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고릴라 아이세움 지식그림책 13
조은수 글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4년 10월
품절


이 책은 참으로 독특하다.
다른 책의 소개글을 통해 보게 되었는데 읽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마음이 짠한 기분이 들었고, 서평을 남기는데 시간이 걸렸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그냥 고릴라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고릴라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런데 그냥 고릴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기의 고릴라를 다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지식그림책이라는 문패를 달았으니 당연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주 목적이겠으나 이 책은 정보전달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마음을 울린달까.

방금 태어나 엄마 배 위에 가만히 있는 아기 고릴라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를 듣는 걸까?
엄마의 미소와 아기 고릴라의 모습을 보니 아이를 출산했을 때가 떠오른다.

고릴라는 아프리카의 울창한 숲에서 산다. 하루 종일 누워서 뒹굴거나 엉겨 붙어 놀거나 우적우적 먹는다. 남을 괴롭히는 일도 없고, 누굴 잡아 먹지도 않는다.
고릴라는 풀과 과일을 좋아하며 썩은 나무도 잘 먹고, 자기가 싼 똥을 먹기도 한단다.
똥에 남은 영양분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무타기를 하는 고릴라의 모습이 귀엽다. 아기 고릴라가 벌써 이렇게 자랐나보다.
고릴라는 행복을 느낄때면 노래를 부른다.

고릴라는 하루 종일 논다. 쪼르르 나무에 오르고, 와락 밀치고, 떼구르르 구리고, 술래잡기 등 목록이 끝이 없다. 어른 고릴라들은 쉬지 않고 우적우적 먹는데 하루에 먹는 양은 20킬로그램이 넘는다. 배불리 먹었으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린다.

쏴아쏴아 콰아콰아...
비가 내리면 고릴라는 가만히 앉아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엄마와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이 정겹다.

고릴라는 원숭이 무리 가운데 가장 끈끈한 가족을 이루고 산다.
모두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우두머리는 나이 든 수컷 고릴라이다.
수컷 고릴라는 12살 정도가 되면 등에 은백색 털이 난다. 그래서 은빛등이라 부르는데 은빛등은 힘은 세지만 부드럽다. 이동할 때에 무리 가운데서 가장 느리고 허약한 가족의 발걸음에 맞춰 주고, 어린것들의 장난도 참을 성 있게 잘 받아 준다.

고릴라 부모는 상냥하다. 엄마는 늘 아기를 업고 다니고, 은빛등 고릴라도 아주 부드럽게 아기 고릴라를 대한다.
누군가 귀찮게 굴면 싸우는 대신 벌떡 일어서서 "후후!" 소리치며 주먹으로 쿵쾅쿵쾅 가슴을 치며 상대방을 겁먹게 한다. 고릴라가 풀을 뽑거나 나뭇잎을 휙휙 내던지면 조심해야 한다.

우와 우와 무슨 일이지? 어른들이 온통 성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웬지 불길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나야, 아기 고릴라.
거꾸로 매달려 가는 아기 고릴라.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프리카에선 고릴라 고기를 먹기도 하고, 고릴라 손을 부적으로 쓰기도 한단다.
돈벌이 수단으로 밀렵꾼들은 고릴라를 몰래 잡아 판다.
어린 고릴라 한 마리를 얻기 위해선 다른 고릴라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왜냐하면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어미들은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 때문이다.

아~~~~~~~~~~~ 슬퍼라

온통 캄캄해.
여기가 무서워.
날 좀 내보내 줘요. 제발.......

잡힌 아기 고릴라는 배를 타고 유럽이나 미국 같은 곳의 동물원에 팔려간다.
그런데 여행 도중 죽는 경우가 많다.
잡힐 때 겪었던 충격과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크기기 때문에 모든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살아남아 동물원에 도착한 고릴라는 누구와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고 점점 더 우울해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많다고 한다.

