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인생의 궤적을 한 번 더 틀어 미대로 편입을 결정한 녀석과 엠에센으로 얘기할 수 있었다. 구상쪽 능력이 늘었다느니, 그림체는 99년부터 굳어진 채라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들을 하다가 나는 문득 대학교 1학년을 다닐 때, 5년 전 그 때에 내 기억 속에 있던 여자를 얘기하게 됐다. 이름도 까먹은 그녀는 레즈비언이었고, 오직 그 사실만이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 연락을 하는 사이냐고 물으니 그때도 별로 친분이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기억하겠냐고 되묻는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데 유별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고려해봐야 했다. 물론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나였다.
난 사람의 이름을 거의 기억 못한다. 좀 오래된 사람들, 나랑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에서부터 한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조차.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친구들 중에서 내 기억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무척 소수다. 얼마 전엔 거리에서 분명히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사람 한 명을 만나서 5분 정도 얘기를 했다. 그의 인상은 분명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지만 이름은 아녔다. 그는 마치 보험회사 직원처럼 옷을 차려입고 있었고 나를 무척이나 친숙하게 대해줬다. 난 끝까지 그의 이름이 기억 안 나서 무척 곤란했지만 그의 말에 맞춰서 근황이라든지, 하는 일이라든지를 묻는 정도는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곤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미 익숙해져버린 일이다.
돌아다니다 언뜻 친구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됐다. 그 친구는 자신의 기억과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중인 친구였는데.... 역시 나보다 나은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에, 12년만에 만난 국민학교 동창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다니. 나는 국민학교 시절 나와 같은 반이었던 이를들을 모조리 잊어먹은 상태다. 중학교? 역시 거의 없다. 고등학교마저도 희미한 상태인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끔씩.... 이라기보다는 꽤 오래 전에, 이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관계와 경험. 그 선에 맞추어 나의 관계로 이어진 이들을 찾아서 그들의 경험을 들어보는 것. 느끼는 것.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그 욕구는 버터 녹듯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어째서일까. 나의 욕구란 인스턴트? 아마,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난 어느 때부터 순간을 사랑하게 됐고 진득하니 쌓여진 개인적인 역사들을 부정하게 됐다. 그래도 그 누군가인지 모를 희미한 관계의 끈, 그 끝에 자리한 이를 만나면, 난 웃고 떠들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내 뇌가 그 기억을 그 다음날 이후에도 계속 저장시켜 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연한 계기로 기억하게 된 이름으로 중학교 때 알던 여자아이의 싸이홈피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이 변했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듯 했다. 그러자 난 그녀가 나보다 키가 컸고 반장을 했었으며 지위에 걸맞는 품위를 갖추어 나를 존중했었으나 나중엔 나를 경멸했음을 기억해낸다. 그것은 분명 그 또래 아이들이 가질 법한 치기로 인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스캔들을 그리도 부끄러워하고 매일 아침 이슬만 먹는 것처럼 굴면서 뒤로는 골든보이와 엔젤을 돌려보던 능청스러움의 미덕이 가진 가치를 알던 아이들이었으니까(어찌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딱 이 정도 의식상태를 무척이나 오랫동안 유지하기 마련이다). 나는 잠시동안 그 시간을 떠올려본다. 노스탤지어라기보다는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구석에 박힌 안 쓰이던 새폴더를 열어보듯. 이렇게, 기억은 나를 이해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