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63-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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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에 걸친 철야 노가다를 끝내고 집으로 와 15시간 가량을 잔 다음 처음으로 켠 음악이.... 이 놈이었다. 게임 로컬라이징의 한 성과를 대변하는 이 앨범은 한국판 길티기어 익젝스 샤프 리로드만을 위해 만들어진 독자적인 타이틀이며 YBM시사닷컴에서 발매한 동명의 게임 정식발매판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제작의 전 과정은 신해철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새로운 멤버들로 이뤄진 넥스트가 본격적인 출정을 하기 전, 멤버들 간의 호흡을 맞춰보기 위한 일종의 실험적인 시도였던 발판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모든 곡은 인스트루멘탈로 이뤄져 있으며 이제 시리즈로는 네번째 버전이 나와 하나의 스타일을 이뤄낸 일본판 사운드트랙의 전체적인 기조인 멜로딕 스피드-스래쉬 메탈를 따르는 방향을 보이며 거기에 넥스트 특유의 프로그래시브 성향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들이 접목되어 있는 인상이다. 기존의 틀에 맞춰져 진행되어 컨셉적인 면에서의 고민이 크게 없었던 점이나 철저하게 BGM으로서의 기능이 극화된 탓에 시원시원 무리가 없다는 점이 아무래도 작곡상의 용이함과 동시에 음악들 간의 차이가 그리 없는 비슷비슷한 트랙에의 양산을 가져왔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일정한 퀄리티를 꾸준히 유지하는 전 40여 트랙을 단 두 달만에 만들어낸 노가다 근성은 실로 감탄할만 하다.... 좋구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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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가상 세계의 아이들
에티엔 바랄 지음, 송지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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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오카다 토시오가 쓴 <오타쿠학 입문>은 오타쿠라고 하는 특화된 계층의 정당함을 웅변하고 있다. 그는 그자신이 오타쿠의 입장에 서서 그제껏 오해되고 왜곡되어 온 오타쿠들의 문화와 능력을 설명하고 그들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개선해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오카다 토시오의 책은 그들이 왜,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그리고 일본이라는 사회에 출현했는지에 대해서 썩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주진 못했다. 그들은 진화된 인간이며 거기 있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설명이 실리지 못한 그의 저서는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한계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에티엔 바랄이 쓴 이 책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그리고 재일 프랑스인이라는 외부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흥미로운 오타쿠 분석기이다. 여기서 저자는 오타쿠의 생성원인을 밝히는 작업에 분명한 촛점을 맞추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논리를 전개시켜나간다.

비록 <유유백서>를 '남성우월주의적 경향이 강한 레슬링 선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일본에서 십년을 넘게 산 사람이 쓴 책이라곤 도저히 믿겨지질 않는 센스와 지식을 보여주기도 하는(이 부분은 저자 탓인지 번역자 탓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이 책은 <유유백서>에 대한 설명과 맞먹는 무지가 곳곳에서 돌출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좀 넘겨주고 참아주고 하면 현대 일본 사회의 하위 문화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해로 가득한 괜찮은 오타쿠 개설서이기도 하다. 이미 오타쿠 문화라는 것이 영역별로 특화된 일종의 종합지식인의 형태로 놀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직접 오타쿠가 되지 않는 한엔 그들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종의 개설, 혹은 설명에 대한 양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또한 외부인으로서 오타쿠 문화를 바라보는 이의 한계를 담보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학문이 아닌 행동으로서의 오타쿠를 강조하는 오타쿠 이론가들은 이 부분에서 오타쿠와 비오타쿠가 구분된다고 천명한다.

