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rdener (Paperback) - 느리게100권읽기: 2차 대상도서 느리게 읽기 2022년 4학기
사라 스튜어트 지음 / Square Fish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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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에게서 책을 선물 받았다. 아이가 돌지났을 무렵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가 집중하기엔 이야기가 긴 편이다. 편지의 형식을 지닌 책을 읽으면서, 그림을 보면서
꽃 향기가 전해지는 듯, 내 마음에도 꽃이 피어나는 듯 행복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외삼촌네 가게에 루즈벨트의 얼굴이 벽에 붙어 있다.
편지의 날짜를 보니 1935년에서 1936년까지이다. 경제 대공황으로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이다.  백과사전에서 뉴딜정책에 대해 살펴보니 아래와 같이 나와있다.

뉴딜 정책(New Deal)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하고,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33~1936년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정책이다.

1933년의 "첫 번째 뉴딜 정책"은 경제의 전반적인 단기 회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은행개혁법, 긴급 안정책, 
일자리 안정책, 농업 정책, 산업 개혁(NRA, 국가경제회복기구), 연방 차원의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금본위제와 금주법을 폐지했다.

"두 번째 뉴딜 정책"(1935년~1936년)은 노동 조합 지원책, 공공사업진흥국(WPA)의 안정 프로그램, 사회보장법, 소작인과 농업 분야의 이주노동자  를 비롯한 농부들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이들 정책을 위헌으로 판시했다. 그러나 국가경제회복기구(NRA)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유사한 정책들로 교체됐다. 사실상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과 함께 뉴딜 정책은 마감됐다. 1943년 10월 루스벨트가 말한 대로 "뉴딜 선생"(Dr. New Deal)은 "승전 선생"(Dr. Win the War)에게 길을 양보하고 물러났다.

굳이 백과사전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 그림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리디아는 할머니와 농장에서 꽃도 가꾸고 토마토나 배추 등도 키우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빠의 실직으로 리디아는 짐 외삼촌네 집에서 당분간 살게 된다.
황량한 도시에 도착해서 만난 외삼촌은 잘 웃지도 않고 무뚝뚝한 사람이다. 표정이 굳어 있다.

시골에서 할머니가 보내주신 꽃씨를 열심히 심어서 대공황으로 황량한 거리가 꽃으로
한층 밝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비밀 장소를 발견한다. 옥상인데 쓰레기로 가득하다.
그곳에 리디아는 여러가지 꽃들을 가꾼다. 마침내 독립 기념일에 옥상으로 외삼촌을 초대한 리디아는 
비밀리에 준비한 꽃이 가득한 광경을 외삼촌에게 보여준다. 
외삼촌의 놀란 표정을 통해 감동받은 느낌이 전해진다.
리디아의 선물에 대한 답으로 외삼촌은 꽃으로 뒤덮인 케익을 리디아에게 선물한다. 
아버지가 취직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리디아를 배웅하러 외삼촌 식구들이 역에  모였다. 
처음 리디아가 왔을 때, 그 황량함은 사라지고 섭섭함이 가득한 얼굴들이다.
삼촌네 집에 왔을 땐 리디아 혼자였지만 돌아가는 길엔 고양이 오스티도 함께이다. 
리디아는 다시 할머니와 꽃씨를 뿌린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아픔과 슬픔을 걷어내고 희망을 피우는 꽃씨를...

리디아의 정원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리디아처럼 꽃을 가꾸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꽃을 보고 찡그리는 사람도 없으리라.
리디아는 단순히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꽃을 통해 사람들에게 웃음꽃을 피우고 싶었던 사람이다.
리디아는 타샤 튜터를 떠올리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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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차 나들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53
미셸 게 글 그림, 최윤정 옮김 / 비룡소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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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이가 산책을 나왔다. 엄마는 풀밭에서 누워 책을 보고 있고, 
아이는 우유병을 안은 채 잠들어 있다. 아마도 우유를 먹다가 잠들었나 보다. 
그때 노랑나비 한마리가 날아 와서 유모차에 앉는 바람에 아이가 깬다.
날아다니기만 해서 피곤하다는 나비에게 아이는 유모차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개구리가 나타나 자기도 타고 싶다고 하고, 나비는 개구리가 무섭다며 날아가 버린다. 
나비를 쫓은 개구리가 얌체같지만 기꺼이 태워 준다. 몇 발짝 밀고 갔더니 이번에는 꽤액 거위가, 
다음엔 고양이가 유모차를 탄다. 고양이는 젖병까지 빨아 먹는다. 그리고는 여우가 또, 곰이 나타나서 무조건 유모차에 탄다.
아기는 그런 동물친구들을 내치지 않고 차례로 태워준다. 그러다 지쳤는지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든다.

