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액션이란 무엇일까요? 홍콩의 와이어 액션이나 각이 딱딱 맞는 90년대 중반까지의 헐리웃 액션과 차별되는 우리나라 액션 디자인의 특징은 막무가내 엉겨붙기형 리얼 액션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에 맞춰서 움직이는 게 아닌, 정말로 현장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걸 찍어낸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와이어도 도입됐고 롱테이크형 액션도 도입된지 오래긴 하지만 그, 강박 있잖습니까. '한국적'이라는 강박. 그런 강박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건 역시나 [초록물고기]에서 송강호가 보여줬던 그런 엉성하면서도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느낌의 소박한 생활형 난투극입니다. 이것을 특징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싸움에 비효율적인 이들이 효율적 끝장을 추구하는 '한국적 잔혹함'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물론 효율적인 싸움이란 '아예 처음부터 안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엉겨붙는 쌈질에선 스트레이트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유도나 음양술로 훈련된 조이기의 대가가 아니라면 그 상황에서 다리를 쓰는 건 에로영화 연출의 모범답안만 보여줄 것입니다. 온몸이 근육으로 채워진 스프링 주먹의 달인이 아닌 한엔 어퍼컷도 힘든 얘깁니다. 여기서 룰을 지배하는 것은 곡선의 법칙, 즉 머리를 이용해 박치기를 가하거나 어설프게나마 훅으로 우회하여 상대방 옆구리를 찍는 것이 효과적이지요. 진창을 뒹굴면서 벌어지는 일견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은 허공을 휘둘러지는 반쯤은 몸부림에 가깝고 반쯤은 훅에 가까운 이러한 주먹질은 영화 속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익숙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진짜' 싸움이란 대개 그렇게 이뤄지기 마련인 법이죠.

 

[구타유발자들]을 두고 무슨 생뚱맞게 액션 얘기냐 하겠지만 이게 꽤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원신연 감독이 전직 무술감독이기 때문입니다. 단숨에 말하자면 [구타유발자들]은 저 '한국적 액션'이 불러 일으키는 가혹한 인상들을 통째로 구워낸 듯한 두시간 짜리 능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임권택의 영화들이나 [살인의 추억] 같은 것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아주 찐하게 한국적 정서라고나 할까요. 경운기가 오가고 오래된 나이트클럽 벽지가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교외 시골이라는 공간성, 앞서 얘기한 한국적 액션이 전해주는 엉겨붙고 우회하며 진부하지만 확실하게 결과를 추구하려 하는 우직한 잔혹함, 그리고 삼겹살구이가 만들어내는 비뚤어진 공동체 의식 등등의 아우라가 지향하는 바는 명백한 지역성입니다. 또한 '한국적'이란 분류에서 거론될 그 어떤 선례들보다 신경질적이고 폭력에 대한 심적 집중이 돋보이면서도 영화는 그 안에 구수한 정서가 곁들여진 해학을 담아냅니다(무의식적으로라도 이 영화를 마당극이라고 칭한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정확했습니다). 진창에서의 아귀다툼에서 저 빙 돌아가지만 성공률 높게 꽂힐 수밖에 없는 훅이 무겁게, 그리고 차근차근 상대의 체력을 빼는 것처럼 [구타유발자들]은 밀집된 정서와 태도들의 짧은 충돌을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론 순간이 아닌 긴 흐름을 지향합니다. 그러니 이 두시간 동안의 악몽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잠재된, 혹은 이미 결정된 확신범이라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깔끔했고, 소문처럼 잔인하진 않았습니다. 되려 영화는 바로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 속에서도 폭력의 순간들을 습관적으로 억제하고 유예합니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말처럼(혹은 카피처럼) 정말로 잔인한 건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응어리 진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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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벽이 벽이 아니다.... 내 눈에 비치는 세계란 어디까지 보장 가능한 것인가.

