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

'삼포 가는 길'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길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란 걸 천명한다. 길은 천성적으로 예외적인 공간이다. 오래 전부터 길은 인생을 상징하는 삶의 축소판과 같은 공간인 동시에 과정인 자리였고 그것은 이 '삼포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길은 예정된 미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정처 모를 강제된 시간의 연속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마주하게 된 영달이 길 위에서 머뭇거리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영달은 착암기 기술자이며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노동자다. 그는 지내던 밥집 아낙과 통정을 벌이다 남편에게 들켜서 밥값도 떼먹어가며 허겁지겁 달아난 처지다. 그런 그가 비슷한 처지인 정씨를 만난다. 그러나 정씨와 영달은 다른 점이 있다. 영달에게 있어 길은 예정되지 않은 행로이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잡는 수단이 되는, 아무런 낭만도 강렬한 목적도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정씨에게 길의 의미는 그와 달리 분명한 목적, 고향인 삼포로 가야한다는 확고한 목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정씨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영달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신을 깨닫고 정씨의 길에 자신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로선 어디로 가나 상관이 없는 몸이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여기서 영달이란 사람의 성품-정이 많은 성격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소설은 머뭇거림 없이 무척 빠르고 직설적으로 달려온다.

길은 공감을 얻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 사람은 상대와 마음을 통하게 된다.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온 이야기는 길에서 삼포로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차분해진다. 영달과 정씨는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 대한 공감대를 쌓아간다. 영달과 정씨는 실상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의든 타의든 뿌리를 잃은 채 떠돌고 있던 두 사람은 금새 서로에게 융합된다. 그 둘의 차이는 정씨가 도착해야 할 고향이 있다는 그 한가지밖에 없다. 정씨는 주로 듣는 입장으로 떠돌이인 영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한다. 영달이 주막에서 떠돌이인 자신에 대한 회한을 늘어놓을 때처럼.


"의리있는 여자였어요. 애두 하나 가질 뻔했었는데, 지난 봄에 내가 실직을 하게 되자, 돈 모으면 모여서 살자구 서울루 식모 자릴 구해서 떠나갔죠. 하지만 우리 같은 떠돌이가 언약 따위를 지킬 수 있나요. 밤에 혼자 자다가 일어나면 그 애 때문에 남은 밤을 꼬박 새우는 적두 있읍니다."
 정씨는 흐려진 영달이의 표정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곁에서 오랫동안 두고 보지 않으면 저절로 잊게 되는 법이오."


그들은 길을 우회해가면서 마치 운명처럼(물론 도식성의 위험이 있다) 나머지 한 명의 동료이자 떠돌이를 만나게 된다. 백화라는 이름의 작부는 정씨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 여자다. 오랜 시간을 고향을 떠나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몸을 팔던 그녀는 두 남자와 이형동체인 인물이다. 그녀 또한 길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는다.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쳐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스,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물론 그녀도 이렇게 그들처럼 정신적으로 노회하고 지친 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소위 막달라 마리아형 여자,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창녀이자 성녀인 구원의 상징을 답습하는 인물이다. 길 옆 초가에서 쉬게된 어느 날 밤, 그녀는 그녀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날인 군인 죄수 여덟명과 차례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짧지만 충실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일은 이후 그녀가 군부대 주위를 전전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녀 또한 속아서 팔려온 몸이었지만 자신만큼이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줬던 여자였다. 이것은 이후의 두 남자가 그녀에게 하는 행동에 대한 복선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남자는 자신들보다 나은 인간의 모습을, 같은 떠돌이이자 풀뿌리 인생이면서도 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모습을 여기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달은, 그리고 정씨는 역에서 모자란 여비를 보태 그녀를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붙잡을 수도, 같이 갈 수도 있었던 영달은 그녀를 포기한다. 이 부분은 짧고 건조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영달이라는 인물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영달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 백화를 포기한다. 이것은 그가 예전의 연인을 포기했던 것과 같은 결과가 반복된 것이다. 끝내 영달은 떠돌이로서의 삶을 택한다. 그런 그에게 백화는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준다. 점례라고 하는, 그 옛날 농촌에선 흔했을 이 촌스러운 이름이 도시에서 백화라는 제법 작부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작품이 전해주는 사회 현실에 대한 표식이다. 그리고 고향에서나 쓰일 이 이름을 남자에게 알려줬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상징하는 바이기도 하다.

