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였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잘 모르는 사람 뿐 아니라 그의 팬까지 혹하게 만드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쭉 읽어왔고, 그와 관련된 아주 조그만 사실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열혈 팬이다. 그런 내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서평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팬이라면 다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법이다.

 

 저자인 시모쓰키 아오이는 "추리소설 평론가라는 간판을 걸고, 추리소설을 논하면서 돈까지 받고, 추리소설을 수천 권이나 읽었으면서 크리스티 작품은 고작 일곱 편밖에 읽지 않았다."(9P)고 말하며, 그 이유를 "'크리스티는 이러저러하게 재미있다'라는 설명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10P)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크리스티의 팬을 자처하는 나 역시 누군가가 크리스티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미있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소설 곳곳에 단서와 복선을 심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설에 사용한 트릭을 한 문장(아오이의 기준으로는 15글자에서 30글자 이내)으로 요약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트릭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가 트릭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그 말에 발끈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추리소설에서 TRICK은 주로 범행 수법에 관한 속임수를 가리킨다. 즉 범인이 피해자를 어떤 방법으로 죽였느냐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힌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내용과 구성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트릭이 중요한 소설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MISDIRECTION, 독자의 시선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뛰어나다. 크리스티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도 모두 이런 식이다.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발표 당시 작가가 비겁하다는 비난까지 들었던 작품이라 다음과 같은 시모쓰키의 변론이 고마울 정도다.

 

 

 실로 대담하다. 트릭을 아는 상태에서 읽으면 작가도 아니면서 독자들에게 들통 나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발표 당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공정성 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단서를 이렇게 대담하게 심어놓았으니 나는 논의를 벌일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25P)

 

 

 한 마디로 독자가 크리스티의 교묘한 미스디렉션 기술에 속았다는 얘기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보니 크리스티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참 난감하다. 줄거리를 하자니 작품 전체를 스포일러할까봐 걱정이고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반전이 뛰어나다는 로는 사들의 흥미를 끌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라는 책의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 애거사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한 백여 편의 추리소설과 필명 메리 웨스트매콧으로 발표한 일반소설 여섯 편, 희곡 아홉 편까지 말 그대로 크리스티의 전작을 '스포일러 없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도 좋다. 5막으로 나눠서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 미스 마플 시리즈, 토미&터펜스 시리즈, 희곡, 시리즈 외 장편 순서로 소개하고 별점을 매겼다. 왜 이런 구성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는데 크리스티 초기작품은 대부분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하고, 마플은 크리스티 추리소설이 웬만큼 뼈대가 잡힌 뒤에 나왔기 때문에 꽤 유의미한 구성이라고 본다. 사랑스러운 사고뭉치 부부탐정 토미와 터펜스는 크리스티가 두 번째로 발표한 <비밀결사>로 마플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작품 수가 적고(장편소설 4권, 단편집 1권) 십수 년 간격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푸아로나 마플보다 덜 유명하다. 그래도 나는 토미와 터펜스를 굉장히낀다. <엄지손가락의 아픔> 서문에 크리스티가 독자들이 "토미와 터펜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라고 묻는다고 쓴 것을 보면 이 부부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지난 2월에 동숭아트센터에서 <비밀결사>를 모티프로 한 <경성특사>라는 뮤지컬을 공연해서 보러 갔었다. 할인내역에 크리스티 할인(10%)이 있어서 <비밀결사>를 가져갔는데 지하철에서 다시 읽어보니 토미와 터펜스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활기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터펜스는 토미 말마따나 냄새를 맡은 테리어 종 강아지처럼,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면 놓치지 않고 뒤쫓는 정열적인 여인이다.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을 아낌없이 깨부수는 여성들'이 크리스티가 지향하는 여인상인 듯하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에 공감한다. 얌전하고 수동적이며 인내심 강한 여성의 미덕을 내팽개친 터펜스, 프리랜서 가사노동자의 길을 개척한 루시(패딩턴발 4시 50분),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엘리너(슬픈 사이프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어머니의 결백함을 밝히려 하는 칼라(다섯 마리 아기돼지) 등등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크리스티 작품에 많이 나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남성에 종속되기를 강요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표현되는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성공한 애거사 크리스티야말로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자는 연애소설이나 쓰라"는 세간의 비난에 항의하듯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여섯 편도 하나같이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정치, 전쟁 등 이른바 남성의 영역에 비해 사소한 주변부로 여겨지는 연애/결혼/가정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여성작가의 시선으로 탐구한 여성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그린 수작들이다. 특히 저자는 메리 웨스트매콧의 세 번째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를 별 다섯 개(읽지 않고 넘어가면 안 된다. 뛰어가서 사올 것.)를 매기며 반드시 읽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가득한 죽음이 닥칠 것"(438P)이라고 겁을 준다.

