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선 무삭제판으로 처음부터 다시 재발간을 진행중인 [창천항로]가 일본에서 드디어 종결됐다고 합니다. 11년. 정말 긴 시간이었군요.

그림은 왕흔태, 스토리는 이학인씨가 맡아서 만들어졌던 [창천항로]는 우리나라 사람이 스토리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선 1994년부터 고단샤 모닝지에, 우리나라에선 1995년부터 격주간 투엔티 세븐에서 연재가 됐고 그 중간에 이학인씨는 우리나라 작가 조원행씨와 함께 [봉황의 성골]을 투엔티 세븐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은 반응이 썩 좋은 편은 아녔죠. 이후 투엔티 세븐이 휴간되면서 [창천항로]는 단행본으로만 나왔습니다. 그게 한 28권 즈음까지 나왔는데, 이건 업계의 풍문이지만 그즈음에 작가쪽에서 그제껏 번역본에 칠해져있던 것들 지우고 삭제한 거 살려서 제대로 된 판본으로 다시금 책을 내달라고 했다더군요. 작금의 재출간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는 소문.

[창천항로]를 보면 [삼국지]에 관한 모든 해석이 시시해 보여집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통용되는 얘기입니다. 가히 파격이란 수사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이 만화는 법가의 괴물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람들이 [삼국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관을 산산이 부숴버립니다. 물론 조조를 중심으로 다룬 [삼국지]는 많습니다. 그러나 [창천항로]에서 보여줬던 조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창천항로]는 만화라는 틀을 사용함에 있어서 역사적 리얼리티를 적절하게, 작가 자신의 파격의 가치관에 맞춰서 수용하면서 [삼국지]에 대한 완전한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창천항로]는 법가적 세계관에 대한 예찬과 영웅들, 특히 조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못해 철철 넘쳐 흐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체주의적인 애착에 휩싸여 있고 지극히 마초적이며 요란하면서도 힘있는 전개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재밌습니다. 그것이 권력을 향한 말초적인 재미를 자극한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이 허풍당당한 만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면서 독자를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동탁을 가리킴에 있어서조차도, 거듭 강조되는 그에게 붙여진 마왕이라는 별명은 [창천항로]에선 되려 찬사입니다. 피와 철의 시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왕권이라는 그릇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원소는 꿈속에서 자멸하게 되고 도가의 귀신인 제갈량은 조조에게 한 대 얻어맞고 흙탕물 가득한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오직 조조만이, 그리고 조조와 동일어인 [창천항로]는 그렇게 저 같은 사람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동안 저멀리 달려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천항로]도 위기가 있었죠. 이학인씨가 1998년에 간장암으로 돌아가셨을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비록 이학인씨가 생전에 미리 써둔 원안을 바탕으로 연재가 재개됐지만 이후 [창천항로]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힘이 쭉 빠지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갈팡질팡 헤매는 듯한 인상을 팍팍 줬었죠. 스토리작가의 역량과 비중이 어느 정도의 무게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한참동안 헤매던 이 작품도 십여 년을 넘게 연재를 지속한 왕흔태씨의 내공 덕인지 결국은 정상궤도를 찾더군요. 대표적으로 연의에선 [삼국지] 최대의 이벤트라고 불리우고 우리나라에선 판소리까지 만들어진 바로 그 적벽대전을 고증에 입각해서 달랑 한 권으로 끝내버린 것은 확실히 왕흔태라는 작가의 의지의 발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에 매끄럽게 이어지는 조조의 마초 공략전은 간만에 [창천항로]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일본쪽 정보들에 따르면 35권이나 36권쯤이 마지막 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이제 25권. 아직 즐거움이 제법 남았군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dan 2005-11-3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hallonin 2005-12-01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으고는 싶은데 분량이 심하게 압박-_-

배가본드 2005-12-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책도 굉장히 좋아하지만 책방에 안들어온다는 압박...ㅡㅡ;;

hallonin 2005-12-15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어. 창천항로를 안 들여놓다니 장사를 안 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군요. 흘흘.
 

클린턴 정부 시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군사적 실패였던 소말리아 사태와 아이디드 납치 작전의 실패를 방임주의적인 보수적 시각으로 그려낸 이 논픽션이 보여주는 디테일함은 하룻밤 동안 미군이 겪어야 했던 악몽 같은 현장을 현실 그 자체로 치환해 보이는데 철저하게 몰두한다. 덕분에 활자로도 영상 다큐멘터리적 감각을 자아내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이 원작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제리 브룩하이머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꺼리였으리라. 그런데다 기가 막히게도 9.11까지 터져버렸다. 미국내의 보수적 흐름들은 미국외에서 벌어질 군사작전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필요로 했고 국방부의 홍보자금은 자연스럽게 헐리웃 산업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브룩하이머의 제작력과 국방부의 아낌없는 원조, 거기에 스타일리스트 리들리 스콧까지 가세한 이 프로젝트는 이완 맥그리거와 조시 하트넷, 에릭 바나, 올랜도 블룸과 같은 A급 배우들까지 끌여들여서 완성됐다. 덕분에 이 영화가 가지는 선전성은 안 봐도 뻔한 지경에 이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지점이 상당히 미묘하다.

