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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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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였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잘 모르는 사람 뿐 아니라 그의 팬까지 혹하게 만드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쭉 읽어왔고, 그와 관련된 아주 조그만 사실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열혈 팬이다. 그런 내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서평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팬이라면 다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법이다.

 

 저자인 시모쓰키 아오이는 "추리소설 평론가라는 간판을 걸고, 추리소설을 논하면서 돈까지 받고, 추리소설을 수천 권이나 읽었으면서 크리스티 작품은 고작 일곱 편밖에 읽지 않았다."(9P)고 말하며, 그 이유를 "'크리스티는 이러저러하게 재미있다'라는 설명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10P)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크리스티의 팬을 자처하는 나 역시 누군가가 크리스티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미있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소설 곳곳에 단서와 복선을 심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설에 사용한 트릭을 한 문장(아오이의 기준으로는 15글자에서 30글자 이내)으로 요약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트릭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가 트릭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그 말에 발끈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추리소설에서 TRICK은 주로 범행 수법에 관한 속임수를 가리킨다. 즉 범인이 피해자를 어떤 방법으로 죽였느냐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힌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내용과 구성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트릭이 중요한 소설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MISDIRECTION, 독자의 시선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뛰어나다. 크리스티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도 모두 이런 식이다.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발표 당시 작가가 비겁하다는 비난까지 들었던 작품이라 다음과 같은 시모쓰키의 변론이 고마울 정도다.

 

 

 실로 대담하다. 트릭을 아는 상태에서 읽으면 작가도 아니면서 독자들에게 들통 나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발표 당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공정성 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단서를 이렇게 대담하게 심어놓았으니 나는 논의를 벌일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25P)

 

 

 한 마디로 독자가 크리스티의 교묘한 미스디렉션 기술에 속았다는 얘기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보니 크리스티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참 난감하다. 줄거리를 하자니 작품 전체를 스포일러할까봐 걱정이고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반전이 뛰어나다는 로는 사들의 흥미를 끌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라는 책의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 애거사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한 백여 편의 추리소설과 필명 메리 웨스트매콧으로 발표한 일반소설 여섯 편, 희곡 아홉 편까지 말 그대로 크리스티의 전작을 '스포일러 없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도 좋다. 5막으로 나눠서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 미스 마플 시리즈, 토미&터펜스 시리즈, 희곡, 시리즈 외 장편 순서로 소개하고 별점을 매겼다. 왜 이런 구성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는데 크리스티 초기작품은 대부분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하고, 마플은 크리스티 추리소설이 웬만큼 뼈대가 잡힌 뒤에 나왔기 때문에 꽤 유의미한 구성이라고 본다. 사랑스러운 사고뭉치 부부탐정 토미와 터펜스는 크리스티가 두 번째로 발표한 <비밀결사>로 마플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작품 수가 적고(장편소설 4권, 단편집 1권) 십수 년 간격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푸아로나 마플보다 덜 유명하다. 그래도 나는 토미와 터펜스를 굉장히낀다. <엄지손가락의 아픔> 서문에 크리스티가 독자들이 "토미와 터펜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라고 묻는다고 쓴 것을 보면 이 부부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지난 2월에 동숭아트센터에서 <비밀결사>를 모티프로 한 <경성특사>라는 뮤지컬을 공연해서 보러 갔었다. 할인내역에 크리스티 할인(10%)이 있어서 <비밀결사>를 가져갔는데 지하철에서 다시 읽어보니 토미와 터펜스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활기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터펜스는 토미 말마따나 냄새를 맡은 테리어 종 강아지처럼,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면 놓치지 않고 뒤쫓는 정열적인 여인이다.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을 아낌없이 깨부수는 여성들'이 크리스티가 지향하는 여인상인 듯하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에 공감한다. 얌전하고 수동적이며 인내심 강한 여성의 미덕을 내팽개친 터펜스, 프리랜서 가사노동자의 길을 개척한 루시(패딩턴발 4시 50분),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엘리너(슬픈 사이프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어머니의 결백함을 밝히려 하는 칼라(다섯 마리 아기돼지) 등등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크리스티 작품에 많이 나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남성에 종속되기를 강요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표현되는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성공한 애거사 크리스티야말로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자는 연애소설이나 쓰라"는 세간의 비난에 항의하듯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여섯 편도 하나같이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정치, 전쟁 등 이른바 남성의 영역에 비해 사소한 주변부로 여겨지는 연애/결혼/가정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여성작가의 시선으로 탐구한 여성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그린 수작들이다. 특히 저자는 메리 웨스트매콧의 세 번째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를 별 다섯 개(읽지 않고 넘어가면 안 된다. 뛰어가서 사올 것.)를 매기며 반드시 읽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가득한 죽음이 닥칠 것"(438P)이라고 겁을 준다.