 

 

 이제 군말은 그만 두겠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장인'이라는 그릇에서 넘쳐흐른 '크리스티'가 더없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결정을 이룬 걸작이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441P)

 

 

 메리 웨스트매콧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은 포레에서 좋은 번역으로 전권 출간했으니 크리스티에게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보시기를. 나도 마지막 작품 <사랑을 배운다>를 빼고 다 읽었는데 좋은 작품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을 배운다> 역시 별 네 개짜리 걸작이다.

 

 시모쓰키는 크리스티가 쓴 희곡들도 모두 읽었다. 아직 크리스티의 희곡은 구경조차 못나로서는 무척 부러운 일이다. 그는 크리스티가 연극적 연출에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한다. 추리소설 걸작들에 연극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이 많고, 아홉 편의 희곡도 두 편 빼고는 모두 걸작이라며. 추리소설 평론가의 글을 읽으니 이런 점이 좋다. 걸작이 왜 걸작인지, 졸작은 왜 졸작인지 다 설명해준다. 다소 미숙했던 데뷔 초기의 크리스티가 성숙해가는 과정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보여주고 말이다. 그가 졸작이라고 한 크리스티 작품은 대개 국제음모와 비밀기관이 등장하는 스릴러물인데, 나도 그런 작품들은 재미없어서 읽다 말았거나(ex:그들은 바그다드로 갔다), 완독했어도 기억에 남지 않아서(ex:빅 동의할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 스파이를 잡으려고 종횡무진하는 토미와 터펜스의 모험담인 <N 또는 M>은 시모쓰키도 나도 걸작이라 생각하는 예외적인 작품이지만 그렇다 해도 애사 크리스티는 스릴러에는 영 소질이 없다. 본인은 스릴러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 예를 들면 <누명>, <리스터데일 미스테리>, <쥐덫>, <비둘기 속의 고양이> 등을 시모쓰키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분석한 부분도 흥미롭다. 장르소설은 취향이 갈리기 마련이므로 내가 걸작이라고 여기는 작품을 남이 평작이졸작으로 여긴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 (세계 3대 추리소설로 불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조차 별로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봤다.) 반대로 나는 그냥 그랬던 <서재의 시체>, <주머니 속의 호밀>,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를 시모쓰키가 걸작으로 평가한 이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거의 잊었었는데 이게 왜 걸인지 설명한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평작인 <서재의 시체>, <주머의 호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들은 다시 읽으려고 목차에서 제목을 찾아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두었다.

 

 자, 이쯤에서 시모쓰키 아오이가 뽑은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베스트 10을 보자.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541P)

 

 

 의외로 세계적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목록에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ABC 인사건>의 명성에 가려서 알려지지 않은 걸작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유명한 크리스티의 작품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시모쓰키그 작품들에다가 별 네 개(추리소설 역사에 남을 걸작)를 매겼다. 나도 기존 베스트 10보모쓰키 베스트 10에 오른 작품들을 더 좋아해서 반갑다. 특히 <커튼>은 더 이상의 가 필요없는 걸작이다. 그러나 크리스티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중으로 미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 에르퀼 푸아로가 사망하기 때문이다......

 

 시모쓰키 베스트 10에 없는 작품들 중에도 뛰어난 소설이 많다. 이 책에 작품별, 탐정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별점이 높은 순서대로 골라서 읽으면 좋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7-28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3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그램의 용기 - 앞으로 한 발짝 내딛게 만드는 힘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늘 힘이 되는 한비야님의 신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보면 '이 책은 꼭 정복(?)하고 싶다!'는 일종의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두께가 상당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왠지 이 책을 다 읽으면 굉장히 똑똑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장에 꽂아놓으면 괜시리 마음도 뿌듯하고 남들에게 내가 이런 책도 읽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뻐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지식에 대한 욕구도 한몫 한다. 어떤 분야든 한 가지라도 더 알고 싶은 욕망이 평소에는 잠자고 있다가 내용이 꽤 어려워 보이는 책이 눈에 띄는 순간 깨어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한 오프라인 서점에 갔다가 그런 책을 봤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4부작 시리즈 <중세>가 그것이다. 웬 백과사전처럼 생긴 책이 신간코너에 있기에 들춰봤는데 일단 엄청난 두께에 혀를 내둘렀고, 책 집필에 참여했다는 세계 석학 리스트에 경이를 느꼈다. 80,000원이라는 가격은 오히려 놀랍지 않았다. 내가 봐도 가격을 그 정도는 매겨야겠던데 뭐.

