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보면 '이 책은 꼭 정복(?)하고 싶다!'는 일종의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대부분 두께가 상당하고 내용이 어려워서 왠지 이 책을 다 읽으면 굉장히 똑똑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장에 꽂아놓으면 괜시리 마음도 뿌듯하고 남들에게 내가 이런 책도 읽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뻐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지식에 대한 욕구도 한몫 한다. 어떤 분야든 한 가지라도 더 알고 싶은 욕망이 평소에는 잠자고 있다가 내용이 꽤 어려워 보이는 책이 눈에 띄는 순간 깨어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한 오프라인 서점에 갔다가 그런 책을 봤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4부작 시리즈 <중세>가 그것이다. 웬 백과사전처럼 생긴 책이 신간코너에 있기에 들춰봤는데 일단 엄청난 두께에 혀를 내둘렀고, 책 집필에 참여했다는 세계 석학 리스트에 경이를 느꼈다. 80,000원이라는 가격은 오히려 놀랍지 않았다. 내가 봐도 가격을 그 정도는 매겨야겠던데 뭐.

 

 

 

 

 

 

집필자 못지않게 역자의 이름도 많다. 1000년에 달하는 역사를 다루고 있는만큼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권이 나오기 전에 일독하고 싶은데 내 독서력으로 가능할지? ㅋㅋㅋ 독서 관련 저서들을 보면 책을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다고들 하는데 이런 류의 책은 그 동안 머리가 깨지도록 읽어온 게 아까워서라도 마지막 한 글자까지 다 읽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세계적인 비교종교학 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책도 만만치 않게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수년 전에 그의 저서 <신을 위한 변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책에 메모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난생 처음으로 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이슬람>은 적당한 두께의 소프트커버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 좋았는데 어쩐 이유인지 지루해서 중간에 덮었고, 지금은 종교의 역사를 다룬 <축의 시대>라는 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저자는 수녀원에서 7년간 생활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뛰쳐나온 뒤 세계의 여러 종교를 공부했고 평생에 걸쳐 연구를 해왔다고 한다. 그의 책을 다 읽어본 것도 아니고 읽은 책의 내용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신은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축이라는 것. 신의 실재나 서로 다른 종교의 상대적인 우월성에 대한 논쟁 자체가 애초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저자의 의도를 곡해했는지도 모르지만 작년 여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종교가 없으면 자신의 양심을 따라 살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생각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도 읽고 나면 굉장히 똑똑해질 것 같은 책 중 하나다. 역자 중 한 명인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이 우리 집에 있는데 이런 분이 번역에 참여했다면 한 번쯤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다 다르지만 번역서의 경우 역자의 명성과 업적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단 한 권이지만 최재천 교수의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이유로 한번 들춰본 적도 없는 <통섭>에 신뢰가 가는 것을 보면 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각 분야별로 전문화된 현대사회의 세태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방해한다고 지적했는데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분야에 정통한 것이 경쟁력이 되고 장점이 되는 세상이지만, 그만큼 내가 아는 분야와 관계가 없는 쪽에는 전혀 무지해서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을 갖기 어렵다는 부작용이 분명 있으니까. 내가 끊임없이 반성하고 돌아보며 스스로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편협함'이다. 지식의 편중, 사고방식의 편협함, 머릿속 지식을 삶의 지혜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좁은 마음. 별 수 있나. 계속 읽고 생각하고 배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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