리들리 스콧이 여기서 보여주는 시가전의 퀄리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거친 리얼리티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그 리얼리티는 영화가 가진 무기질적 감각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영화는 전투 현장에 바로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삭막한 다큐멘터리의 기조를 가지고 있다. 전투현장에 대한 집중적인 묘사와 시간할애는 두시간 20여분에 이르는 영화를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들고 있다. 머리를 박박 깎은 톱스타들은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로켓탄과 기관총탄을 피해 도망치고 응사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객체화된 주인공들을 대신하여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장감을 추구하는 격렬한 이미지, 그 자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드라마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단 한 명의 미군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우리가 미국에게 가지고 있는 오래된 속설의 증명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 영화의 진정한 반전, 그들 미군이 스무 명 가량이 죽는 동안 소말리아인은 1000여명이 죽어나갔다는 영화 마지막의 설명에 의해 무력화된다. 전쟁영화들이 양념처럼 넣는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감 또한 이 영화에서 진하게 느껴지거니와 그것이 이젠 일종의 공식이 되었다는 냉소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비웃는 것처럼 삽입된 자막을 보고도 이 영화가 팍스 아메리카나 찬양기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리들리 스콧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나름의 예상을 해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라크 점령 시대에 헐리웃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시정부를 향해 대놓고 삿대질을 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만든 감독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영화 속에서나 결국 실패한 아이디드 납치 작전 이후 미국은 국내여론에 밀려 소말리아에서 손을 뗀다. 그러니 아프간 침공에 이어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던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이 영화를 보고 격찬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부시와 더불어 제법 혼돈스러운 정신세계를 갖추고 있음을 우회해서 고백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긴 소말리아에선 이라크 만큼 석유가 나오질 않으니까.

하지만 [블랙 호크 다운]에서 드러나는 기조에는 마냥 반전정신과 진보적 성향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주춤거림이 보이는 지점이 있다. 이것은 리들리 스콧이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 이 영화를 완성했다는 그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그가 꾸준하게 가지고 있는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욕구와 지향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게 만드는 사실이다. 결국 리들리 스콧이 흙빛 가득한 인상적인 비주얼로 전쟁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해내는 데에는 기관총과 로켓탄과 죽음, 그리고 국가주의적 테이스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십자군전쟁을 재현하여 비웃기 위해선 웬간한 국가사업 예산급을 동원해야 하는 헐리웃에서의 메이저 감독이라는 위치의 딜레마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한스 짐머가 맡은 또하나의 걸작 사운드트랙인 이 앨범에서 영화의 스코어들은 중동-아프리칸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수반되는 에스닉 사운드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전쟁영화 다운 선 굵은 일렉 기조의 음악들을 첨가, 혼합하는 정석적인 양상들을 간간이 보여주고 있으며 곡배치적으론 그의 또다른 걸작인 [미션 임파서블2] 스코어 사운드트랙이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하나같이 보통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곡들이란 점에선 역시 한스 짐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 자끄 아노가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부터 시작되어 9.11 사태를 전후로 최고점에 달한 헐리웃의 전쟁영화 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 분명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부터 <블랙 호크 다운>, <위 워 솔저스>에 이르기까지 헐리웃 영화들은 테마파크적 영화들, 즉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실재감을 주게 하는데 유독 신경을 썼다. 그렇게 헐리웃에서 만든 전쟁영화들은 대개 전쟁의 스펙터클에 몰두한 나머지 개인을 객체화한다. 그래서 일련의 테마파크형 전쟁영화들은 인물은 거세되는 가운데 국가주의적, 보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에 반해 유럽의 다국적 자본이 모여 만든 <에너미 엣 더 게이트>는 비록 그 출발지점은 독일군의 공세 속에서 활약했던 소련군의 전설적인 저격수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영웅전기의 색채를 띄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결과는 흥미롭게도, 그와 다른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스탈린그라드는 한마디로 지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서부 전선을 어느 정도 평정하는데 성공한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동맹을 전격적으로 파기한 다음 제 3제국의 명운을 걸고 동부전선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파죽지세로 소련의 심장부인 스탈린그라드에까지 이르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는 2차 대전에서 가장 격렬했던 공방이자 단일전투로는 사상 최대인 1백 65만 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전투로 역사에 기록된 처절한 시가전이었다. 전투는 결국 혹한과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동안 소련군과 스탈린그라드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겪어야 했던 경험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 속에서 으례 나타나는 전설, 영웅의 이야기가 세상에 만들어졌다. 스탈린그라드 곳곳에서 신출귀몰하게 출현하며 독일군을 사냥하는 천재적인 저격수 바실리의 이야기.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그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에서 무능한 수준이었던 바실리가 어떻게 사격을 배우고 살아남아서 결국은 영웅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전설에서 빠져나와 보다 성숙한 개인으로 재탄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 원래 실존했던 바실리라는 인물은 그 성장사나 개인사적 측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전직이 목동이었으며 전쟁통에 극적으로 등장한 정도만이 확인이 가능한데 그 과정에서 그의 출현을 극적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다닐로프였다. 다닐로프는 당시 군사적으로 노골적인 수준차를 보이며 수성에만 힘써야 했던 소련군의 일방적인 희생이 독일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아군의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는 당시 상황을 우려했던 홍보담당이자 정치장교였다. 그가 바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은 천운에 가까운 것으로 바실리의 영웅담은 곧바로 다닐로프의 손에 의해서 확대되고 왜곡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확실히 바실리는 탁월한 저격수이긴 했다. 그러나 다닐로프가 재생지에 박아 넣는 그의 무용담에서처럼 달려가면서 수백 미터 밖의 독일군의 정수리를 정확히 맞출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귀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알게 됐음에도 바실리는 그에 대해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국익이라는, 양적으로 보다 큰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했던 상황. 그래서 영화 말미까지 다닐로프는 바실리를 일종의 인형으로 본다. 그가 보기엔 바실리야말로 자신이 만들어낸 걸작품, 글로써 환상을 먹이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상적 망상이 집약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닐로프가 바실리에게 가지는 감정은 애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성질의 것이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되고픈 ‘육체적으로’ 이상적인 인물상을 바실리에게 투영한 것이었으며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괴감 또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바실리를 움직이려고 든다.


