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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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은지는 꽤 오래 되었다. 지금 고3인 막내동생이 중학생 때 돈을 모아서 내 아이디를 빌려 샀다고 했으니까 3, 4년은 족히 됐을 것이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항상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데다, 어린이 및 청소년 필독도서목록에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책이라 동생이 사기 전부터도 제목은 잘 알고 있었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가끔 들춰보곤 했지만 왠지 내용이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번번이 내려놓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빛이 바랜 채 기억상자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이 책을 꺼내든 계기는 다름아닌 '책'이었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에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로 이주당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용돼 있다. 이주 과정에서 체로키 인디언의 3분의 1이 죽어나간 탓에 '눈물의 여로'라고 불린 이 사건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으나 죽은 가족을 껴안고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백인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원문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 <과거를 알아두어라>, 75페이지 -

 

 

 1838년에서 1839년에 걸쳐 1만 3천여 명의 체로키 인디언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체로키 인디언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는 오클라호마 주까지는 1,300킬로미터. 어린이와 노인, 병자를 포함해 4천 명이 넘는 인디언이 행로 중에 어서 낯선 땅에 묻혔다.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것은 머나먼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건너온 백인들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주인공 '작은 나무'의 조부모는 이주 당시 산 속으로 도망쳐 고향 땅에서 살아남은 체로키 인디언의 후손이다. 그들은 다섯 살 난 손자에게 체로키 인디언의 역사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족이라고 무시했지만, 인디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책을 썼다면 포리스트 카터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민족의 수난을 기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단어와 수식을 동원해 울분을 토하고 두 번 다시 이런 을 당하지 않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제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조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작은 나무'의 어린 시절이 읽는 이의 영혼까지 포근하게 감싸준다.

 

 또한 책 곳곳에 어린아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이 묻어 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하면서 동시에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이야기가 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낸 것도 개울을 따라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곳은 약간 산허리 쪽으로 올라선 곳에 있었다. 그곳은 월계수로 빙 둘러싸인 채 늙은 미국풍나무 한 그루가 굽어보고 있는, 그다지 넓지 않은 풀밭이었다. 그곳을 본 순간 나는 그곳을 나만의 비밀 장소로 삼기로 작정했다. 그 뒤로 나는 심심하면 그곳에 들르곤 했다. (중략) 하지만 비밀 장소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우연이긴 하지만 나한테도 비밀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그럴 수 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 <나만의 비밀 장소>, 103~104페이지 -

 

 

 사람들 대부분이 '작은 나무'와 같은 경험이 한두 번은 있지 않을까?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건물 틈의 어두컴컴한 구석을 발견하고는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해서 구슬이나 공깃돌, 만화카드 등을 감춰두었던 추억 말이다. 나는 이런 비밀 장소를 찾으면 주로 혼자 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지곤 했다. 지금은 공상을 해도 조용히 머리로만 하지만 어릴 땐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만 아는 비밀 장소니까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이나 학교에서 비밀 장소와 그곳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그 때는 왜 그런 일들이 그렇게도 즐거웠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일로 행복을 느꼈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그 추억의 한 조각을 이 책을 읽다가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메말라가는 영혼에 한 모금 샘물을 떠 넣어주었다고 할까? 스스로 비밀 장소라 해놓고 결국 비밀을 지키지 못해서 할머니에게 고해 버린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많이 웃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말미에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가 전해진다.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 <죽음의 노래>, 338페이지 -

 

 

 체로키 인디언들이 다음 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답게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작은 나무' 가족의 친구인 윌로 존은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이 죽으면 소나무 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몸이 2년치 거름은 될 거라면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은 죽음까지도 자연 친화적이었다. 오랜 세월에서 우러난 지혜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자연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되어 조부모에게 맡겨진 '작은 나무'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조부모마저 잃고 서쪽의 인디언 연방으로 떠났다. 집에서 기르던 리틀레드와 블루보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와 함께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리틀레드는 빙판을 잘못 밟는 바람에 시냇물에 빠져 죽었고, 블루보이는 늙고 병들어 '작은 나무'가 만들어준 자기 무덤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혼자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인간이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작은 나무'는 결국 인디언 연방에 도착했을까? 그곳에는 인디언 연방이 없는데...... 담요처럼 포근했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마지막 구절을 옮겨 적어본다.

