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자끄 아노가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부터 시작되어 9.11 사태를 전후로 최고점에 달한 헐리웃의 전쟁영화 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 분명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부터 <블랙 호크 다운>, <위 워 솔저스>에 이르기까지 헐리웃 영화들은 테마파크적 영화들, 즉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속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실재감을 주게 하는데 유독 신경을 썼다. 그렇게 헐리웃에서 만든 전쟁영화들은 대개 전쟁의 스펙터클에 몰두한 나머지 개인을 객체화한다. 그래서 일련의 테마파크형 전쟁영화들은 인물은 거세되는 가운데 국가주의적, 보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에 반해 유럽의 다국적 자본이 모여 만든 <에너미 엣 더 게이트>는 비록 그 출발지점은 독일군의 공세 속에서 활약했던 소련군의 전설적인 저격수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적 영웅전기의 색채를 띄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결과는 흥미롭게도, 그와 다른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스탈린그라드는 한마디로 지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서부 전선을 어느 정도 평정하는데 성공한 히틀러는 스탈린과의 동맹을 전격적으로 파기한 다음 제 3제국의 명운을 걸고 동부전선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파죽지세로 소련의 심장부인 스탈린그라드에까지 이르렀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전투는 2차 대전에서 가장 격렬했던 공방이자 단일전투로는 사상 최대인 1백 65만 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전투로 역사에 기록된 처절한 시가전이었다. 전투는 결국 혹한과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동안 소련군과 스탈린그라드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겪어야 했던 경험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옥 속에서 으례 나타나는 전설, 영웅의 이야기가 세상에 만들어졌다. 스탈린그라드 곳곳에서 신출귀몰하게 출현하며 독일군을 사냥하는 천재적인 저격수 바실리의 이야기.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그 영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죽이는 전쟁터에서 무능한 수준이었던 바실리가 어떻게 사격을 배우고 살아남아서 결국은 영웅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전설에서 빠져나와 보다 성숙한 개인으로 재탄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 원래 실존했던 바실리라는 인물은 그 성장사나 개인사적 측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전직이 목동이었으며 전쟁통에 극적으로 등장한 정도만이 확인이 가능한데 그 과정에서 그의 출현을 극적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다닐로프였다. 다닐로프는 당시 군사적으로 노골적인 수준차를 보이며 수성에만 힘써야 했던 소련군의 일방적인 희생이 독일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아군의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는 당시 상황을 우려했던 홍보담당이자 정치장교였다. 그가 바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은 천운에 가까운 것으로 바실리의 영웅담은 곧바로 다닐로프의 손에 의해서 확대되고 왜곡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확실히 바실리는 탁월한 저격수이긴 했다. 그러나 다닐로프가 재생지에 박아 넣는 그의 무용담에서처럼 달려가면서 수백 미터 밖의 독일군의 정수리를 정확히 맞출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귀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알게 됐음에도 바실리는 그에 대해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국익이라는, 양적으로 보다 큰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했던 상황. 그래서 영화 말미까지 다닐로프는 바실리를 일종의 인형으로 본다. 그가 보기엔 바실리야말로 자신이 만들어낸 걸작품, 글로써 환상을 먹이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의 이상적 망상이 집약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닐로프가 바실리에게 가지는 감정은 애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불안정한 성질의 것이다. 사실 그는 스스로가 되고픈 ‘육체적으로’ 이상적인 인물상을 바실리에게 투영한 것이었으며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괴감 또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바실리를 움직이려고 든다.
그런 바실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타냐와 샤샤의 역할이다. 황당한 영웅담들과 그의 소총탄에 의해 구멍이 뚫린 사람 수로만 평가되는 바실리는 일종의 뭉개진 캐릭터다. 그래서 그의 감정은 끊임없이 억압받으며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꼭두각시였던 그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자각증상이 오는 순간, 그는 스스로의 의지를 발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바실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다닐로프와의 갈등 또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다닐로프는 타냐가 아니라 바실리에게 집착한다. 혹은 바실리에 대한 소유분의 격차를 느끼고서 타냐에게 집착한다. 그에게 있어 바실리는 끊임없이 소유 대상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바실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타냐를 사랑하고 다닐로프의 명령들을 하나씩 거부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거짓 명성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시작하는 순간에서부터 다닐로프는 그를 그렇게 만든 타냐에 대한 질투에 휩싸이게 된다.
전쟁터에서 바실리와 타냐, 샤샤는 일종의 유사가족 관계를 구성해내게 된다. 그러나 이 가족관계는 문제가 있다. 바로 샤샤가 소련과 독일 사이의 이중첩자라는 점에서, 이 관계가 가지고 있는 불안점이 내재된다. 전쟁터에서의 내통자는 흔한 경우다.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자리를 원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공동체의 신념과 어긋날 때, 그 부분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샤샤는 위태로운 균열 그 자체였으며 동시에 전쟁터가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를 천진한 심성의 한 표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실리의 유사자식적인 위치에서, 아들을 잃은 코그니의 손에 죽음으로써 바실리와 코그니를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놓는, 그래서 극의 처절함을 더해주는 플롯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막바지와 더불어 이야기의 종극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마침내 서로 맞서게 된 저격수 라이벌인 바실리와 코그니 대령은 목숨을 건 결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닐로프는 타냐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인형이라고 여겼던 바실리에 대한 마음을 반전하게 된다. 영화는 다닐로프의 마음이 타냐에게 향한 것인지, 바실리에게 향했던 것인지를 끝까지 모호하게 처리한다. 이것은 영화가 유사 호모섹슈얼리티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기 싫었던 감독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닐로프가 타냐의 자기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바실리에 대한 애증의 교차를 애정 하나로 고착시킨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다닐로프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바실리에게 코그니 대령의 위치를 가르쳐 줌으로써 죽음을 통해 타냐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당대의 헐리웃 전쟁영화들에선 보기 힘들었던 감정의 흐름들과 인간관계의 복잡다단함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국가라는 거대한 주체에 맞선 객체의 당당함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헐리웃 전쟁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바실리, 다닐로프, 타냐, 샤샤는 모두 전쟁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이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억울함이 여기선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보다 큰 공명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폭력의 스펙터클과 스토리적으로 도식화된 자기희생적 감동에 함몰되지 않고 그 부분이었던 객체들의 애정과 갈등, 그리고 그의 봉합을 비록 비극적이지만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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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시간 40분. 진라면 순한맛 40개 짜리의 가치 획득에 성공-_- 친구뇬의 애인의 리포트를 써달라고 해서 써 준 결과물.... 뭐 위의 논지와 본심과 조금씩 다른 거라면, 영화가 중반부는 아주 루즈해져서 레이첼 와이즈의 매끈한 엉덩이가 돋보였던 거적떼기 속 비비적 정사씬(광고문구에서처럼 역시 장 자끄 아노!-_-라고 외칠 정도는 아녔지만 암튼 훌륭)만 빼면 꽤나 지루했다는 점과 모호하다고 써놓긴 했지만 다닐로프와 바실리의 관계는 호모섹슈얼리티가 다분했다는 점 정도. 당시 개봉되던 헐리웃 전쟁영화들과 꽤 분명한 대척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안.
아아, 이걸로 2주 정도는 끼니 해결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