그런 바실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타냐와 샤샤의 역할이다. 황당한 영웅담들과 그의 소총탄에 의해 구멍이 뚫린 사람 수로만 평가되는 바실리는 일종의 뭉개진 캐릭터다. 그래서 그의 감정은 끊임없이 억압받으며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꼭두각시였던 그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자각증상이 오는 순간, 그는 스스로의 의지를 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바실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다닐로프와의 갈등 또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다닐로프는 타냐가 아니라 바실리에게 집착한다. 혹은 바실리에 대한 소유분의 격차를 느끼고서 타냐에게 집착한다. 그에게 있어 바실리는 끊임없이 소유 대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바실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타냐를 사랑하고 다닐로프의 명령들을 하나씩 거부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거짓 명성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하는 순간에서부터 다닐로프는 그를 그렇게 만든 타냐에 대한 질투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터에서 바실리와 타냐, 샤샤는 일종의 유사가족 관계를 구성해내게 된다. 그러나 이 가족관계는 문제가 있다. 바로 샤샤가 소련과 독일 사이의 이중첩자라는 점에서, 이 관계가 가지고 있는 불안점이 내재된다. 전쟁터에서의 내통자는 흔한 경우다.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자리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공동체의 신념과 어긋날 때, 그 부분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샤샤는 위태로운 균열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전쟁터가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를 천진한 심성의 한 표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실리의 유사자식적인 위치에서, 아들을 잃은 코그니의 손에 죽음으로써 바실리와 코그니를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놓는, 그래서 극의 처절함을 더해주는 플롯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막바지와 더불어 이야기의 종극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마침내 서로 맞서게 된 저격수 라이벌인 바실리와 코그니 대령은 목숨을 건 결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닐로프는 타냐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인형이라고 여겼던 바실리에 대한 마음을 반전하게 된다. 영화는 다닐로프의 마음이 타냐에게 향한 것인지, 바실리에게 향했던 것인지를 끝까지 모호하게 처리한다. 이것은 영화가 유사 호모섹슈얼리티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기 싫었던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닐로프가 타냐의 자기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바실리에 대한 애증의 교차를 애정 하나로 고착시킨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다닐로프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바실리에게 코그니 대령의 위치를 가르쳐 줌으로써 죽음을 통해 타냐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당대의 헐리웃 전쟁영화들에선 보기 힘들었던 감정의 흐름들과 인간관계의 복잡다단함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국가라는 거대한 주체에 맞선 객체의 당당함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헐리웃 전쟁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바실리, 다닐로프, 타냐, 샤샤는 모두 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이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억울함이 여기선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보다 큰 공명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폭력의 스펙터클과 스토리적으로 도식화된 자기희생적 감동에 함몰되지 않고 그 부분이었던 객체들의 애정과 갈등, 그리고 그의 봉합을 비록 비극적이지만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

