 진흙 속에 묻히지 않을 진주 같은 사람. 다산을 마땅히 존경해야 할 증거들을 얻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참 고마운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운형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이기형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년 전에 <프레시안>에 실리는 김지하의 회고록 '모로누운 돌부처'을 읽는 것은 그 당시 생활의 재미 중 하나였다. 거기에는 秘史라면 비사라고 할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입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김지하이니까 그 운동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왔다. 특히 60-70년대의 박정희 반대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그룹으로 나오는 것이 이른바 원주캠프이다. 원주의 장일순과 지학순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옛날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계열 운동가들과 카톨릭의 새로운 운동세력이 결합하여 민주화운동의 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소상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김지하는 장일순이라는 사람을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로 여기고 있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온다.

나는 두 개의 의문이 들었다. 과연 장일순이라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고, 여운형이라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근로인민당과 여운형이 어떤 사람이냐는 의문이  먼저 나왔다. 과연 그들은 어떤 경향을 지닌 운동세력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노태우 정권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인지라 당시의 현대사연구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이나 해방 후의 정치사와 대중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토록 큰 힘을 가진 세력이었던 좌파와 노동운동세력이 왜 저토록 철저히 소멸되었는가 하는 것이 참 의문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니 김남식의 <남로당연구> ,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시리즈는 우리 세대들 모두에게 중요한 토론자료였다.  주위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김일성 아니면 박헌영 하는 식으로 경향을 대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 쉽지 않은 답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것이 강준식의 <적과 동지>라는 일곱권짜리 정치소설이었다. 특이하게도 그 소설은 여운형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상당히 부정적인 정치지도자로 묘사되어 있었다.  <여운형 평전>을 읽고 나니 그 책 생각이 나서 한번 보려고 했더니 절판이었다. 여하튼 당시 우리에게 해방전후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현미경 같은 것이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현미경은 다 달랐다.  졸업할 무렵 동구권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2년 대선의 완전한 패배가 있었다.  썰물때의 갯벌 같은 광경들이 보였다. 그 때의 토론과 고민들은 오래 남았다. 과연 우리 민족이 그 불구덩이를 지나지 않고 평화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에 관심을 두다가 보니 몽양이라는 사람의 '좌우합작'이라는 방법과 정치적 처신등이 늘 머리 속에 화두처럼 남게되었다.   

몽양 여운형에 대하여는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다. 처음 몽양을 접한 것은 대학1학년 때 처음 본 정경모선생의 <찢겨진 산하>인가 하는 책이었다. 가상의 공간에서 김구, 여운형, 장준하 선생이 만나서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하여 대담하는 책이었는데,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죽은 자들의 대담이라는 형식과 당시로서는 생소한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기억 속에 남았다. 대중적으로도 김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여운형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여운형은 사실상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잊혀진 정치가인 셈이다.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같은 사람은 잘 알지만 여운형은 잘 모르는 편이다. 박헌영이나 김일성 같은 사람은 우리 형편상 언급하기조차 어려운 편이다. 이승만은 명옥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동시에 기본부터 혼란의 도가니로 만든 사람이다보니 기억하기가 용이할 것이다.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이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 때문에 요즘 시대가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추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몽양은 그 정치적인 무게가 이들에 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참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나는 공개적으로 김구를 찬양하는 정치가는 많이 보았지만 몽양을 들먹이는 정치가는 보지 못했다. 자손들이 이북에서 고위직을 지내고 있기 때문이 그 이유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몽양은 경기도 지방에서 태어났으면서 당파로 치자면 소론당파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편에 속하는 양반이었던 셈이다. 성년이 되기까지 몽양이 보인 행동들을 보면 본시 대범하고 진보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개화에 대한 신념을 가진 이후로 스스로 단발을 하고, 자기네 집의 종들을 해방시키는 과단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후 몽양의 사상적 궤적에는 기독교(당시에는 참으로 진보적이요, 민족적인 성격을 지닌 분파였다.)와 맑스주의가 포함된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사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현실주의자다운 면모가 있었다. 인간을 위한 사상이지 사상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는 신념같은 것이 엿보인다. 몽먕을 굳이 사상적으로 분류하자면 중도좌파, 혹은 사회민주주의자 정도 되겠다. 국제적인 연대와 활동의 폭도 대단해서 직접 레닌과 대면한 우리나라의 운동가는 몽양이 몇 손가락에 드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중국혁명쪽에서는 손문과 모택동, 장개석을 직접 만나서 중국과 조선혁명의 긴밀한 연관을 강조하기도 했다.

8.15 해방 이후에 보건대 몽양만큼 당시의 국제정세를 잘 꿰뚫어보고 우리민족이 살아갈 길을 잘 인식한 지도자도 드물었다. 몽양은 미소냉전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불행하게 될 가능성을 내다보고 남북의 좌우정치세력이 합심하여 국제정세를 주체적으로 이용해서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만드는데 불철주야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좌우합작운동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났지만 결국 극우세력의 테러에 의해 희생된다. 몽양이라는 중도세력의 거두가 사라지자 좌우합작운동은 급속히 그 힘을 잃게 되고, 국제적으로도 미소는 한반도에서 냉전적인 대립을 노골화한다. 결국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계획했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한반도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된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다른 분단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전쟁은 그 씨앗을 뿌리게 된다. 사실상 1948년부터 한반도는 내전상태로 돌입한다는 것이 현대사연구자들의 결론이다. 백범은 뒤늦게 그 위험을 깨닫고 남북협상에 나서지만 그 역시 친일반민족세력에 뿌리를 둔 극우세력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돌이켜볼수록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 겨레는 몽양, 백범 같은 민족지도자를 그 제단 위에 바친 댓가로 친일민족반역자들과 이승만 같은 독재자들의 배를 불리는 일만 했던 셈이다. 그 댓가로 우리 민족은 이 땅위에서 처참한 전쟁과 50년이 넘는 동안의 군사적 대립을 맛보아야 했으니 참 역사란 냉정한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몽양이라는 정치가의 현대적인 면모에 주목했다. 몽양이야말로 타고난 민주주의자였다. 이 시대에 몽양 같은 사람이 태어난다고 해도 전혀 옛날 인물 같은 느낌이 나지 않을 사람이 몽양이다. 그만킄 몽양은 당대를 뛰어넘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이 멋있었으면 따르는 사람들이 몽양을 '사랑했다'는 비정치적인 용어까지 썼겠는가. '몽양은 영원한 청춘'이며 '싱싱하고''너무 착한'사람이었다는 표현도 쓴다. 몽양은 지나가듯 만난 사람에게도 참 좋고 든든한 인상을 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세력이 대중의 마음을 얻고 집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몽양 같은 우리 정치사의 인물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상 민노당은 남조선노동당, 진보당, 근로인민당 같은 50년 전의 대중적 좌파정당들의 맥을 잇고 있는 셈이니 어떤 맥락을 이어야 미래에 성공하는 정당이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쓴 이기형 선생은 몽양의 열렬한 추종자이면서 시인이다. 그렇다보니 좀 과장한 면이 없지는 않다.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하지는 않았다. 냉철한 면이 좀 부족할 뿐이다. 430쪽 가까우니 좀 두꺼운 책인데, 나는 참 잘 읽었다. 몽양에 대한 전기가 몇 개 없는 현실에서 우선 몽양을 아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몽양의 딸인 여연구가 쓴 <나의 아버지 몽양>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