변하는 현실에 대한 상실감은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어야 할 자리에서 급격하게 몰려온다. 정씨는 옆자리 노인에게서 자신의 고향인 삼포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듣고 망연자실해 한다. 나룻배와 바다로 그려지던 고향에 대한 인상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는 데서 부서져 내린다. 한순간에 정씨는 영달과 다를 바가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래서 공사판이 들어섰다는 소리에 되려 안심하는 영달에 비해 정씨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길을 따르는 여정은 끝이 난다. 누가, 어디로 가게되었는지조차 모르게. 왜냐하면 이미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 삼포

삼포는 가상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고 그 와중에서 자신들의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을 귀향할 장소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실제로 작중에선 삼포에 대한 묘사가 막연하게 바닷가라는 것과 흐릿한 인상 정도로 그치지만 무엇보다도 강한 목적으로써 제목 자체로 삼포는 강한 구심력을 갖고 그 자리에 있다. 그러한 보편적 상징의 존재는 작품의 보편성에 힘을 실어 리얼리티에 대한 힘을 강화해준다. 삼포를 당시 급변기의 한국 사회에 대한 메타포라고 하면 그곳을 향해 가는 영달과 정씨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계급을 상징함과 동시에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보편적 초상으로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영달과 정씨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한 초상이다. 그들은 공사판 노동자인 것이다. 즉, 그들이 도시를 만든 이들이다. 밭을 흙으로 메우고 산을 자르고 시멘트를 바르고 바위를 깨고 모래를 뿌리고 벽돌을 나르면서 건물을,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또한 이후로도 그들은 그런 '공사판'이 있어야 먹고 살 것이며 그런 자리, 즉 도시화가 이루어지는 곳을 찾아서 헤매 다닐 것이다. 그래서 영달과 정씨의 초상엔 단순히 소외된 노동계급을 아우를뿐만 아니라 도시화의 공범이면서 도시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정처 없는 모든 현대인의 표상으로 승화될 복합성이 있다.


3. 말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현대 사회의 소외현상에 대한 메타포로 보기 이전에 리얼리즘 문학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건 바로 그들의 대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현대인이라기보다는 소외된 밑바닥 계층에 속하며 영원히 떠도는 이들이다. 그 원인은 도시화를 축으로 한 급격한 사회의 변화 과정에 있으며 그것에 책임이 있는 것 또한 그들이라는 건 앞서 지적을 했다. 그렇다. 그들은 '잃어버려서 바닥에 이른 이들'이다. 그 현실성을 체득하기 위해 작품은 저잣거리의 육담과 같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린다.


 "바가지한테 세금두 내구, 거기두 줬겠구만."
 "뭐요? 아니 이 양반이......"
사내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껄껄 웃어제꼈다.
 "거 왜 그러시나. 아, 재미 본 게 댁뿐인 줄 아쇼? 오다가다 만난 계집에 너무 일심 품지 마셔."

 "군인들이 백화라면, 군화까지 팔아서라두 술을 마실 정도였으니까."
 뚱뚱이 여자가 빈정거렸다.
 "웃기네 그래 봤자 지가 똥갈보라. 내 장사 수완 덕이지 뭐. 그년 요새 좀 아프다는 핑계루...... 이건 물을 긷나, 밥을 제대루 하나, 손님을 받나, 소용없어. 그년두 육 개월이면 찬샘 바닥서 진이 모조리 빠진 거예요. 빚이나 뽑아 내면 참한 신마이루 기리까이할려던 참이었어. 아, 뭘해요? 빨리 가서 역을 지키라니까."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 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로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머. 벌써 그럴 줄 알구 감천 가는 길루 왔지요. 촌놈들이니까 그렇지, 빠른 사람들은 서너 군데 길목을 딱 막아 놓아요. 나 그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치들이 빨아먹은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 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냉수에 목욕재계 백 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저런 인물들이 저런 상황이면 대체 어떻게 말할 것인가. 작가는 그 원칙을 아주 충실히 지켜서 인물들의 말투 하나하나는 작품의 인물들이 바로 그 삶,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단순히 비속어라고 하는 수단이 주는 거칠음에 대한 미감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그네들의 험난한 삶에 대한 스펙타클한 표상이 되어준다. 이것은 작가가 60년대 말 대학생 시절 전국을 무전여행하면서 만났던 소설 속의 인물과도 같은 사람들에서 획득한 것으로 가상적인 공간성과 도식적인 메타포로 인해 자폐적이고 감상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는 소설을 리얼리티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4. 길