[팬텀 오브 인페르노]로 데뷔하여 열광적인 골수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제작사 니트로플러스에서 만든 2003년작. 48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앨범으로 치면 미니앨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짧은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트로플러스의 게임들은 뭐랄까, 마이너한 감수성의 결정체라고나 할까요. 다분히 밀리터리매니아를 광분시킨 게임이었던 [팬텀 오브 인페르노]나 크툴루 신화를 기반으로 한 [데몬베인]도 그렇고, 그들의 작품군에선 꾸준하게 스탠다드한 노선을 거부하는 그런 인상이 있습니다. 물론 [사야의 노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 후미노리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기 직전까지 가게되지만, 현대의학의 쾌거로 인해 겨우겨우 살긴 삽니다. 다만 그 사고로 인해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 그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즉 그의 눈에 비치는 세계, 그리고 보통 인간들이란 피와 붉은 살덩어리, 체액으로 가득한 괴물들의 세상이 된 것이지요. 거리의 벽과 건물에서부터 친한 친구들까지 예외없이 그렇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그는 지옥 한가운데에서 사는 것과 다름 없게 됩니다. 눈만 뜨면 나날이 미쳐버릴 것 같은 세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는 그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통 사람(보단 미소녀)처럼 비춰지는 사야를 만나게 됩니다.

무릇 섹스와 고어는 표현에 있어서의 양대 금기로써 전통적으로 치명적인 유혹의 대상이었습니다. 18금 에로 게임이라고 하는 장르는 그 두가지를 활용하는데 있어서 타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극히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일단 에로 게임이라는 위치가 담보하는 표현의 자유로움도 그렇거니와 그 소비층 자체가 마이너하면서도 결집력 있는 집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증명하듯 에로게임의 생산자들은 소비자로서의 경험 또한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더불어 그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이 장르가 '아는 사람만 알고 하는 사람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로게임 제작의 영세한 특성상 시스템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긴 힘듭니다. 게임의 어떤 장르보다도 다양성과 순수한 게임성이란 측면에서 부실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바로 에로 게임이지요. 따라서 이 장르에서 중시되는 요소 중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스토리, 설정의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에로게임이란 장르에서의 스토리의 힘이란 거의 원시적인 위력을 가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형적인 벗기기 게임, 포르노그래피티의 단순차용 또한 넘쳐날 정도로 존재합니다만 소위 비주얼노블이라는 하위장르의 탄생과 더불어 스토리의 특화성 또한 심화된 것이 사실입니다(이 얘긴 차후에 따로 다뤄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야의 노래]는 바로 그 고어와 에로라는 두 영역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비주얼노블입니다. 플레이 시간이 아무리 길어야 세시간 남짓한 짧은 단편소설이랄 수 있는 이 게임은 실로 에로게임이라는 지형에서만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온통 끈적한 피와 살덩어리로 채워진 세계, 식인행위, 러브크래프트적인 괴물, 피폐해지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표현과 미소녀라는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고, 또 그것이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을 가진 장르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러브스토리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의 노래]의 이야기는 훌륭합니다. 마치 꿈을 꾸듯 흘러가되 그것이 편안한 악몽 속과 같은 느낌입니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보여지는 너절하고 추잡하며 폭력적인 광경들과 미소녀 캐릭터라는 거친 조합은 그 자체로서 잔인한 매혹의 은유와도 같습니다. 결국 그것들은 우리가 눈을 돌려왔던 것이기에, 이 이야기의 병적인 인상은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그림과 더불어 표현된 죄인 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저로 하여금 정말 이 게임을 불쾌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은 표현의 폭력성보다는 그 조합 자체가 던져주는 까끌까끌한 자극입니다. 여기서 불쾌함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자극적인 시선 속에서 혐오와 매혹을 저 자신이 동시에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러니 굳이 오글리쉬에 들어가서 뇌내에 시각인지형 마조히즘 호르몬을 생성해낼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쪽 계열의 감수성에 면역이 된 사람에게나 마땅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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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은 뭐, 세기말이긴 했지만 정말 세상에 망조가 들어서 모든 것이 다 몰락하고 있다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그 세기말, 종말의 분위기가 문화적으로 너무 남발이 되선지, 혹은 이미 사람들이 세상에 지칠대로 지쳐서 될대로 되라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세기말의 우울이란 코드는 이미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거의 정리가 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사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에겐 호황기나 불황기나 그게 그거인 법. IMF 직후인 전국민적인 침체의 시기에 말세를 꿈꾸는 건 너무 풍요로운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요점은 그 시기에 암울 및 우울이란 코드를 쓴다는 건 거의 B급 정서에나 먹힐만 한 일이었다는 거죠. 그런 세상에 시대를 착각하고 안이한 판촉전략을 세운 탓인지, 정말 일반적인 정서와는 괴리되는 암울한 스타일의 게임이 한 편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슈팅게임의 명가 사이쿄에서 제작한 두번째이자 최후의 대전격투게임이었던 [타락천사]였습니다.