 

 

 블루보이는 코가 발달되어 있으니까 아마 지금쯤 벌써 고향산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블루보이라면 문제없이 할아버지 뒤를 따라잡을 것이다.

 

                                                                                        - <죽음의 노래>, 341페이지-

 

 

 '작은 나무'는 항상 키가 큰 할아버지의 걸음을 따라 잡으려고 애썼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자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던 할아버지처럼 '작은 나무'도 어린 생명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훌륭한 체로키 인디언으로 성장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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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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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포털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이라는 코너에서 무척 가슴 아픈 기사를 읽었다. 지리산으로 방사되었던 어느 6년산 반달가슴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반달가슴곰은 북한에서 어렵게 들여온 대한민국 토종으로, 죽기 1년 전에는 건강한 새끼를 출산했던 어미곰이었다. 2007년과 2008년에 두 번이나 올무에 걸려서 죽을 뻔한 것을 구출해서 치료한 뒤 다시 방사했는데, 2010년 6월 또다시 야산 근처 농가에서 설치한 올무에 걸려서 결국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고 말았다. 살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올무가 연결된 통나무까지 뽑혀 있었단다.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온몸에 올무를 칭칭 감은 곰이 나무 위에 매달려 축 늘어진 영상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곰은 위기에 처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이 땅에 사는 동물들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야생 동물들이 농사를 '방해'하고 농작물을 '훼손'해서 올무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농민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동물이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가끔 인도나 부탄 같은 나라에서 코끼리 떼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습격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땐 그 코끼리들이 미쳤는갑다 싶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보면 99.9%는 습격을 당한 마을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못살게 군 전력이 있다. 밭을 일구기 위해 코끼리의 서식지를 침범했거나 심어놓은 농작물을 망쳤다고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거나 등등.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고 자연에게 저지른 죄는 반드시 돌려받게 되어 있음이다.

 

 물론 농민들에게도 땅을 경작해서 얻은 작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 그 작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권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할 권리는 없다. 사람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단이 많지만 동물은 원래 먹고 살도록 타고난 것을 먹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다. 멧돼지나 너구리가 사람에게 앙심이 있어서 애써 가꾼 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서식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 길을 찾아 내려오는 것이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산에 있는 도토리를 싹 쓸어가는 바람에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 식량을 구하러 산 밑으로 내려왔다가 차에 치어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다.

 