잠에서 깬 아이는 동물 친구들을 불러보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울고 만다.
그러자 친구들이 모두 나타나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엄마에게 데려다 준다.

이 이야기는 잠들었던 아이의 꿈 속에 동물 친구들이 찾아온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늘상 유모차를 타기만 했던 수동적인 존재였을 아이가 동물 친구들을 만나면서 엄마처럼 
밀어주는 역할을 하는 능동적인 모습이 귀엽다. 작은 나비부터 점점 무게가 나가는 동물들로
바뀌어 나가는 것도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한다. 곰이 탔을 땐 아이가 무척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도 나온다.

우리 아이가 책속의 아이와 비슷한 또래라서 더 한층 와닿는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알겠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무엇이든지 혼자 해보려고 한다. 자율성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엄마처럼 나도 산책을 나갈 땐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다닌다. 신발을 신겨서 공원에 내려놓으면 너무 좋아라 한다.
그리고 유모차에 타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유모차를 밀고 가려고 한다. 
책 속의 아이의 모습에서 내아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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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잡자 - 제4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18
임태희 지음 / 푸른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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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갉작갉작…저기서도 사각사각…, 사물함에도 냉장고에도 주홍이의 뱃속에도 사방곳곳에 쥐가 있다. 축축한 털에 새까만 눈알을 굴리면서 기다란 꼬리까지 출렁거리는 쥐..그 끔찍하고 흉측한 몰골의 쥐가 여기저기 모든 곳에 있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는 그 쥐들은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차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진다. 바로 주홍이가 잉태하게 된 새로운 생명이다. 그리고 주홍이는 새로운 생명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수술실에서 “텅!” 하고 떨어지는 핏덩어리는 표면적으로는 어느 여고생의 살해된 태아이지만 사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짜증스럽고 흉측한 하루하루의 삶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생과 학생, 택배 직원과 어머니, 주홍이와 주홍이 태아 사이의 모든 관계가 쥐의 몰골과 같이 끔찍하고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이 소설의 표면만을 들여다보게 되면, 십대 미혼모의 임신중절에 대한 속죄(자살)를 통하여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강조하고 십대의 성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면, 쥐의 몰골처럼 짜증나고 흉측한 모든 사람들의 일상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마치 여드름이 심하게 났을 때, 이곳저곳의 여드름 중에서 가장 성났던 여드름 한 군데가 드디어 확 터져버렸다고 하여도 나머지 울긋불긋한 여드름들은 그냥 그대로 남아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십대의 성문제라는 포장지 밑에는 작가가 느끼고 있는 인간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짜증과 끔찍스러움이 그대로 묻어있으며, 그런 소름 돋는 현실에 대한 희망과 대안이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어나가기 시작할 때는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고도의 상징기법과 암시에 의해서 몰입되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맨 뒷장을 덮고 났을 때는 무엇인지 징그럽고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남자를 배제한 채 이야기를 풀어내 임신의 책임은 모두 여자의 탓으로 돌리는 냉담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어떤 문학작품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있게 남겨지기 위해서는 그 작품의 핵심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알맹이는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올려서 잎사귀를 틔우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소재와 상징의 씨앗은 있다. 그것은 “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철학에는 씨앗이 없다. 임신중절에 대한 속죄(자살), 청소년 학생들을 위한 성상담 인터넷 사이트의 개설, 주인공의 빈자리를 지켜주게 된 고양이로서는 너무나 빈약하다. 작가는 작품 속에 세상이 싫고 사람들이 짜증난다는 ‘씨앗’을 떨구어 놓았고, 그 씨앗은 발아함이 없이 그냥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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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아이들 책읽는 가족 59
이금이 지음, 김재홍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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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아이들은 농촌을 배경으로 한 연작동화다. 마치 농사를 짓듯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농촌에서 사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부모가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들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쌀을 주식으로 하면서도 생산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쌀은 농부가 모를 심고 여름내 땀 흘려가며 가꿔서 가을에 수확한다. 그런데도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쌀의 의미는 농부들의 땀은 생략한 채 마트에서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공산품과 하등 차이가 없는 소비재일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서 토론을 하던 중 남편이 무심코 불쑥 내뱉은 “이런 농촌하고 당신 고향하고 다른게 뭐가 있지?”라는 한 마디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