 

소요시간 40분. 진라면 순한맛 40개 짜리의 가치 획득에 성공-_- 친구뇬의 애인의 리포트를 써달라고 해서 써 준 결과물.... 뭐 위의 논지와 본심과 조금씩 다른 거라면, 영화가 중반부는 아주 루즈해져서 레이첼 와이즈의 매끈한 엉덩이가 돋보였던 거적떼기 속 비비적 정사씬(광고문구에서처럼 역시 장 자끄 아노!-_-라고 외칠 정도는 아녔지만 암튼 훌륭)만 빼면 꽤나 지루했다는 점과 모호하다고 써놓긴 했지만 다닐로프와 바실리의 관계는 호모섹슈얼리티가 다분했다는 점 정도. 당시 개봉되던 헐리웃 전쟁영화들과 꽤 분명한 대척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안.

 

아아, 이걸로 2주 정도는 끼니 해결이겠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1-30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llonin 2005-11-3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가격은 잘 모르겠지만서두.... 암튼 웃으면 안됩니다-_- 배고파요....
 


http://imbc.com/withmbc/center/event/event02/best/intro/

[태릉선수촌]의 연출자인 이윤정씨와 주연 네 분, 그리고 음악을 맡은 티어라이너까지 참석하는 자리입니다. 그 전에 [태릉선수촌]을 100분으로 편집해서 보여준다고도 하는군요. 저녁 7시. 가히 업그레이드 공효진이라고 봐도 될 법한 김별씨를 보러가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차비 때문에 갈 수 있을런지 모르겠슴다-_-

http://dramamob.co.kr/Review/View.asp?PKId=440

이건 [태릉선수촌]에 대한 분석글. 필자의 해당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엄할 정도의 장문으로 표현된데다 스포일러 투성이니 드라마를 본 분들만 보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lowup 2005-11-27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 팬들 사이에 낀 30대 아줌마는 아무래도;;;

hallonin 2005-11-2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 아줌마라 더 스폿라이트 받을지도? 주최측에서 특별배려해줄지도 모릅니다 헐헐
 



[캐리비안의 해적들]로 헐리웃 제작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중년 아이돌이 되기 전의 조니 뎁은 팀 버튼이 그를 데리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스튜디오와 대판 싸울 것을 각오해야 했던 저주받은 이들의 왕자였다. 자산보유량에 비추어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는 그의 가치가 드러난 영화는 수없이 많았지만, 이제야 보게 된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도 그 자리에 올려야 할 듯 싶다.

처음 이 영화의 존재에 대해 안 것은 1998년 7월의 키노에서였다. 당시에 무려 [고질라]와 박스오피스의 자웅을 겨룰지도 모른다는 수사가 붙어있던 이 영화는 그 이후 당최 소식이 없었고, 당연히 우리나라에선 제대로 소개조차 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려 '크라이테리온'의 딱지를 달고 DVD로 나와있었다. 2003년.

곤조 저널리즘의 창시자 헌터 톰슨이 1971년에 발표한 원작을 영화화 한 이 작품에서 조니 뎁은 대머리 저널리스트 라울 듀크로, 베니치오 델 토로는 배불뚝이 변호사 닥터 곤조가 되어 히피즘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시대의 악몽을 그려낸다. 온갖 종류의 마약을 가방에 싣고 다니며 영화 내내 약에 절어서 휘청거리고 있는 이 두 인물은 격렬했던 한 시대가 끝난 다음에 겪어야 하는 진한 현기증이 섞인 보편적 후유증을 영화 속에서 그대로 구현한다. 환락과 아메리칸 드림의 도시 라스베가스는 먼지와 네온으로 뒤덮여있다. 그들은 미친듯이 돈을 쓰고 쉴새없이 약을 빨아들이며 계속해서 비틀거리고 가리지 않고 구토를 한다. 싸이키델릭락이 뒤틀리고 변조되서 울려퍼지는 가운데 기이한 광기에 사로잡힌 두 인물은 독백과 역할극과 환상을 통해 공포와 혐오가 어우러진 총체적인 혼돈의 풍경들을 구축해낸다.

그들은 사실 갈 곳도 없고, 쉴 곳도 사라진 잃어버린 이들이다. 세상을 바꾸리라는 환상 속에서 어느새 아무 것도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이들의 박탈감에 대한 망각은 오직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약물의 효과에 의해서나 지탱될 따름이다. 울기 보다는 욕하기를 선택한 이들은 그래서 더 처절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