 동물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 동물 없이 사람들만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알지만 마음이 불편하니까 애써 외면하고 우리도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므로 누굴 비난할 자격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공존이 어려운 이 현실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를. 먼 옛날의 인류는 굳이 방법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수천 년을 살았다. 그 때의 인류는 가능했던 일이 왜 지금은 어려운 것일까? 인류가 지구를 떠나 어디 다른 행성에 정착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이 책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환하게 웃는 라다크 사람들의 사진이 여러 컷 실려 있다. 그 사진들을 보면 따로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을 만큼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떠오른다. 서구식 개발붐이 일어나전의 라다크 사람들은 늘 그런 웃음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인도의 라다크 지역 거주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이 책의 저자는 16년 동안 라다에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본 사람이다. 야크털로 을 해입고 꼭 필요한 만큼의 농지만 경작하며,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는 반드시 신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라다크의 전통이었다. 한 집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남녀와 노소, 족과 이웃의 구분 모두가 함께 돌보고 열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도 농사일과 가축 돌보는 일을 도우면서 협동심과 책임의식을 배웠다. 여자라고 해서 집안일만 하지 않고 남자라고 해서 바깥일만 지 않았다. 여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논밭에 물을 대고 남자도 야크털에서 실을 자아내어 옷을 지입는 것다크 사람들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티베트에서 전수받은 대승불교 신자지만 소수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과도 상부상조하고 때로는 혼인관계까지 맺으면서 잘 지냈다. 종교 분쟁, 양성 갈등, 빈부 격차의 심화, 환경 파괴, 소수자 차별 따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삶의 방식그들은 20세기까지도 유지해왔던 것이다.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를 중재해주는 마을의 큰어른 같은 사람이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이 각자의 책임을 인정하고 좋게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어서 남이 기분 상할만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았다. 당연히 증오나 원한으로 인한 범죄도 없고 계급이 존재하기는 해도 그 차이가 크지 않아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지사. 책에 실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라다크 사람들의 밝고 자연스러운 웃음은 이러한 자부심과 확고한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다. 억지스럽고 때로는 불쾌한 코미디나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음을 얻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라다크의 장점만 잔뜩 써놓았지만 그 사회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기후 때문에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고(15%) 평균수명이 현대화된 사회보다 낮으며, 문맹률도 높다. 우리가 편의시설이라고 부르는 난방장치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해발 1만 2000미터의 고원에서 척박한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온 라다크 사람들은 생각보다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가스보일러나 히터같은 현대적인 난방장치가 없을 뿐이지 동물의 배설물을 말려서 난로에 넣어 태우는 식으로 겨울을 날만큼 자연환경을 체화한 것이다. 평균수명이 낮은 대신 라다크의 노인들은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강을 평생 유지하며 암이나 당뇨같은 질병은 알지도 못하고 농경과 가축 기르기가 중심인 사회의 특성상 죽을 때까지 할일이 있다. 삶의 질이 높다는 뜻이다.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고 개선해야 할 점이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죽음을 비극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불교의 윤회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죽음을 자연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서 죽은 아이가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거라는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이들이 곧잘 죽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기름보일러조차 없는 라다크가 낙후된 사회, 뒤떨어진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낙후된 면'에 대한 대안이 없다면 모를까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라다크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약점을 보완하면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라다크 주민의 대부분은 글을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의 사안에 대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지배계층에게 착취당하는 것은(애초에 지배계층 자체가 없는 것 같지만) 라다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서로 협력하면서 가족과 이웃들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루는 것. 오늘날 우리가, 그리고 현재의 라다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라다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에서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왜 인류는 동물과, 나아가 자연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가? 해답은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다'는 데 있다. 정확히는 '개발된 현대사회에서 사는 일부의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개발은 자연을 싸워서 이겨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해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산을 깎아 터널과 도로를 만들고, 물길을 바꾸고, 온갖 폐기물과 쓰레기를 파묻어서 토양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발전'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싼 다음 라다크처럼 현대화되지 못한, 그러나 개발 없이도 수천 년간 유지해온 사회에 강제로 들이미는 것이 문제인 거다.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개발의 결과로 우리는 라다크 사람들보다 훨씬 잘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면이나 생활의 편리성에서는 그들보다 앞서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전통사회의 라다크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병을 전혀 몰랐고, 저자에게서 서구사회에는 그런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왜 사람의 마음에 그런 병이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다크의 전통사회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강박장애 등 현대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명상이나 자연수련 등으로 얻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그들에게는 일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저자는 라다크의 전통 생활방식이 바뀌는 것도 안타까워했지만 무엇보다 라다크 사람들이 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열등감과 자기 부정에 시달리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부를 축적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 한순간 자본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내가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신경쓰기 시작했고 현대화의 어두운 면은 전혀 모른 채 서구식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과 옛 가치관은 낡아서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해 버렸다. 술을 담그고 남은 찌꺼기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던 라다크 사람들이 썩지 않는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내놓기 시작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무분별한 건축과 도로 건설로 동식물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책이 출간된 2007년까지도 도심에서 먼 지역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저자는 썼는데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여러 NGO 단체와 라다크의 지성인들이 진행하는 '라다크 프로젝트'가 계속 성과를 거두고 있어야 할 텐데.