 



2000년 2월 지진의 충격을 받은 '도시'는 컴퓨터 관리 시스템의 고장과 동시에 균열로 인해 대륙으로 떨어져 나가 하나의 섬이 됨으로써 질서가 없는 혼돈의 세계가 됩니다. 범죄가 지배하는 곳이 된 부패한 도시는 사람들에게 '에덴'이라고 불리게 되고, 이 이야기는 십년 후, 2010년의 망가진 '에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보기만 해도 둔탁한 인상이 드는 스토리입니다만 게임을 더욱 암울한 이미지로 만드는 것은 무라타 렌지의 캐릭터 디자인입니다. 독특한 음울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스타일을 기억해보자면 예상이 가는 바이긴 합니다만 이 게임에서 그는 자신의 그 어두운 면모를 극대화하기로 작정한 듯, 어딘가 망가진 캐릭터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에 담아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래곤 헤드]를 연상케 만드는 소년이라든지 [프랑켄슈타인]형 괴물의 마이너 체인지판인 모양새의 녹색 거한, 파리를 달고 다니는 극진공수도 무도가와 미치광이 총잡이 등등, 무라타 렌지의 어두운 색감을 그대로 화면에 박아넣은 탓에, 게임의 그래픽 또한 내내 칙칙하고 하수구 구녕에서 건져올린 듯 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차가운 색기가 감도는 로리 스타일의 예쁘장한 캐릭터는 끼어들 틈이 없는 방향인 거죠. 물론 인사치레처럼 미소년 미소녀 쌍둥이 커플이 한쌍 있긴 합니다만 존재감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다 트랜스 커플이란 점에서 역시나 이 게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디자인에 충실하게도 게임 본편 또한 어딘지 괴상했습니다. 그래픽만 보자면 현재에 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퀄리티이고 줌 인 아웃 시스템을 활용하여 큼지막한 캐릭터들이 화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것은 분명히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일단 캐릭터를 활용하는 인상이 밋밋하다고나 할까요. 어두운 톤의 그래픽에 맞춰서 보여지는 기술이나 동작, 스타일, 심지어 초필살기까지 화려하기는 커녕 밍숭맹숭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니, 아예 게임의 전체적 디자인마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이 그런 밋밋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연속기가 아니라 묵직한 한 방을 노려야 하는 단타형 대전 격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대전 격투 게임의 흐름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였던 것으로 [스트리트 파이터3] 류와 일맥상통하는 바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마이너한 대전격투게임의 전반적 특징은 연속기 배제, 단타 지향으로 결정지어지는군요. 반대로 손이 느린 저로선 무척이나 좋아하는 요소들입니다만.

