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교실 뒤쪽에 있는 책꽂이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어린이용 세계명작전집 축약본이 꽂혀 있었다. 그 때는 학기초마다 반 아이들에게 책을 한 권씩 걷어서 미니 도서관을 만들어놓곤 했는데, 초등학교 4~5학년 때 교실에 <제인 에어>나 <노트르담의 꼽추>같은 고전 축약본이 많이 있었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접한 때였다.

 

성인이 된 지금도 하는 생각이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열 살을 갓 넘긴 어린이가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는 작품이다. 아무리 아이가 읽기 쉽게 편집하고 내용을 축약해도 그 당시 미국의 사회상이나 남북전쟁, 노예문제 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힘든 작품이므로. 축약본이다 보니 스칼렛 오하라나 레트 버틀러 같은 개성적인 인물들의 성격도 평면적이 돼 버려서 매력을 느끼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 때는 이런 의식(?)이 없었으니까 몇 장 읽어보고는 스토리가 이해도 안 되고 재미없다는 이유로 덮어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반 부반장이었던 여학생이 가져온 책이었는데 그 친구가 스칼렛이 나쁜 년이라고 욕했던 것만 기억난다.

 

그 후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접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고1 담임선생님이 국어선생님이었는데 수업시간에 이 작품을 언급하시면서 졸업 전에 꼭 한번 읽어보라고 하셔서 학교 도서관에 있는 한 권짜리 책을 빌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감안할 때 청소년용 세계명작전집 시리즈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 책도 500쪽이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그걸 밤을 새가며 이틀만에 다 읽고 토끼눈이 돼서 학교에 갔던 추억이 있다.

 

이후 20대 초반이었던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상, 중, 하 3권짜리 번역본을 발견했다.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번역이 괜찮았고(비슷한 시기에 완독했던 <제인 에어>가 대학생이 보기에도 번역이 너무 형편없었던 터라 번역에 매우 민감할 때였다......), 내용을 다 알고 읽는데도 무척 재미있어서 한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소설에 있어서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가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착한 여자'와 '멋진 남자'가 아니라서 좋았으니까. 그렇다고 스칼렛이 마냥 악녀인 것도 아니고, 레트가 답 없는 나쁜 남자인 것도 아니다. 그 둘은 분명 도덕심이 결여된 부분이 있고 지독하게 고집이 세며 이기적이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의 결점이지 그들 성격의 전부가 아니다.

 

 

 

명작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한다. 10대에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20대에 읽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분명 같은 작품이지만 소감은 달랐다. 30대인 지금은 또 다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게 될 것이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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