 

 현대화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개발을 잠시만 늦추고 우리가 괴롭혀온 자연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서 외면받고 있을 뿐 라다크에 전기와 석유 대신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물을 짓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과 친해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먹을 것과 집 짓는 재료, 난방연료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었고 필요한 만큼만 썼으며 그래도 남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재활용을 했다. 누가 가르쳐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것도 혹시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주장에 공감한 이유는 그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더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문제삼은 것들을 나도 몇 년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무분별한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문제 뿐 아니라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문명인인 우리가 소위 비문명인인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없는 정신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개발이, 현대화가, 문명사회가 그토록 풍요롭고 무결점하다면 우울증으로 자살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비극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끼며 살아도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가는데, 뉴스에서는 상반기 무역흑자를 얼마 달성했다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나 떠들어댄다. 국민 전반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우러러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일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개발 논리에 물든 사고방식에서 먼저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처음엔 페이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리뷰가 돼 버려서 카테고리를 바꿨다.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 남아 있었던 한 챕터와 에필로그까지 다 읽었고, 점점 극으로 치닫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힌트도 어느 정도 얻었다. 저자처럼 국제 NGO를 결성해서 여러 나라를 오가며 강연활동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점을 알리고 함께 생각을 바꿔 나가자고 권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높디높은 산도 결국은 작은 모래와 흙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웰빙이나 유기농식품, 자연치료법 등 자연적인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이 흐름을 한 차원 높여서 계속 이어간다면 분명 개발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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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름에는 어찌하다 보니 추리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7월 마지막주가 휴가였기에 추리소설을 한 권 사서 완독할까 했었는데, 배우에게 이끌려서 구입한 <두 도시 이야기>가 예상 이상으로 재미있는 바람에 '추리'는 까맣게 잊었더랬다. 휴가지에서도 가족들이 모두 낮잠을 잘 때 난 이 책을 읽었으니까. 평소 나는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인데 <두 도시 이야기> 리뷰를 쓸 때 옆에 책이 없었는데도 거의 모든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역시 책은 기억에 남으려면 재미있고 봐야 하나보다. 특히 소설은 더더욱 그렇다.

 

 

 

 

 

* 한글판+영문판 구성을 산 것은 순전히 실수였다. 한글판 2권이 묶여 있는 구성인 줄 알았던 것이다. 2권에 만 원도 안 되다니, 엄청 싸다! 싶어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주문버튼을 눌렀나보다. 영어고자인 내게 영문판은 별 소용이 없거늘. 그래도 책이 예뻐서 소장가치는 있다.

 

 

 <두 도시 이야기>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되어서 머릿속 한켠으로 밀려났던 추리소설에 대한 갈증이 되살아났다. 추리소설을 떠올리자 가장 먼저 생각난 작가는 엘러리 퀸. 철없는 어린 시절에는 아가사 크리스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미국 작가를 은근히 얕보는 심리도 있었다. 그런 심리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로 와장창 깨지고 연이어 <Y의 비극>으로 굉장히 충격을 받으면서 나는 이 머리 좋은 두 사촌형제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Y의 비극>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비뚤어진 집>을 접하기 전에 읽은 작품이어서 범인을 1도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요새 이 "1도 ~하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유는 웃겨서ㅋ) 사건의 실체와 결말이 더욱 충격이었다.

 

 

 

 

* 정확히 언젠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둘 다 학생 때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해문출판사 문고판 시리즈였는데 현재 두 권 모두 소장하고 있다. 해문출판사가 추리문학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추리소설을 출간하는 것은 고맙고 좋은 일이지만 번역을 좀 새로 해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표지가 바뀌고 가격이 올라도 어색하고 이상한 리말 문장은 그대로니 원.