 

 

 

 

 

 

집필자 못지않게 역자의 이름도 많다. 1000년에 달하는 역사를 다루고 있는만큼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권이 나오기 전에 일독하고 싶은데 내 독서력으로 가능할지? ㅋㅋㅋ 독서 관련 저서들을 보면 책을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다고들 하는데 이런 류의 책은 그 동안 머리가 깨지도록 읽어온 게 아까워서라도 마지막 한 글자까지 다 읽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세계적인 비교종교학 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책도 만만치 않게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수년 전에 그의 저서 <신을 위한 변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책에 메모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이슬람>은 적당한 두께의 소프트커버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 좋았는데 어쩐 이유인지 지루해서 중간에 덮었고, 지금은 종교의 역사를 다룬 <축의 시대>라는 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저자는 수녀원에서 7년간 생활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뛰쳐나온 뒤 세계의 여러 종교를 공부했고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해왔다고 한다. 그의 책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읽은 책의 내용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신은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축이라는 것. 신의 실재나 서로 다른 종교의 상대적인 우월성에 대한 논쟁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저자의 의도를 곡해했는지도 모르지만 작년 여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종교가 없으면 자신의 양심을 따라 살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도 읽고 나면 굉장히 똑똑해질 것 같은 책 중 하나다. 역자 중 한 명인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이 우리 집에 있는데 이런 분이 번역에 참여했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 다르지만 번역서의 경우 역자의 명성과 업적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단 한 권이지만 최재천 교수의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이유로 한번 들춰본 적도 없는 <통섭>에 신뢰가 가는 것을 보면 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각 분야별로 전문화된 현대사회의 세태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방해한다고 지적했는데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분야에 정통한 것이 경쟁력이 되고 장점이 되는 세상이지만, 그만큼 내가 아는 분야와 관계가 없는 쪽에는 전혀 무지해서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을 갖기 어렵다는 부작용이 분명 있으니까. 내가 끊임없이 반성하고 돌아보며 스스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편협함'이다. 지식의 편중, 사고방식의 편협함, 머릿속 지식을 삶의 지혜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좁은 마음. 별 수 있나. 계속 읽고 생각하고 배워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교실 뒤쪽에 있는 책꽂이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어린이용 세계명작전집 축약본이 꽂혀 있었다. 그 때는 학기초마다 반 아이들에게 책을 한 권씩 걷어서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놓곤 했는데, 초등학교 4~5학년 때 교실에 <제인 에어>나 <노트르담의 꼽추>같은 고전 축약본이 많이 있었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접한 때였다.

 

성인이 된 지금도 하는 생각이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이가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는 작품이다. 아무리 아이가 읽기 쉽게 편집하고 내용을 축약해도 그 당시 미국의 사회상이나 남북전쟁, 노예문제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힘든 작품이므로. 축약본이다 보니 스칼렛 오하라나 레트 버틀러 같은 개성적인 인물들의 성격도 평면적이 돼 버려서 매력을 느끼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 때는 이런 의식(?)이 없었으니까 몇 장 읽어보고는 스토리가 이해도 안 되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덮어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반 부반장이었던 여학생이 가져온 책이었는데 그 친구가 스칼렛이 나쁜 년이라고 욕했던 것만 기억난다.

 

그 후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고1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었는데 수업시간에 이 작품을 언급하시면서 졸업 전에 꼭 한번 읽어보라고 하셔서 학교 도서관에 있는 한 권짜리 책을 빌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감안할 때 청소년용 세계명작전집 시리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 책도 500쪽이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그걸 밤을 새가며 이틀만에 다 읽고 토끼눈이 돼서 학교에 갔던 추억이 있다.

 

이후 20대 초반이었던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상, 중, 하 3권짜리 번역본을 발견했다.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이 괜찮았고(비슷한 시기에 완독했던 <제인 에어>가 대학생이 보기에도 번역이 너무 형편없었던 터라 번역에 매우 민감할 때였다......), 내용을 다 알고 읽는데도 무척 재미있어서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소설에 있어서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가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착한 여자'와 '멋진 남자'가 아니라서 좋았으니까. 그렇다고 스칼렛이 마냥 악녀인 것도 아니고, 레트가 답 없는 나쁜 남자인 것도 아니다. 그 둘은 분명 도덕심이 결여된 부분이 있고 지독하게 고집이 세며 이기적이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의 결점이지 그들 성격의 전부가 아니다.