 



아무튼 시대를 따르면서도 시대를 거스르려 했던 이 애매한 게임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조차 제대로 확인 받지 못하고 사이쿄로서는 대전격투게임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는 경영방침을 정립하도록 한 후 어떤 콘솔로도 이식조차 되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로 끝날 뻔 했지만. 마메쪽 개발자들이 롬을 추출하여 웹에 퍼뜨리는 덕에, 중증 마이너 대전 격투 게임 중에선 꽤 인지도가 있는 쪽에 속합니다. 나중에 SNK가 KOF99의 신캐릭터들, K'와 맥시마의 캐릭터 디자인 및 추가된 신기술 디자인 다수를 여기서 베껴온 것으로도 이름을 탔었죠. 전 처음 보자마자 삘링이 왔었는데 [타락천사] 자체가 워낙 마이너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이슈가 되더군요.

 



저로선 삘링이 단박에 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바다이야기지만 예전엔 동네 양아치들의 건전한 사교의 장이었던 고전주의 지향의 오락실에 바로 이 게임이, 웬일인지 2개월 가까이 설치되 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인기도 좋아서 플레이하던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판시장에서도 꽤 레어품으로 취급 받고 있는 것이 [타락천사]입니다만, 아무튼지간에 저도 그 시기에 원없이 보고 가끔씩 즐길 수 있었습니다.

 



마메 게임들 중에서도 꽤 고사양을 요구하던 놈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즐길 기회가 없었지만, 요즘은 잘 돌아가더군요. 역시 돈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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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보면 배우로서의 조니뎁에게서 정말로 강렬하게 매력을 느꼈던 것은 [라스베가스에서의 공포와 혐오]와 [캐리비안의 해적] 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전에는 감수성의 이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무언가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그가 고르는 출연영화들의 근저에 흐르는 묘한 취향을 빼놓는다면 왜 캐스팅되는 건지도 납득이 잘 안 갔고. 얼굴은 중년이 되니까 멋있어졌지 그 전에는 그리 감흥이 없었고.... 그렇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어떻게 봤느냐 하면.

보다가 잤다. 암튼 조니뎁 없었으면 망했을 영화.

오션스 시리즈보단 조금 낫더라.

 

일전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 이 작가가 [크로노스 헤이즈]를 때려치게 만든 요인이 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발현인 로리형 흡혈귀물. 모든 요소들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점에서, 창작력의 부족과 작가의 노골적인 취향에의 집착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저 표지의 금욕적인 포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상은 했지만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시원시원한 맛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양의 노래] 만치로 텁텁하면서도 고아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렬한 한 방이 아쉬운 좀 부족한 느낌.

일과 목적, 노력과 인정받음에 대한 이야기. 1권에 비해서보다도 안노 모요코 특유의 유머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만큼 시리어스해진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상당히 능숙하며 그를 통해 보다 어른스러워진 삶의 풍경들을 잡아내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다시 읽으니 이 작가가 이 소설을 쉽게 써냈다고 한 말이 늦게서야 이해가 갔다. 물론 그 '쉽다' 라는 표현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범인들에겐 여전한 좌절감을 안겨주지만.

현대물에는 일정한, 혹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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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8-1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캐리비안' 이외에서의 그의 매력이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최근작들 中 '해적2'는 전작보다 유치해진 모습, '네버랜드를 찾아봐'는 보던 도중에 꺼버렸고 '초콜렛'은 받아놓고 감히 보지 못하며 '그의 초콜렛 공장'또한 접근하기 힘드니 그는 애매한 애증의 느낌만 남는 녀석?이신게 분명하다는 ㅋ

hallonin 2006-08-2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보다 유치하다면 그래도 졸리운 건 덜할지도 모르겠군요..
 



이제는 시사회 전용 극장이 되버린 드림시네마에 가서 보고 왔습니다.

원래 마이클 만이 이 프로젝트를 만든다고 할 때부터 그리 애정이 가지 않았던데다 공개 후 쏟아지는 악평들의 홍수 덕에 더욱 기대치를 낮춘 채로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도 재미가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정작 영화는 그리 재미없게 본 것만은 아니게 된, 그런 경험을 또 하고 말았습니다(물론 그런 삘링의 이유엔 소요비용이 1800원이었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경제상황도 포함됩니다).