 

 

 

 이후 엘러리 퀸의 작품들을 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검은숲에서 엘러리 퀸 컬렉션을 출간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책의 만듦새도 마음에 들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들까지 모두 출간할 예정이라는 출판사의 의지를 응원하고자 국내 최초 출간작 중 하나인 <샴 쌍둥이 미스터리>를 구입해 읽었다.

 

 

 * 초판 한정 별색띠를 삽입한다고 해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구매욕에 불을 지른 검은숲의 엘러리 퀸 시리즈. 출간 초기에 산 것은 분명한데 이 별색띠를 두른 책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긴 으면 뭐 어때. 몇 년이 걸리더라도 다 사서 읽으면 되지. <샴 쌍둥이 미스터리>는 엘러리 퀸의 작품치고는 별로라는 평도 있지만 나는 꽤 재미있었다. 제목처럼 소설에 샴 쌍둥이 형제가 등장하는피해자가 이들을 연구하던 학박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난 사건보다도 탐정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처한 '산불'이라는 상황이 더 흥미진진했다. 산불이 나면 그 재와 연기가 모두 꼭대기로 집중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어찌어찌 사건은 해결했고 범인은 스스로 처리(?)되었으나 산불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길이 없서 모두 쓰러져 죽기 일보 직전, 괴력을 발휘해 집 밖으로 탈출한 감의 마지막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

 

 

 고전 추리소설이 대부분 그렇듯 엘러리 퀸의 작품에도 탐정이 등장한다. 그는 저자의 필명과 같은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으로 아버지인 퀸 경감과 함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혼자 해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파트너가 있는 탐정들은 거의 다 그렇다.) 고전 추리소설의 이러한 클리셰 때문에 미스터리 독자들 중에는 작품의 중반부에 이르면 누가 범인인지 짐작이 가고, 또 그 짐작이 맞아서 김이 빠졌다는 이가 꽤 있는데 나는 한 번도 범인을 맞힌 적이 없어서 김이 빠진 적도 없다. 왜냐하면 첫째, 나는 고전 추리소설의 뻔한 구성을 좋아하고, 둘째, 추리소설의 백미는 누가 뭐라 해도 마지막의 반전이므로 이것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서 굳이 범인을 맞히려고 애쓰지 않는다. 되도록 모르는 상태에서 범인의 정체를 알아야 그만큼 강하게 뒤통수를 맞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정말 강력한 한 방을 날려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와 <Y의 비극>의 작가 엘러리 퀸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국명 시리즈'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국명 시리즈'보다 더 유명한 '비극 시리즈'는 전권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 읽지는 못했다.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은 손에 땀을 쥐면서 읽고 감탄했는데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을 반쯤 읽다 말았던 적이 두 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들 중에도 취향이 안 맞거나 지루해서 읽다 만 작품이 몇 권 있고, 까치에서 나온 아르센 뤼팽 시리즈도 2권 <뤼팽 대 홈스의 대결>을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덮어 버렸었다. (시리즈를 반드시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냥 전부터 궁금했던 <813의 비밀>부터 읽을까 한다.) 경험상 중간에 덮은 책을 다시 펴기는 쉽지 않지만 믿고 보는 엘러리 퀸이니까, 처음엔 별로였던 작품이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었던 적도 분명 있으니까 언젠가는 비극 시리즈도 완독하겠지.

 