 

 

 이제 군말은 그만 두겠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장인'이라는 그릇에서 넘쳐흐른 '크리스티'가 더없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결정을 이룬 걸작이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441P)

 

 

 메리 웨스트매콧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은 포레에서 좋은 번역으로 전권 출간했으니 크리스티에게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보시기를. 나도 마지막 작품 <사랑을 배운다>를 빼고 다 읽었는데 좋은 작품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을 배운다> 역시 별 네 개짜리 걸작이다.

 

 시모쓰키는 크리스티가 쓴 희곡들도 모두 읽었다. 아직 크리스티의 희곡은 구경조차 못나로서는 무척 부러운 일이다. 그는 크리스티가 연극적 연출에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한다. 추리소설 걸작들에 연극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이 많고, 아홉 편의 희곡도 두 편 빼고는 모두 걸작이라며. 추리소설 평론가의 글을 읽으니 이런 점이 좋다. 걸작이 왜 걸작인지, 졸작은 왜 졸작인지 다 설명해준다. 다소 미숙했던 데뷔 초기의 크리스티가 성숙해가는 과정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보여주고 말이다. 그가 졸작이라고 한 크리스티 작품은 대개 국제음모와 비밀기관이 등장하는 스릴러물인데, 나도 그런 작품들은 재미없어서 읽다 말았거나(ex:그들은 바그다드로 갔다), 완독했어도 기억에 남지 않아서(ex:빅 동의할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 스파이를 잡으려고 종횡무진하는 토미와 터펜스의 모험담인 <N 또는 M>은 시모쓰키도 나도 걸작이라 생각하는 예외적인 작품이지만 그렇다 해도 애사 크리스티는 스릴러에는 영 소질이 없다. 본인은 스릴러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 예를 들면 <누명>, <리스터데일 미스테리>, <쥐덫>, <비둘기 속의 고양이> 등을 시모쓰키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분석한 부분도 흥미롭다. 장르소설은 취향이 갈리기 마련이므로 내가 걸작이라고 여기는 작품을 남이 평작이졸작으로 여긴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 (세계 3대 추리소설로 불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조차 별로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봤다.) 반대로 나는 그냥 그랬던 <서재의 시체>, <주머니 속의 호밀>,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를 시모쓰키가 걸작으로 평가한 이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거의 잊었었는데 이게 왜 걸인지 설명한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평작인 <서재의 시체>, <주머의 호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들은 다시 읽으려고 목차에서 제목을 찾아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두었다.

 

 자, 이쯤에서 시모쓰키 아오이가 뽑은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베스트 10을 보자.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541P)

 

 

 의외로 세계적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목록에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ABC 인사건>의 명성에 가려서 알려지지 않은 걸작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유명한 크리스티의 작품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시모쓰키그 작품들에다가 별 네 개(추리소설 역사에 남을 걸작)를 매겼다. 나도 기존 베스트 10보모쓰키 베스트 10에 오른 작품들을 더 좋아해서 반갑다. 특히 <커튼>은 더 이상의 가 필요없는 걸작이다. 그러나 크리스티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중으로 미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 에르퀼 푸아로가 사망하기 때문이다......