어두침침한 색조가 말해주듯 고릴라의 모습이 너무도 슬퍼보인다.
고릴라는 가족을 이루고 사는 동물인데 어렸을 때 잡혀 온 동물원의 고릴라는 가족간의 접촉이 끊어지게 되어 다른 고릴라와 같이 살게 돼도 서로 만지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놀이를 통해 어린 고릴라는 자신의 팔다리와 근육을 시험하고, 어떤 먹이가 좋은지 등등을 배우게 되는데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저 우두커니 있는 고랄라가 되고 만다.

하루 종일 동물원에 우두커니 앉아 엄마 배 위에서 듣던 심장 고동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고릴라를 생각하니 울컥한다.

내 고향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풀 내음 가득한 숲이었는데.....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고릴라의 죽음은 아프리카의 비극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고릴라의 고향 땅 아프리카는 유럽 여러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겨 온갖 괴로움을 당하다가, 식민지에서 독립한 뒤에는 나라 안의 전쟁으로 고통을 겪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규모로 소를 기르기 위해 고릴라가 사는 숲을 베어내고 있으며, 돈이 아쉬워서 밀렵을 서슴치 않는다. 사람들조차 밥을 굶고 사는 마당에 고릴라의 목숨을 운운하는 건 사치스런 일처럼 들린다.
이제 아프리카에 고릴라는 몇 백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그림책치곤 내용이 너무도 절절해서 읽는 동안 문득 문득 가슴이 에렸다. 아이와 동물원에 가는 것을 즐기는 나는 생기없이 그저 축 늘어져 있는 동물들을 보며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 사정을 외면하고 싶었다. 동물원이 없다면 살아생전 코끼리나 원숭이를 직접 볼 기회가 있겠는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다시 동물원을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은 욕구는 동물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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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요, 달님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44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외 지음, 이연선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6월
구판절판


세살배기 내 아이는 올빼미형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블록쌓기, 퍼즐, 스티커놀이, 종이 인형놀이, 전화놀이, 찢기 놀이....
아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놀이를 찾아낸다.
아이와 달리 아침형 인간인 나는 늦은 밤이 고역이다.
열두 시가 다가오면 아이에게 이제 불을 끌테니 작은 불을 켜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아쉬운 표정을 짓거나 내 말을 못들은 척 하며 놀이를 계속한다.
그럴때면 어쩔 수 없이 엄포를 놓는다. 그럼 오늘은 "책 안읽어 줄거야".
아이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불로 달려간다.

<잘자요, 달님>을 처음 본 바로 그 순간 반하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책이 있을까.
작은 크기에 초록과 대비되는 선명한 주황색, 반복되는 ’잘자요’라는 말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다.
’아! 아이도 틀림없이 좋아할꺼야’. 아이는 내 예상처럼 몇 번이고 읽어달라고 했고, 그림을 보며 너무도 좋아했다.
그림책의 묘미중의 하나인 숨은 그림찾기가 이 책에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표지를 넘기면 노란 면지가 산뜻하면서도 따뜻하게 다가오고 속표지를 넘기면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 속에나 나올만한 커다란 초록방. 그 안에 아기 토끼가 바닥과 같은 색인 주황 침대에 초록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밖엔 별들이 가득한 걸로 보아 시간은 저녁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가만히 보면 두 개의 시계가 7시를 가리키고 있다.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의 장작불을 보니 겨울인 듯 싶다. 귀를 기울이면 ’파닥파닥’ 하는 소리가 날 것도 같다.
겨울이라서 7시인데도 밖이 깜깜한가 보다. 추운 밖의 날에 비해 너무도 아늑해 보이는 방이다.
벽난로 옆에는 장작이 놓여있고, 가만히 보면 회색의 생쥐가 보인다.
이 생쥐가 앞으로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찾아보자.
벽에는 그림이 있고, 빨간 풍선이 둥둥 떠있다. 협탁 위에는 전화기와 책, 시계가 놓여 있다.
책 제목이 <굿나잍 문>이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다.
그림 속에서는 암소가 달을 뛰어 넘고, 의자에 앉아 있는 곰 세마리.