 국명 시리즈보다 비극 시리즈를 먼저 산 이유는 비극 시리즈가 더 짧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탐정의 영향이 더 크다. 드루리 레인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하는 편인데 엘러리 퀸은 탐정으로서의 능력은 높이 사지만 인물이 별로다. 잘난 척하는 건 그렇다 쳐도(사실 이것도 별론데) 사건을 마치 재미있는 퍼즐 풀기처럼 여기는 태도는 정말 아니다. 똑같이 잘난 척을 해도 에르큘 포와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고, 가끔 헤이스팅스를 무시하는 게 얄밉기는 해도 그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사건을 해결하고 나면 꼭 감사를 표시하며 추켜세워주기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엘러리 퀸은 그냥 나 잘났소 하며 사건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기 바쁘다. 영국 드라마 <셜록>의 셜록 홈즈는 연민이나 동정 따위는 차가운 이성을 방해하고 이성이 방해를 받으면 추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코난 도일 원작의 셜록은 드라마 속의 셜록보다는 인간적이다.), 작가 엘러리 퀸도 같은 생각으로 탐정의 성격을 이리 설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빈말이라도 겸손한 척한다던가 피해자나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는 장면이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탐정 엘러리 퀸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포와로는 어울리지 않게 겸손을 떨다가 상대가 자기를 추켜세워주면 어깨를 으쓱하며 콧수염을 쓰다듬곤 해서 참 귀여운데 말이다.

 

 하지만 탐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엘러리 퀸 시리즈 탐독을 그만 둘 생각은 없다. 누가 뭐래도 퀸의 작품은 재미있고, 논리정연한 추리에서 얻는 만족감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를 읽어보니 그 머리 좋은 탐정 퀸도 보기좋게 범인에게 속아서 높은 코가 납작해진 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 일을 계기로 조금은 덜 거만해지고 좀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새로 살 엘러리 퀸의 작품은 이 셋 중 하나가 될 듯하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퀸의 처녀작이고,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와 <미국 총 미스터리>는 국명 시리즈 중에서 사건의 내용이 가장 구미를 당기는 작품이라 골랐다. 국명 시리즈 중 이미 <샴 쌍둥이 미스터리>를 읽었기 때문에 출간된 연도 순서로 읽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나 <미국 총 미스터리> 중 택일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두 권을 다 지르던지, 다른 책을 다음으로 미루고 세 권 다 살 수도 있다. 지금은 2만 명의 관객이 들어찬 로데오 경기장에서 선수가 살해당한 <미국 총 미스터리>가 좀 더 흥미롭긴 한데...... 뭐가 더 재미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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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6
찰스 디킨스 지음, 바른번역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찰스 디킨스"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이름도, 작품도 유명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 캐롤>과 <올리버 트위스트>를 몇 번이나 읽었다. 비록 어린이용 축약본이긴 했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기억에 따르면 두 작품 모두 18세기 영국이 배경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디킨스 본인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민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두 도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혁명 직전 프랑스 국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 동시대 영국 런던의 풍경과 사회 분위기가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재미있다. 정말 매우 재미있다.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기분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고, 귀차니즘의 화신인 나를 리뷰까지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뮤지컬을 보러 다니면서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는데, 이 배우가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초연과 재연에 연달아 시드니 칼튼으로 출연했었다. 공연 장면이 영상으로 남지 않는 뮤지컬의 특성상 그의 예전 출연작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원작이라도 섭렵하고자 처음 고른 책이 이 <두 도시 이야기>였다. 따라서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읽었는데도 마지막에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으니, 역시 고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시대를 초월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소설의 도입부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의 거리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디킨스가 워낙 묘사가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에 내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로리가 마네뜨 박사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내가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것 같고, 루시가 오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릴 때는 그녀의 심정이 깊이 공감되어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가 하면 찰스 다네이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증거들로 공격받는 장면을 읽을 때는 재판장 안의 열기와 분위기, 재판을 구경하는(분명히 말하지만 방청이 아니라 '구경'이다) 사람들의 눈빛과 숨소리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재생된다. 루시와 그녀의 아버지인 마네뜨 박사가 이 재판에 원고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찰스 다네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이 때 이미 루시와 다네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데 찰스 다네이의 변호사로 같은 재판에 참석한 시드니 칼튼 역시 이 때부터 루시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 하는가!

