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선 무삭제판으로 처음부터 다시 재발간을 진행중인 [창천항로]가 일본에서 드디어 종결됐다고 합니다. 11년. 정말 긴 시간이었군요.
그림은 왕흔태, 스토리는 이학인씨가 맡아서 만들어졌던 [창천항로]는 우리나라 사람이 스토리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선 1994년부터 고단샤 모닝지에, 우리나라에선 1995년부터 격주간 투엔티 세븐에서 연재가 됐고 그 중간에 이학인씨는 우리나라 작가 조원행씨와 함께 [봉황의 성골]을 투엔티 세븐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품은 반응이 썩 좋은 편은 아녔죠. 이후 투엔티 세븐이 휴간되면서 [창천항로]는 단행본으로만 나왔습니다. 그게 한 28권 즈음까지 나왔는데, 이건 업계의 풍문이지만 그즈음에 작가쪽에서 그제껏 번역본에 칠해져있던 것들 지우고 삭제한 거 살려서 제대로 된 판본으로 다시금 책을 내달라고 했다더군요. 작금의 재출간은 그렇게 해서 이뤄졌다는 소문.
[창천항로]를 보면 [삼국지]에 관한 모든 해석이 시시해 보여집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나오기 전에서부터 현재까지도 여전히 통용되는 얘기입니다. 가히 파격이란 수사가 전혀 아깝지 않은 이 만화는 법가의 괴물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람들이 [삼국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관을 산산이 부숴버립니다. 물론 조조를 중심으로 다룬 [삼국지]는 많습니다. 그러나 [창천항로]에서 보여줬던 조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창천항로]는 만화라는 틀을 사용함에 있어서 역사적 리얼리티를 적절하게, 작가 자신의 파격의 가치관에 맞춰서 수용하면서 [삼국지]에 대한 완전한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창천항로]는 법가적 세계관에 대한 예찬과 영웅들, 특히 조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못해 철철 넘쳐 흐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체주의적인 애착에 휩싸여 있고 지극히 마초적이며 요란하면서도 힘있는 전개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재밌습니다. 그것이 권력을 향한 말초적인 재미를 자극한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이 허풍당당한 만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면서 독자를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동탁을 가리킴에 있어서조차도, 거듭 강조되는 그에게 붙여진 마왕이라는 별명은 [창천항로]에선 되려 찬사입니다. 피와 철의 시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왕권이라는 그릇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원소는 꿈속에서 자멸하게 되고 도가의 귀신인 제갈량은 조조에게 한 대 얻어맞고 흙탕물 가득한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오직 조조만이, 그리고 조조와 동일어인 [창천항로]는 그렇게 저 같은 사람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동안 저멀리 달려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천항로]도 위기가 있었죠. 이학인씨가 1998년에 간장암으로 돌아가셨을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비록 이학인씨가 생전에 미리 써둔 원안을 바탕으로 연재가 재개됐지만 이후 [창천항로]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힘이 쭉 빠지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갈팡질팡 헤매는 듯한 인상을 팍팍 줬었죠. 스토리작가의 역량과 비중이 어느 정도의 무게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한참동안 헤매던 이 작품도 십여 년을 넘게 연재를 지속한 왕흔태씨의 내공 덕인지 결국은 정상궤도를 찾더군요. 대표적으로 연의에선 [삼국지] 최대의 이벤트라고 불리우고 우리나라에선 판소리까지 만들어진 바로 그 적벽대전을 고증에 입각해서 달랑 한 권으로 끝내버린 것은 확실히 왕흔태라는 작가의 의지의 발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에 매끄럽게 이어지는 조조의 마초 공략전은 간만에 [창천항로]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일본쪽 정보들에 따르면 35권이나 36권쯤이 마지막 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이제 25권. 아직 즐거움이 제법 남았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