내 고향은 섬이다. 완도에서도 한 시간 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낙도다. 도시로 나와 대학을 다니기 전까지 그곳은 내겐 낙원이었다. 어렸을 적에 여름밤이면 오빠들과 바닷가 자갈밭 위에서 빈 쌀자루를 이불삼아 반짝반짝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자잘한 수다를 떨며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 와 세수하고 학교가곤 했다.

여름방학이면 아침 먹고 좀 놀다가 바닷가에 가서 헤엄도 치고 썰물에 뻘밭에서 친구들과 달리기도 하고 조개도 잡고 게도 잡고 고동, 굴멩이, 해삼, 조가비, 몰멩이 등등을 잡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잘 살진 못했지만 삼시 세끼 굶지 않고 먹었기에 친구들 간에도 위축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진 동네분교에 다녔는데 우리 학년이 25명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이사를 떠나고 중학교 졸업 후엔 도시공장(낮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으로 떠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친구들이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도 고향에 사는 친구 말로는 최근엔 전교생 합해도 몇십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게 소중한 추억이 있는 고향이 근자에 가면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젊은이는 도시로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바닷가 자갈밭은 방파제를 설치하면서 시멘? 양식업에 투자했다가 망해서 야반도주한 경우도 있다. 비슷비슷하던 살림살이들도 양식업을 먼저 시작한 동네는 부촌이 되고 후발주자들은 낭패를 보기도 하였다.




우리 부모님도 전복양식을 하시는데 지난 몇 년간은 중간상인들의 농간에 값을 허술하게 받아 끌탕을 하셨다. 그나마 작년부터는 어민들 자체적으로 수매조합을 결성하어 올해는 제값을 받고 파실 수 있었다고 하신다. 전복은 아직 수입이 되지 않아서 웬만한 도시 월급쟁이 보다 낫지만 우리 형제들 중 그 누구도 가업을 이을 생각은 없다. 우선 일이 고되고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어렵더라도 도시에서 살려고 한다. 그나마 고향으로 내려간 젊은 사람들도 종수삼촌처럼 결혼하기 힘들어서 동남아시아에서 신부를 수입(?)해서 결혼한다고 한다.




우리 고향과 농촌마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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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하늘말나리야 - 아동용, 중학교 국어교과서 수록도서 책읽는 가족 1
이금이 글, 송진헌 그림 / 푸른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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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면 글을 군더더기가 없이 꼭 필요한 말만 쓰는 것 같다.

그리고 작가의 스타일이 직접 대안을 제시하다기 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으로 옆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독자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나가게 하는 것 같다.




글이 주는 느낌이 너무 따뜻해서 새벽에 젖먹이 아기가 일어나기 전에 나만 혼자 살그머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금이 작가를 인터뷰한 글을 찾아 읽기도 하였다.




이 글을 처음 읽어나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혹시나 이 이야기가 미르엄마와 바우아빠가 결혼하는 걸로 끝나버리면 어떡하나, 만약 그렇다면 너무 진부할 것 같은 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또 미르엄마와 바우아빠가 결혼해서 아빠나 엄마의 부재로 상처 입은 세 아이들 모두에게 부모가 되어주는 것도 상상해 보았지만, 이것 역시 우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원인을 찾아보니 바우아빠가 출현하면서 ‘홀아비’라는 것을 너무 일찍 드러내서 위의 상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좀 더 나중에 드러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 아이들의 모습 중에 미르라는 아이가 내 어렸을 적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다. 새침떼기..




책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도 던져보게 되었다.

‘부모 잃은 아이의 슬픔과 자식 잃은 슬픔 중 어느 게 더 클까’
    부모 잃은 아이는 살아가는 자체가 힘들어지겠지만 슬픔이라기 보다는 고난에 가깝고, 아이 잃은 부모는 그야말로 슬픔 그 자체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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