 

 

 

명작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한다. 10대에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20대에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분명 같은 작품이지만 소감은 달랐다. 30대인 지금은 또 다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게 될 것이다.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낯가림이 무기다 - 소리 없이 강한 사람들
다카시마 미사토 지음, 정혜지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을 가리는 성격은 살면서 불편할 때가 많다. 일단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낯선 장소나 분위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래 되어 익숙한 공간에서도 영 친해지기 어려운 부류가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지금 직장을 4년째 다니고 있지만 남자 직원들에게는 여전히 낯을 가려서 업무 외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전에 함께 근무했던 어떤 원과회사에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아침에 인사하는 것조차 어색했었다. 그도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내가 먼저 인사를 해도 받아주는 건지 안 받아주는 건지 긴가민가했기에 더 어색했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은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색해하는 혼자 밥 먹기나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카페에서 차 마시기 등을 별 어려움 없낸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다니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혼자 뭔가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손님이 붐비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관객이 많은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사람이 무척 많다.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공부를 하던 책을 읽던 창 밖을 보며 각에 잠겨 있던)은 더 많다. 말하자면 낯가리는 성격은 의외로 흔한 성격이며, 사람이 가진 여러 특성 중 하나일 뿐 문제가 있다거나 잘못됐다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낯선 사람과 어울리거나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장소에 있어야 하는 일이 많은 세상이다. 농경사회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옮기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현대사회는 이사도 자주 다니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잦다. 자연히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한 사람을 우대하기까지 한다. 나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사회구조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불편하기만 하면 그럭저럭 살겠는데 이런 성격을 문제가 있다는 듯이 치부하는 시선 때문에 더 힘들다. 뭔가 내 성격에 큰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끼면 그 순간부터 자존감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이런 성격이 어때서? 낯가리는 성격 때문에 불편한 남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라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내 주장을 내세우기 어려워하는 성격인 탓에 말은 못한다.

 

 아무튼 나는 우리나라만 낯가리는 사람이 살기 힘든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낯가림이 무기다>라며 낯가리는 성격을 잘 활용하자는 책까지 나온 걸 보면 말이다. 이런 류의 자기계발서는 성격을 바꾸기를 권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하는 어투일 때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럴 필요는 없다면서 낯가리는 성격을 즈니스나 넓은 대인관계에서 활용하는 실제적인 기술들을 알려준다. 무척 현실적이다.

 

 사실 사람이 성격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낯을 가리건 오지랖이 넓건 모든 성격에는 장단점이 있고 어느 정도는 타고난 기질도 있다. 타고나기를 다혈질이어서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백날 잔소리를 해보았자 조금 나아질 수는 있어도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낯가림도 80%는 타고난 기질이기 때문에 바꾸려고 노력해도 별 소용이 없다. 차라리 이 의 저자처럼 '관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낯가리는 성격의 장점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특을 파악한 다음 내 뜻에 맞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 성격을 바꾸려고 마음 고생이나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일도 내 뜻대로 되고, 일석이조다.

 

 

 낯을 가리는 사람 중에는 '나는 커뮤니케이션이 서툴기 때문에 영업이나 판매, 접객 등은 절대로 맞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의 포인트는 뛰어난 말주변이 아닙니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중이 있느냐 없느냐는 상대에게도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 <비법 19 : 비위 맞추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을>, 124~125페이지 -

 

 

 저자인 다카시마 미사토가 공개한, 낯가림을 무기로 활용하는 36가지 비법의 기본 바탕'상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서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디까지나 앞에 나서기 어려워하는 성격을 보완하기 위함이어야지, 남을 '이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비법 소개도 좋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존중과 관심을 강조하는 게 이 책의 가장 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쉽게 읽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나는 책을 좀 느리게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사흘도 안 렸다. 크기가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문체가 마음에 든다. 친절한 선생님처럼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문체라서 읽다 보면 기분이 편해진다. 예전에는 이런 문체가 지루했는데 요즘은 좋다. 나이가 들었나.

 

 단점은 책값이 비싸다는 점. 정가는 11,500원이고 알라딘 판매가는 10,350원인데 내용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간, 줄간격, 여백을 좀 줄였으면 책이 훨씬 얇아져서 가격이 내려갔을 텐데. 그래서 별 하나 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