그림책 속에 또 다른 그림이 있는 것도 재미난다. 자세히 보면 세마리 곰이 있는 그림 속에 달을 뛰어넘는 암소의 그림이 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림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 여러가지 것들을 숨겨 놓고 한 번 찾아보라고 하는 것 같다. 아마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림책의 깊이가 달라지지 않을까.

앞의 그림이 선명한 색상이었던 반면에 회색톤은 밤과 닮아 있고,
왠지 차분한 분위기가 난다.
이 책은 이렇게 컬러면과 흑백면이 서로 교대로 반복되고 있다.


벽난로를 중심으로 시선은 왼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보이고 빨래대위에는 양말과 장갑이 널어져 있다.
오늘 낮에 추운 밖에서 즐겁게 뛰어 놀았겠지.
노란 흔들의자엔 누가 금방까지 있었던 걸까?
초록색 뜨개질 거리가 놓여 있다.


시계를 보니 그동안 10분이 흐른 것을 볼 수 있다.
컬러면의 시ㄱ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보이고,
뜨개질의 주인공인 토끼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쉿"하고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다.
누구에게?

잘 자요. 초록방

초록방 전경이 모두 드러난 그림이다.
내용을 보니 할머니는 아기토끼에게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라고 했나 보다.
할머니 위쪽 벽엔 낚시질 하는 토끼 그림이 보이고 창문엔 달님이 떠오르고 있다.
달님이 떠오르면서 창문 밖의 색상이 변해가는 것과 스탠드의 불빛이 반사되는 모습도 주목해보자.

잘 자요, 달님
잘 자요, 달을 뛰어넘는 암소

사실 이 책에서 맘에 썩 들었던 점 중의 하나가 달을 뛰어넘는 암소이다.
왠지 무슨 뜻이 숨어있을 것만 같다. '암소가 달을 뛰어 넘고 개가 사람처럼 웃는다'라는 <헤이 디들 디들>이란 노래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서 따왔을까?

잘 자요, 스탠드
잘 자요, 빨간 풍선
잘 자요, 작은 곰들
잘 자요, 의자들

우리 아이가 아기 토끼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곰 그림을 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제서야 아기 토끼가 잠자리에 들기전에 방안의 물건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방안이 어두워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자요, 아기 고양이들
잘 자요, 벙어리 장갑

잘 자요, 작은 집
잘 자요, 생쥐

잘 자요, 아무나
잘 자요, 옥수수죽

잘 자요, 별님들
잘 자요, 먼지

아기토끼의 인사는 계속된다.


잘 자요, 시계
잘 자요, 양말

아마도 시계는 잠들지 못할 것 같다. ^^
쥐는 어디에 있을까. 책장 위에 있다. 내 아이는 쥐를 찾아다니며 매우 즐거워했다.
무릎을 안고 있는 아기 토끼의 모습이 자기 싫은 것도 같다.
유난히 방이 넓어 보이고 할머니와 손자의 거리도 멀어만 보인다.

잘 자요, 빗
잘 자요, 솔

"쉿"하고 속삭이는 할머니도 잘 자요

잘 자요, 소리들

고양이들도, 아기토끼도 잠이 들었다.
방 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창문 밖은 점점 밝아지고 있다.
시간을 보니 8시 10분이다.
역시 시계는 잠들지 못했나 보다^^
활활 타고 있는 벽난도와 장난감 집의 불빛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데 생쥐는 어디 있지? 잠들었나?
아니다. 창턱에 올라 창밖의 달님을 바라보는 듯 하다.


우리 아이와 여러번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한구절 읽고 나면 아이가 다음 구절을 뱉는다.
우리는 정답게 주고 받는다. 아이가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문장때문에
저절로 외워지는 것 같다.

책을 덮고나서 불을 끄고 오늘 아이가 접했던 것들에게 나도 인사를 해준다.
잘 자요, 그네
잘 자요, 도서관
잘 자요, 쿠키
잘 자요, 빠방
.........