 

 시모쓰키 베스트 10에 없는 작품들 중에도 뛰어난 소설이 많다. 이 책에 작품별, 탐정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별점이 높은 순서대로 골라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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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31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낯가림이 무기다 - 소리 없이 강한 사람들
다카시마 미사토 지음, 정혜지 옮김 / 흐름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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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을 가리는 성격은 살면서 불편할 때가 많다. 일단 처음 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낯선 장소나 분위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래 되어 익숙한 공간에서도 영 친해지기 어려운 부류가 있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지금 직장을 4년째 다니고 있지만 남자 직원들에게는 여전히 낯을 가려서 업무 외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전에 함께 근무했던 어떤 원과회사에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아침에 인사하는 것조차 어색했었다. 그도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내가 먼저 인사를 해도 받아주는 건지 안 받아주는 건지 긴가민가했기에 더 어색했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은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게 더 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색해하는 혼자 밥 먹기나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카페에서 차 마시기 등을 별 어려움 없낸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다니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혼자 뭔가를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기에는 손님이 붐비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관객이 많은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사람이 무척 많다.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공부를 하던 책을 읽던 창 밖을 보며 각에 잠겨 있던)은 더 많다. 말하자면 낯가리는 성격은 의외로 흔한 성격이며, 사람이 가진 여러 특성 중 하나일 뿐 문제가 있다거나 잘못됐다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낯선 사람과 어울리거나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장소에 있어야 하는 일이 많은 세상이다. 농경사회는 자기가 태어나 자란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옮기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현대사회는 이사도 자주 다니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잦다. 자연히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한 사람을 우대하기까지 한다. 나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사회구조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불편하기만 하면 그럭저럭 살겠는데 이런 성격을 문제가 있다는 듯이 치부하는 시선 때문에 더 힘들다. 뭔가 내 성격에 큰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끼면 그 순간부터 자존감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이런 성격이 어때서? 낯가리는 성격 때문에 불편한 남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라고 항변하기도 하지만 내 주장을 내세우기 어려워하는 성격인 탓에 말은 못한다.

 

 아무튼 나는 우리나라만 낯가리는 사람이 살기 힘든 나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일본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낯가림이 무기다>라며 낯가리는 성격을 잘 활용하자는 책까지 나온 걸 보면 말이다. 이런 류의 자기계발서는 성격을 바꾸기를 권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하는 어투일 때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럴 필요는 없다면서 낯가리는 성격을 즈니스나 넓은 대인관계에서 활용하는 실제적인 기술들을 알려준다. 무척 현실적이다.

 

 사실 사람이 성격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낯을 가리건 오지랖이 넓건 모든 성격에는 장단점이 있고 어느 정도는 타고난 기질도 있다. 타고나기를 다혈질이어서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백날 잔소리를 해보았자 조금 나아질 수는 있어도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낯가림도 80%는 타고난 기질이기 때문에 바꾸려고 노력해도 별 소용이 없다. 차라리 이 의 저자처럼 '관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낯가리는 성격의 장점을 활용해서 사람들의 특을 파악한 다음 내 뜻에 맞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편이 훨씬 낫다. 성격을 바꾸려고 마음 고생이나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일도 내 뜻대로 되고, 일석이조다.

 

 

 낯을 가리는 사람 중에는 '나는 커뮤니케이션이 서툴기 때문에 영업이나 판매, 접객 등은 절대로 맞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의 포인트는 뛰어난 말주변이 아닙니다.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중이 있느냐 없느냐는 상대에게도 반드시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 <비법 19 : 비위 맞추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을>, 124~125페이지 -

 

 

 저자인 다카시마 미사토가 공개한, 낯가림을 무기로 활용하는 36가지 비법의 기본 바탕'상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서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디까지나 앞에 나서기 어려워하는 성격을 보완하기 위함이어야지, 남을 '이용'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법한 여러 가지 비법 소개도 좋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존중과 관심을 강조하는 게 이 책의 가장 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쉽게 읽히는 것도 좋은 점이다. 나는 책을 좀 느리게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사흘도 안 렸다. 크기가 작고 얇아서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문체가 마음에 든다. 친절한 선생님처럼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문체라서 읽다 보면 기분이 편해진다. 예전에는 이런 문체가 지루했는데 요즘은 좋다. 나이가 들었나.