 

 마네뜨 부녀가 찰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는 하지만(그리고 마네뜨 부녀는 어떻게든 찰스를 변호해주려고 애썼다) 사실 증거같지도 않은 엉터리 증거여서 머리 좋은 시드니의 기지로 찰스는 무죄 방면되었다. 영국인인 시드니와 프랑스인인 찰스는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얼굴이 닮았는데, 시드니가 이 점을 이용해서 찰스를 모함한 첩자들의 증언을 무력화한 것이다. 자칫 사형당할 수도 있었던 위험에서 찰스는 시드니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십여 년 후 또다시 시드니 덕분에, 게다가 반역죄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똑 닮은 얼굴을 이용해서 목숨을 건지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디킨스의 또 다른 장점이 나온다. 바로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 소설에는 마네뜨 부녀와 로리, 찰스, 시드니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시드니의 동료 변호사인 '섬세한 남자' 스트라이버, 텔슨 은행의 심부름꾼인 제리, 루시의 헌신적인 하녀인 미스 프로스, 마네뜨 박사가 프랑스에서 살 때 부렸던 하인이자 현재는 파리의 생앙투안 거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드파르지와 그의 아내 마담 드파르지, '자크'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고통받는 민중과 방장스, 미스 프로스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살러먼 등등, 과연 이들이 서로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씨줄과 날줄을 엮듯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디킨스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앞에서 무심하게 읽어넘겼던 대화가 뒤에 가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인물의 존재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하나의 사건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뒤에 일어날 다른 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그렇다. 오랫동안 이어진 귀족 계급의 횡포가 낳은 결과가 바로 프랑스 혁명이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그 횡포의 또다른 결과로 마네뜨 박사가 자기 손으로 사위인 찰스의 고발장에 서명한 꼴이 되어 버렸다. 마네뜨 박사는 오래 전 찰스의 숙부인 에버몽드 후작이 저지른 죄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의 독방에 18년이나 갇혀 있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버몽드 후작의 가문과 그 자손까지 고발한다는 내용의 고발장을 써서 숨겨두었는데, 이것이 훗날 혁명당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찰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찰스는 자신의 가문에 회의를 느끼고 영국으로 망명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지 오래였으나, 이미 귀족의 피맛에 깊이 중독된 프랑스 민중 앞에서는 그런 근면성실함 따위는 아무 소용 없었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 계급을 내세워서 온갖 죄를 짓고도 잘못을 몰랐던 조상을 둔 죄로 그는 석방된 지 몇 시간만에 다시 재판정에 세워져서 24시간 이내에 단두대의 칼날 아래에 목을 들이대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은 그의 앞에 시드니 칼튼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신이라 해도 찰스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시드니는 영국의 첩자였던(찰스를 반역죄로 모함했던 바로 그 첩자) 간수를 위협해서 찰스가 갇혀 있는 독방으로 들어와서는 옷을 바꿔 입고 그를 약으로 재웠다. 감옥으로 들어올 때 이미 아파서 곧 쓰러질 것처럼 연기했기 때문에 간수가 잠든 찰스를 업고 나가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똑 닮아서, 그 눈썰미 좋은 마담 드파르지마저 시드니를 보고 찰스와 똑같이 생겼다며 놀랐으니까.

 

 찰스를 잠재우기 전 시드니는 루시에게 보내는 편지를 찰스더러 대신 쓰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시간도 없지만 시드니가 신파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어서 편지는 몇 줄 뿐이었다. '오래 전 당신에게 했던 맹세를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자기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여겨 사랑하는 여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던 시드니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루시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것이 루시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일인데도. 후에 프랑스 민중의 입에 회자된 것처럼, 시드니는 성자와 같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 피의 복수가 무고한 이들의 생명까지 집어삼키는 참혹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살았다. 18년의 억울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마네뜨 박사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외동딸 루시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 먼발치에서 손키스를 보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루시를 살게 한 것은 딸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찰스가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감옥에서 1년이 넘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미스 프로스는 사랑하는 마네뜨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담 드파르지를 쏘아 죽였다. 늘 아내 탓만 하는 제리도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 남자, 시드니 칼튼은 루시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죽지 못해 살던 그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 또한 사랑이었으니, 비록 보답받지 못할지라도 루시를 향한 사랑이 그의 삶을 밑바닥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지금까지 누렸던 어떤 휴식보다도 평안한 길'을 향해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리라.