이 작품은 두드러진 상징성을 아우르는 작가적 감수성과 사회의식에 바탕을 둔 리얼리티가 결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절충으로 보기 힘든 것은 스타일에 있어서 간략함과 냉정함이 결합된 문장의 분명한 맺고 끊음과 감상적 서술에의 절제가 독자로 하여금 감상주의의 도입을 거부케 하는 단절의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무척 급작스러운 느낌을 주고 또 세 남녀가 서로에게 가지는 공감대와 융합에의 감정이입이 의식적으로 축소되어 표현됐다는 인상을 준다.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하지만 그것은 압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대항하는 작가의 대안이 부재함에 따른 반성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연민과 허무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힘든 작품의 기조는 자칫 작가의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싸구려 감상주의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냉정한 서술상의 태도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작품 곳곳에서 보이는 급작스러움만큼이나 마지막에 찾아올 허무와 상실의 슬픔 또한 증폭시켜준다.

길은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지만 영달과 정씨, 백화의 길은 그 끝에 도달하기도 전에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공범으로서 존재해온 그들이 정작 고향을 찾고 싶게 되었을 때 깨닫게 된 고향의 붕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 미래에 반드시 다가오고 말 듯 한 운명적인 결과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이러니컬한 공범자의 운명에 대한 위로이자 끊어질 길에 대한 예언적 동화처럼 보인다. 살에 와닿는 듯한 직접성과 현실감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더욱 쓴맛이 느껴지는 진실로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림트의 그림과 네코미미라는 이 엄한 조합....

근간의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특징이라면 매니악한 감각의 수요에 대한 집중적 공략이 세분화된 형태로 분류되어 일종의 의식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나오는 하이브리드적 결과물이란 점이다. 이것은 대중 문화산업에서의 소비 주체자로 오타쿠 계층이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걸 뜻하는 것이고 에반게리온이 끌어들인 적극적인 담론화의 과정 이후에서부터 꾸준히 내려져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정의 노래라는 고상한 이름이 붙은 이 작품 또한 그 흐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드고어 미소녀 하렘물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티비 애니메이션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잔혹성의 한계를 시험한다. 일본 하드고어 애니메이션의 전통이 보여줬던 노골적인 잔혹성에 열광했던 이들이라도 이 정도의 표현이 야간 방영이라곤 하지만 티비에서 버젓이 방영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오카모토 린이 영점프에 연재하는 더럽게 재미없는 동명의 원작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첫화에서부터 사지절단의 학살극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날아다니는 팔다리와 쏱아지는 핏더미를 구경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토리를 따르는 친절한 학살 안내도.

절단된 손가락의 단면을 클로즈업으로 비춰주는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한가운데에 있는 건 미소녀들이고 하렘의 법칙에 따라 주인공 주변으로 좀비들처럼 서서히 몰려온다. 히로인인 뉴의 머리에 달린 귀를 주시하라. 네코미미의 변형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저 오타쿠적 미소녀 패턴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디자인이라니. 그런데다 그들은 서비스씬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충실하다. 한쪽에선 하드고어의 제전이 펼쳐지지만 다른 한쪽에선 미소녀들과 누드가 그만큼 충실하게 시청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이 두가지 극단적인 감각의 공존은 작품에 병적인 이미지를 씌워준다. 그 관계가 유독 낯설어보이는 것은 문제의 두가지 요소가 인과성 있게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것은 <네크로맨틱>보다 더 고약한 취미이다. 적어도 <네크로맨틱>은 죽음과 섹스의 결합이 지독하게 끈끈했기 때문에 작품 자체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로맨티시즘의 기운마저 돌았었다. 하지만 <엘펜리트>가 추구하는 영역은 하나의 전형이 된 하렘물의 주인공들에게 가하는 극단적인 폭력의 광경이다. 그것은 하드고어 동인지의 전통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의식이며 미소녀와 하드고어라는 두 조합은 발상의 참신함과 표현상의 불쾌감을 동시에 감수해야 확인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엘펜리트>는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솔직히 왜 연재중단이 안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주는 원작. 작가가 여자라는 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카모토 린의 원작이 워낙에 형편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원작이 가진 너저분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최대한 발상의 참신함을 가진 모티브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하드고어적 감각을 티비 애니메이션 수준을 뛰어넘는 지점으로까지 발전시킨 애니메이션판은 이제는 아예 관습이 되어버린 부실한 작화와 연출의 시공을 가리지 않는 출현이 눈에 거슬리긴 해도 그럭저럭 점수를 주고픈 작품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연상케 하는 음악과 더불어 클림트의 그림들과 연결시킨 유난히 정적인 오프닝은 역시나 자뻑 증세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게 만들지만 피칠갑이 된 죽음과 오타쿠적 에로티즘이 공존하는 병적인 감각이 클림트의 그림이 보여주는 건조하고 병적인 에로티즘과 괜찮은 화학효과를 일으키는 걸 고려하자면 그 선택이 그리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는 여전히 자유로움에 대한 것이다. 도달하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언제야 나는 해방이 가능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프트 펑크를 듣는 것은 언더월드와는 또다른 의미에서의 혹사다. 휘몰아치는 비트와 이펙트의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마조히즘적 쾌감에 빠지게 만드는 언더월드와는 달리 다프트 펑크는 무척이나 부드럽게, 그리고 끝없이 유혹한다. 플로어에 몸을 내동댕이 치고 콘크리트 벽을 부숴라 두드리게 만드는 언더월드의 파열적인 거칠음이 없는 대신 다프트 펑크는 우리를 단순 반복 운동의 기계 부품으로 만든다. 위험하다.