그렇다면 장 자크 베넥스의 서문에서 보여진 가능성처럼, 그리고 오카다 토시오가 그렇게 바라던 것처럼 오타쿠란 단어는 과연 '매니아'라는 단어처럼 그 쓰임새가 광범위한 영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언어가 하나의 권력으로서 자리한다고 보자면 '매니아'가 퍼지게 된 데에는 영미권 제국주의의 성과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에 비해서 현재 시점에서 오타쿠는 그 표면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너무 많이 붙어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측면의 문제이다. 그랜다이저가 100% 시청율을 기록했던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오타쿠라는 일본어를 대하는 시점에서의 미묘함이 가진 폭이 더 커진다. 다수의 부정적 사건과 연관되어 온 오타쿠란 단어가 일본에서는 찬반양론이 그나마 담론의 자리를 형성했다고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오타쿠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단어다. 그것은 현상 이전에 역사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어린시절 추억 중 하나가 국적을 속인 일본 애니메이션과 관련되어 있고 공사판에서 쓰이는 단어의 대부분이 일본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이 오타쿠란 단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율배반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자에 있어선 가면라이더와 울트라맨에 빠져살았음에도 이후 그 세계를 저버린 일본의 소위 '비오타쿠' 계층과도 일치하는 측면이다. 오타쿠의 부정적 현상을 증폭시키는 외양적 측면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일맥상통한다. 오타쿠 문화가 가치파괴적이고 반사회적 성향을 보이며 동시에 특정영역에서의 고도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극단을 대변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자면 오타쿠층에서 뒤어나오는 일탈과 직접적인 반사회적 현상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유난히 따가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몇 오타쿠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흔한 인간인지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장르문학이 주류문학으로 편입하려 애쓰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가능성은 있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시도.

혹은, 그리 애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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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인생의 궤적을 한 번 더 틀어 미대로 편입을 결정한 녀석과 엠에센으로 얘기할 수 있었다. 구상쪽 능력이 늘었다느니, 그림체는 99년부터 굳어진 채라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들을 하다가 나는 문득 대학교 1학년을 다닐 때, 5년 전 그 때에 내 기억 속에 있던 여자를 얘기하게 됐다. 이름도 까먹은 그녀는 레즈비언이었고, 오직 그 사실만이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연락을 하는 사이냐고 물으니 그때도 별로 친분이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기억하겠냐고 되묻는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유별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고려해봐야 했다. 물론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나였다.

난 사람의 이름을 거의 기억 못한다. 좀 오래된 사람들, 나랑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에서부터 한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조차.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친구들 중에서 내 기억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무척 소수다. 얼마 전엔 거리에서 분명히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사람 한 명을 만나서 5분 정도 얘기를 했다. 그의 인상은 분명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지만 이름은 아녔다. 그는 마치 보험회사 직원처럼 옷을 차려입고 있었고 나를 무척이나 친숙하게 대해줬다. 난 끝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 안 나서 무척 곤란했지만 그의 말에 맞춰서 근황이라든지, 하는 일이라든지를 묻는 정도는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곤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익숙해져버린 일이다.

돌아다니다 언뜻 친구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됐다. 그 친구는 자신의 기억과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중인 친구였는데.... 역시 나보다 나은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12년만에 만난 국민학교 동창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다니. 나는 국민학교 시절 나와 같은 반이었던 이를들을 모조리 잊어먹은 상태다. 중학교? 역시 거의 없다. 고등학교마저도 희미한 상태인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끔씩.... 이라기보다는 꽤 오래 전에, 이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관계와 경험. 그 선에 맞추어 나의 관계로 이어진 이들을 찾아서 그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것. 느끼는 것.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그 욕구는 버터 녹듯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어째서일까. 나의 욕구란 인스턴트? 아마,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난 어느 때부터 순간을 사랑하게 됐고 진득하니 쌓여진 개인적인 역사들을 부정하게 됐다. 그래도 그 누군가인지 모를 희미한 관계의 끈, 그 끝에 자리한 이를 만나면, 난 웃고 떠들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내 뇌가 그 기억을 그 다음날 이후에도 계속 저장시켜 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연한 계기로 기억하게 된 이름으로 중학교 때 알던 여자아이의 싸이홈피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이 변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듯 했다. 그러자 난 그녀가 나보다 키가 컸고 반장을 했었으며 지위에 걸맞는 품위를 갖추어 나를 존중했었으나 나중엔 나를 경멸했음을 기억해낸다. 그것은 분명 그 또래 아이들이 가질 법한 치기로 인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스캔들을 그리도 부끄러워하고 매일 아침 이슬만 먹는 것처럼 굴면서 뒤로는 골든보이와 엔젤을 돌려보던 능청스러움의 미덕이 가진 가치를 알던 아이들이었으니까(어찌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딱 이 정도 의식상태를 무척이나 오랫동안 유지하기 마련이다). 나는 잠시동안 그 시간을 떠올려본다.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구석에 박힌 안 쓰이던 새폴더를 열어보듯. 이렇게, 기억은 나를 이해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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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꿀벌 7 - 완결
안노 모요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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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록 <트럼프스>로 잠시동안 외도를 하긴 했지만(그리고 성과가 좀 아녔지만) 안노 모요코의 장기는 역시 연애물에서 발휘된다. 소위 '쿨하다' 라고 하는 형용사를 완벽에 가깝게 만족시키는 그녀의 캐릭터들, 주로 주체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는 작품군 가운데에서 이례적으로 남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잡은 이 작품은 그 선택에도 불구하고 이채롭다기보다는 동어반복에 가깝다.