그러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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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
헤더 구덴커프 지음, 김진영 옮김 / 북캐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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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고 장면 장면이 각 인물을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치밀한 구성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쩌면 내가 가해자나 피해자일 수도 있는 가정폭력과 아동 성폭력을 다뤄 여러가지 기억들과 사회 전반을 떠들썩 거리게 했던 뉴스들이 머리 속을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엔 두 아이가 있다. 칼리와 페트라. 7살인 이 두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숲으로 사라진다. 칼리는 선택적 함묵증으로 3년 동안 말을 하지 않는 아이이고, 페트라는 영민한 아이였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야기는 칼리와 칼리의 오빠 벤과 엄마 안토니아, 그리고 페트라의 아빠 마틴, 부보안관 루이스의 시선으로 다뤄기고 있다, 페트라의 부분은 앞에 한 부분을 제외하곤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내내 페트라가 너무도 궁금했다. 왜냐하면 칼리는 가정폭력의 희생자로 나오니 페트라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제법 분량이 많은 이 책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 너무도 결말이 궁금하고, 페트라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결말 부분을 몇 번이고 펼쳤다가 덮었다 하다가 페트라가 발견이 되는 부분부터는 범인이 누구인지 나름대로 추리해보곤 하였다. 그 결과 어렵지 않게 범인을 찾아 낼 수 있었다. 바로 럭키라고 불리우는 청년. 그 청년이 왜 페트라에게 그랬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청년이 이야기의 중간에 굳이 나와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언급된 점이 마음에 걸렸었다. 

우리들은 사회적으로 보도되는 끔찍한 뉴스들을 접할 때면 가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기에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 사회적 행동을 보면서 뭔가 피지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가해자를 동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도 옹호하지 않는다. 가정폭력의 가해자 그리프와 성폭력의 가해자 럭키의 입장은 조금도 나와있지 않고, 그것을 겪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작가가 오랜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이어선지 각 인물들을 일인칭의 관점에서 쓰고 있지만 칼리의 경우는 선택적 함묵증을 지녀서 3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정말 쉬지 않고 빠르게 전개되는 구성을 통해서 독자 역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으며, 각 인물들에게 감정이 쉽게 이입되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책장을 덮은 다음에는 주인공들처럼 나도 극도의 피곤함이 덮쳤다. 소녀들의 엄마와 아버지가 된 것 같고 아이들이 제발 무사히 돌아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곤 하였다. 다행이 작가는 커다란 상처로 남을 이야기마저 따뜻하게 결말을 내리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미국의 한 마을이라서 그런지 어떤 면에서는 우리와 정서가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는 어떤 집에 가정폭력이 일어나도 그 가족의 문제로 치부하고 개입하려 들지 않는데 말이다. 칼리와 벤, 그리고 안토니아는 그리프의 알콜중독으로 인해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도 침묵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의 침묵이 사실은 아이들에겐 계속적인 고통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마지막에 그리프가 총에 맞아 죽었을때야 안토니아의 진정한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오히려 그 장면에선 내가 충격을 받았다.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힘이 센 어른으로서 강압적으로 폭력을 쓰지는 않는지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성폭력이란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대책도 사실 세울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안토니아처럼 마틴처럼 나도 내 아이를 사랑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고 결혼을 앞 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것인지 잘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려움이 있어도 결국은 사랑의 힘으로 견딜 수 있고, 상처를 잊어갈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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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꿍 최영대 나의 학급문고 1
채인선 글, 정순희 그림 / 재미마주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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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때 나보다 한 살이 많은 반 친구 은주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친구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였고, 그래서 우리들은 은주를 괴롭혔다. 놀려대기도 하고, 싫어하는데도 우리끼리 역할을 만들어 놓고 그 아이를 강제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 친구가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던 모습이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이 생생하다. 왜 그랬을까. 분명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은 나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통하여 느끼는 희열이 있어서 그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여러 아이들에게 모자란 아이로 놀림을 받았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친구를 괴롭히는 것에 대해 당연시 하였다. 

<내 짝꿍 최영대>도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 즉 '왕따'를 다룬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날마다 가야하는 공간, 많은 시간을 보내야하는 시간으로 집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공간으로 아이들은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은 서술자인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어느 날 헐렁한 옷에 다 헤어진 운동화를 신고, 씻지도 않았는지 냄새가 나는 한 아이가 전학을 온다. 이름은 최영대. 씻지도 않았는지 냄새가 나고 뭐든지 느릿느릿, 항상 조용한 그 아이를 반 아이들은 바보 굼벵이라고 놀린다. 