친구중 한 명이 마이클 만의 영화는 마치 사막 같은 느낌이 난다고 표현했는데, 그 말대로 [마이애미 바이스], 일단 무지막지하게 삭막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삭막함은 좀 더 강렬해서 우리의 주인공들이 인간마초가 아니라 인형마초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저는 그 유난스레 돋보이는 삭막함의 원인이 전작들에서 버디물적인 관계들을 통해 보여줬던 최소한의 감정선마저 이 영화에선 증발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이클 만의 영화를 얘기할 때면 사람들이 마초마초 노래를 부르면서 그 엄하고 절도 있으며 살벌삭막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감각을 더욱 부채질하고 마침내 비극적인 감정마저 불러 일으키는 요소는 그의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실은 서로 통하고 있는 상태, 미묘한 교류를 나누는 풍부한 정서로 충만한 사이라는 것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저 흑백형사는 영화 시작 전에 대판 싸우기라도 했는지 별로 교감 같은 거엔 서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뭐 이것저것 이유를 댈 수 있겠습니다만 마이클 만적으로 생각을 하자면 저 둘은 일단 적이 아니라 동지니까요. 전통적으로 그의 영화에선 적들끼리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곤 했습니다. 덕분에 제이미 폭스와 콜린 파렐의 관계는 서류상 용병 파트너쉽 이상이 아닌 인상을 줄 정도입니다.

정작 [마이애미 바이스]는 저 투톱을 내버려두고 마이클 만의 영화에선 드물게도 콜린파렐과 공리라는 남녀 관계에게 그 교류의 축이자 영화의 핵을 담당하게 하고 있습니다. 적과 동업자, 속고 속이며 먹든지 먹히든지의 관계. 동시에 사랑하는 관계. 미묘합니다. 전작들에서의 그 흐름의 풀빵 버전입니다. 적어도 얘기만 들어선 그렇군요. 그러나 마이클 만의 영화가 전통적으로 여자들이 들러리였다는 걸 기억해보자면 이 영화에서도 그 부분에 관해선 딱히 기대할 건 없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감정선은 내내 표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다보니 그의 전작들에서 제기되던 풍부한 긴장감과 비극성, 느와르 알레고리의 하드보일드한 정서가 잘 느껴지질 않고.... 차라리 그렇다면 철저하게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이 더 나았을 것 같은데, 분명히 영화 자체는 영화라는 자각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어중간한 기분이 들더군요.

전체적으론 영화가 되다 말다 되다 말다 하는 기조를 꾸준히 유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히트]나 [콜래트럴]에서 보여줬던 흐름의 유기성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자잘하게 들끓고 있는 인상이라고나 할까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마이클 만 영화의 마초 정서를 뒷받침할 기반, 즉 삭막한 정서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 특유의 진한 감수성이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이클 만의 광팬들마저도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지 곤란할 듯 싶습니다.

도시풍경의 대가답게 디지털로 잡아낸 마이애미의 풍광은 그의 전작들 만큼이나 확실하게 멋집니다. 그럼에도 남는 의문은 "도대체 제작비 1억 달러는 어따 갖다 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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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8-13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세는 악평이었나요? 제가 간혹 본 평들은 '역시 마이클 만'이던데요. 최소한의 감정선마저 사라진 마초 영화라니. 뭐 나름 궁금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콜래트럴>이 꽤 맘에 들었습니다.

hallonin 2006-08-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건너에선 영 시큰둥한데 우리나라 비평쪽은 대체로 후한 편이더군요. 역시 마이클 만이긴 한데 훨씬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마이클 만의 신도들이 대부분은 수도자와도 같은 자세로 그의 영화에 임한다는 걸 생각하자면 이 영화 또한 마이클 만의 컬트작 목록에 올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배가본드 2006-08-2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형사콤비의 진한 우정보다는 확실히 콜린파렐과 공리 제이미폭스와 그의 애인 나오미 헤리스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진것으로 보이더군요. 확실히 영상미는 넘쳐났지만 후반에는 지루했던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