일단 이 작품이 연재된 잡지는 청년지다(영매거진). 그래서인지 기본적인 상황 설정, 코마쯔라고 하는 천하쑥맥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모습은 소학관 소년잡지에서 시작되어 진화한 전통의 연애물들(전영소녀, 아이즈, 딸기백푸로... 등등, 정확히는 점프쪽 연재물들에서 그 공식이 성립된)에서 나오는 적당히 멍청해서 정겹고도 지겹기까지 한 주인공들의 행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기존 순정만화에서의 공식을 바꿔 놓은 안노 모요코 만화의 특징은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의 패턴 뒤집기와 개성 강하고 스타일이 탁월한 캐릭터들이 풀어내는 현란한 수다와 유쾌한 오버액션에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그녀는 간만에 그러한 자신의 장기들을 유감없이 드러내보인다. 어쩌면 발상과 기본틀이 마사카즈의 매너리즘적인 작품들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소위 스탠다드한 영역 밖에서 노는 것은 그러한 그녀의 솜씨 덕이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그녀의 전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로 거침이 없다. 그게 한심한 모양이든, 쿨한 모양이든, 적어도 행동에 대한 진심을 묻는다면 그들은 당당하다.

또한 이 작품을 청년만화답지 않게 복잡다단하게 만드는 요소는 연애라고 하는 것을 이미 질릴 정도로 다뤄본 작가의 감각이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탓에 기존의 청년만화에서의 연애물에선 보지 못한 거칠고 쿨하며 동시에 섬세하고 롤렉스시계 속마냥 복잡한 구조의 성격을 지닌 그녀들에게서 빚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당최 고민의 겨를이 없는 한심단순한 코마쯔라는 숫컷 캐릭터의 시선을 빌어 여성들의 심리, 정확하게는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성적 연애관을 되짚어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선 언니들의 재치있고 쿨한 세계관보다는 지독하게 정형화된 우리의 화자 코마쯔의 한심한 행각과 사고관쪽이 보는 이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어준다. 이 부분은 작가의 본바탕이 순정만화쪽에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 수도, 소년만화라는 틀에 맞추려 한 작가의 지나친 오버액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또한 이 작품의 문제점이라면 그녀의 작품들에서도 소수의 작품군만이 그 재난을 피해갈 수 있었던 특유의 미묘한 용두사미적 흐름과 관심이 없어진 캐릭터에 대한 적극적인 폐기정신이다. 이것은 그녀의 작품이 시트콤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단발마적인 감각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 흐름에 철저하게 따라가는 모습이야말로 지독할 정도로 트렌드에 민감한 작가의 사고관을 대변해주는 건 아닌지(그러나 개인적으로 큐티하니 실사판에서 보여준 그녀의 감각은 패션의 패자도 모르는 나에게 꽤나 안도감을 안겨줄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독하게 하드보일드했던 <러브마스터X>의 보다 유연해진 버전인 이 작품은 오랜만에 낄낄거리며 읽을 수 있게 만든 센스 있는 작품이었다(참고로 본인은 딸기 일백푸로를 1권을 채 못 넘기고 던져버린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안에서 감정과 관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과 답들과 오류들은 각각 진실과 착각을 담고 있다. 그 헛점의 범위가 전성기를 거치고 한동안 헤매면서 보여줬던 그녀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분명히 갈피를 잡고 있는 덕에 그리 크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에 합격점을 주고싶다. 나머지는 그녀의 유희적인 감각이 담당해야 할 몫이고 다행스럽게도 확실하게 유쾌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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