 

어느 누구도 짝이 되려하지 않아 맨 뒤에 혼자 앉아 있는 영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고 지내 지금은 할 수 있는 말이 몇 안된다고 한다. 

 

반 아이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영대를 괴롭힌다. 화장실이 더러운 것은 영대때문이라며 날마다 화장실 청소를 시키는가 하면 뭔가가 없어서도 영대가 가져간 것이라며 영대의 가방을 헤집어 놓는다. 영대는 반 아이들의 공공의 적이 된다.  

  

한 번은 남자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영대를 때리기도 했다. 이를 말리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피해자 영대 대 가해자 남자아이들의 대립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이를 말리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존재한다.  

 

 

학교를 벗어나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한껏 즐거워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누군가가 방귀를 뀐다. 방귀를 뀐 아이가 엄마 없는 굼벵이 바보 영대라고 지목하고, 지목당한 영대는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누구도 예기치 않았던 영대의 슬프고도 괴로운 울음. 아이들과 선생님은 당황한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듯, 그동안 받은 설음을 토해내듯 영대의 울음은 계속되고, 아이들은 울면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께"하며 사정을 한다. 

 

결국 반 아이들과 선생님까지 모두 울고 만다. 대립각을 세웠던 반 아이들 대 영대의 갈등이 급격하게 해소되는 장면이다. 이 후의 내용은 어쩌면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의 결말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은 이야기도 상당히 흡인력이 있지만 그림이 주는 정서적인 느낌 역시 크다고 본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정감이 잘 살아나는 수묵담채의 그림이 이야기와 잘 어우러진 듯 하다. 갈등의 공간인 학교를 떠나 수학여행지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괜찮은 설정인 것 같다. 

아이들이 우는 대목에서 나도 울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엔 은주에게 대한 미안함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당연하다. 은주에게 직접 사과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은주야, 어디에서 살고 있니?, 정말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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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뤽케 사계절 1318 문고 12
페터 헤르틀링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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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을 하나 고르라면 나는 전쟁을 꼽고 싶다. 전쟁은 수백년 아니 수천년동안 이어온 문명을 삽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기도 하고,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는 여전히 전쟁은 진행형이며, 오히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들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사는 것을 원하지만 전쟁을 일으켜 이익을 보는 소수의 힘있는 자들의 농간에 오늘도 신음하고 있다.

여기 전쟁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기차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열세 살 소년이 있다. 목적지가 이모네 집이었던 소년은 혹시 이모네 집에서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모네 집은 폭격을 맞아 사라졌고, 이모의 생사도 알길이 없다. 밤낮 혼자 폭격속을 떠돌아 다니던 소년은 한쪽 발을 잃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크뤽케(목발)를 만난다. 온전치 않은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터지만 크퀵케는 소년을 받아들인다. 나치주의에 반대하고, 다소 무뚝뚝해 보이기까지한 크뤽케가 소년을 만나고 함께 살면서 따뜻한 본성이 드러나는 과정이 감동적이었다. 죽을 고빌르 수차례 넘기고, 드디어 독일에 정착하게 된 크뤽케와 소년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소년의 마음 속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느날 엄마와 연락이 닿은 크뤽케가 소년과 함께 엄마를 만나게 되고 소년 몰래 사라지는 크뤽케의 모습에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다리를 잃은 크퀵케와 아버지를 잃고 엄마와 헤어진 소년은 전쟁의 희생자이다. 이들은 혈연이 아닌데도 육친의 사랑에 버금가는 우정을 나눴다고 본다. 그 우정을 통해 인간이 서로 나눠야 하는 것은 총부리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일깨운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반도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내게 이 책은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되묻는 것도 같다.

페터 헤르틀링의 작품은 처음 접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관해 평론해 놓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아마 크뤽케가 작가의 분신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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