 

http://music.bugs.co.kr/Info/album.asp?cat=Base&menu=m&Album=205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슬링거 걸> 1쿨 13화를 다 봤다.(미쳤지...-_- 내일은 방언학 관련 리포트 하나에 시험이 두개가 껴있는데... 1바이트도 작성 안 한 상황.) 뭐 매드하우스에서 제작을 맡았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는 부실한 작화가 눈을 찌푸리게 만들긴 했는데.... 아는 사람은 알테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스토리적으로 아동인권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작품이다. 바로크풍 하드보일드 로리물이라고나 할까.

배경은 현대 이탈리아.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극우 정치조직인 공화국파와 마피아의 끊임없는 테러에 대항하여 정부는 사회복지공사라는 듣기는 좋은 조직을 출범시킨다. 그 조직은 사고나 선천적인 문제로 인해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 불가능한 소녀들을 데려와서 의체를 통해 신체기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정신제어로 대테러 작전에 적합한 정신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여러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목적인 조직이다. 이것은 그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다.

일찌기 총과 자동차와 미녀의 조합은 총포상과 주차장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그라비아 모델 달력을 통해서 입증이 되는 바, 소노다 켄이치는 <건 스미스 캣츠>를 통해서 마초이즘이 가장 극적으로 발현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한 양상을 훌륭하게 형상화했다. 거유 취향에다 로리콘, 본디지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취향을 선보여줬던 건 스미스 캣츠는 핀업걸의 세련된 하드보일드 액션 버전이었다. 동시에 총과 미소녀라는 아이콘의 만화에서의 장르적 공식이 그 지점에서 완성됐다.

<건슬링거 걸>은 차를 제외한 총과 미소녀라는 컨셉을 보다 고급화, 특정화한 결과물이다. 비록 사각턱이지만 어쨌든 미소녀, 그것도 로리타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연령대의 미소녀들이 나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따른 결과이다. 그들은 모두 총과 무술 등 전투 교범의 달인들이며 그중 하나는 무식하게 생겨먹은 SIG를 달고 다닌다. 피렌체와 시칠리아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고 미술관에선 총질을 금하는 품위있는 테러리스트도 나오지만 안타깝게도 작화는 이탈리아 미술이 이룩해낸 찬란한 성과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이탈리아의 단편적인 풍경들만 가까스로 따온다.

흥미로운 것은 미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되어있음에도 작품 내에서 제대로 된 노출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육체의 드러냄이란 측면에서 이 작품은 엄격할 정도로 금욕적이며 그것은 작품의 중심에 남성 권력에 착취 당하며 손쉽게 로리콘적 욕구의 대상이 될 어린 여자아이을 배치시켜놓으면서 어두운 색감과 낮은 톤의 대사들, 내내 정장을 고수하는 인물들을 통해 한참 우회해서 발현되는 자기검열적인 페티시즘적 에로티즘이다.

만화적 자유주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 작품이 가지는 일체의 논쟁적 함의들을 지우고 나면 이 작품은 무척이나 패셔너블하며 감각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물건이다. 그런데다 주인공들은 비극이 만연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가련한 존재들이라 그들이 기뻐하는 일상의 소소함과 삶의 모순이 안겨주는 갈등은 이야기가 전해주는 운명적 슬픔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이 작품의 흐름 내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면 분명 히로인들을 너무도 가혹하게 몰아가는 새디스틱한 설정에 대한 거부감일테지만. 아, 그리고 애니메이션판에 대해서라면 앞서도 언급한 딸리는 작화와 다소 부실한 연출.

그림에 있어서나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서나 아이다 유의 원작 만화책판이 낫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호천사를믿어요 2006-05-3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더구나 시니컬한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