 

 시드니보다 한 발 앞서 처형된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한낱 시골 마을의 재봉사에 지나지 않는 그녀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의 적'인 귀족을 동정하는 기색만 보여도 목이 날아가는 세상이었으니 세 치 혀로 죄 없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으나 그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혁명의 이면에는 그 당시 죽은 귀족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스의 아내와 딸까지 죽이려 하는 마담 드파르지의 무자비함, 항상 피에 굶주려 있는 자크 3호와 방장스의 모습, 단두대 앞에 모여 앉아 뜨개질을 하며 떨어지는 목의 숫자를 세는 여인들, 오늘은 단두대에서 몇 명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처럼 프랑스 전역에 퍼지고 많이 죽일수록 '기요틴이 일을 참 잘한다'며 좋아하는 일반 민중.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은 귀족 계급이 스스로 불러들인 필연적 결과이며,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을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세력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복수심에 매몰된 나머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잃은 인물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해 혁명세력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민중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몹시 씁쓸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탄압을 견디다 못해 저항하기 시작한 민중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서민의 목숨까지 뺏다니.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치닫는 혁명의 불길을 끈 것은 결국 나폴레옹 1세의 제정 수립이었다. 뿌리까지 썩은 나무는 마땅히 베어내야 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 심은 나무도 뿌리가 썩는다면 앞서 썩은 나무를 베어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긴 혼란기를 거친 현재의 프랑스는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니 '내가 죽어서 나같은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라던 어린 여자 재봉사의 죽음이 아주 헛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에 비해 시드니의 죽음의 의미는 조금 좁다. 그는 오로지 마네뜨 가족이 행복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죽었다. 그 가족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루시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루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기를,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눈물 흘리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그 여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단두대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루시는 말 그대로 세상의 전부였다. 자기가 죽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어두운 세상에 내려온 한 줄기 빛같은 존재. 그 빛이 꺼지면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해도 시드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귀한 생각을 할 리가 없고, 또 그는 영국인이므로 프랑스가 어떻게 되든 관심 밖인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영국 귀족이라면 프랑스 혁명이 영국 민중에게 미칠 영향이 두려워서라도 관심을 가지겠지만 시드니는 귀족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친구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생명은 귀한 법. 그 생명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바친 시드니 칼튼의 사랑은 더없이 고귀하다. 그 사랑이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경외심도 든다. 나라면 칼튼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내 것 하나 지키기도 힘든 요즘같은 세상에서 과연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소설은 시드니 칼튼이 죽음을 맞는 곳에서 끝난다. 지옥 같은 파리를 탈출한 루시와 그의 가족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드니가 자기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찰스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고 이는 루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전에 자신이 쓴 고발장 때문에 사위가 죽게 생기자 다시 정신을 놓아 버린 마네뜨 박사도 언제쯤 회복될지, 회복이 가능은 할지 장담할 수 없다. 미스 프로스는 마담 드파르지를 총으로 쏘면서 그 소리에 청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예전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 사랑이 그 가족 안에서는 끈끈하게 흐르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책을 펴낸 출판사에게 쓴소리 한 마디만 하고자 한다. 영문판과 번역판을 함께 묶은 구성도 좋고 번역도 괜찮고 책의 만듦새도 참 예쁜데, 교정이 엉망이다. 분명 인물이 하는 말인데도 마지막에 큰따옴표(")가 생략된 문장이 많고 오자와 탈자도 적지 않다. 인터넷이나 SNS는 몰라도 책에서는 '물어다 받친다' 같은 틀린 맞춤법이 나와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물어다 바치다'가 맞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400쪽이 넘는 책 곳곳에 이런 실수가 지뢰처럼 숨어 있어서 좀 그랬다. 앞으로는 편집과 교정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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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지음, 이수경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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