 

 단점은 책값이 비싸다는 점. 정가는 11,500원이고 알라딘 판매가는 10,350원인데 내용이 좋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간, 줄간격, 여백을 좀 줄였으면 책이 훨씬 얇아져서 가격이 내려갔을 텐데. 그래서 별 하나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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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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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이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은지는 꽤 오래 되었다. 지금 고3인 막내동생이 중학생 때 돈을 모아서 내 아이디를 빌려 샀다고 했으니까 3, 4년은 족히 됐을 것이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항상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데다, 어린이 및 청소년 필독도서목록에도 빠지지 않고 오르는 책이라 동생이 사기 전부터도 제목은 잘 알고 있었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가끔 들춰보곤 했지만 왠지 내용이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번번이 내려놓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렇게 빛이 바랜 채 기억상자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이 책을 꺼내든 계기는 다름아닌 '책'이었다. 신영복 선생의 <담론>에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이 강제로 이주당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 용돼 있다. 이주 과정에서 체로키 인디언의 3분의 1이 죽어나간 탓에 '눈물의 여로'라고 불린 이 사건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으나 죽은 가족을 껴안고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백인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원문을 일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낭만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 <과거를 알아두어라>, 75페이지 -

 

 

 1838년에서 1839년에 걸쳐 1만 3천여 명의 체로키 인디언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체로키 인디언의 고향인 테네시 주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는 오클라호마 주까지는 1,300킬로미터. 어린이와 노인, 병자를 포함해 4천 명이 넘는 인디언이 행로 중에 어서 낯선 땅에 묻혔다.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것은 머나먼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으건너온 백인들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주인공 '작은 나무'의 조부모는 이주 당시 산 속으로 도망쳐 고향 땅에서 살아남은 체로키 인디언의 후손이다. 그들은 다섯 살 난 손자에게 체로키 인디언의 역사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가르쳤다.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 자기 종족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될지도 모르는 법."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족이라고 무시했지만, 인디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책을 썼다면 포리스트 카터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민족의 수난을 기술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단어와 수식을 동원해 울분을 토하고 두 번 다시 이런 을 당하지 않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함을 잃지 않는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제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조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작은 나무'의 어린 시절이 읽는 이의 영혼까지 포근하게 감싸준다.

 

 또한 책 곳곳에 어린아이의 맑고 순수한 영혼이 묻어 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하면서 동시에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이야기가 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낸 것도 개울을 따라 올라가던 중이었다. 그곳은 약간 산허리 쪽으로 올라선 곳에 있었다. 그곳은 월계수로 빙 둘러싸인 채 늙은 미국풍나무 한 그루가 굽어보고 있는, 그다지 넓지 않은 풀밭이었다. 그곳을 본 순간 나는 그곳을 나만의 비밀 장소로 삼기로 작정했다. 그 뒤로 나는 심심하면 그곳에 들르곤 했다. (중략) 하지만 비밀 장소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자 우연이긴 하지만 나한테도 비밀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그럴 수 없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 <나만의 비밀 장소>, 103~104페이지 -

 

 

 사람들 대부분이 '작은 나무'와 같은 경험이 한두 번은 있지 않을까?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건물 틈의 어두컴컴한 구석을 발견하고는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해서 구슬이나 공깃돌, 만화카드 등을 감춰두었던 추억 말이다. 나는 이런 비밀 장소를 찾으면 주로 혼자 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지곤 했다. 지금은 공상을 해도 조용히 머리로만 하지만 어릴 땐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만 아는 비밀 장소니까 누가 들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안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이나 학교에서 비밀 장소와 그곳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그 때는 왜 그런 일들이 그렇게도 즐거웠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일로 행복을 느꼈던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그 추억의 한 조각을 이 책을 읽다가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메말라가는 영혼에 한 모금 샘물을 떠 넣어주었다고 할까? 스스로 비밀 장소라 해놓고 결국 비밀을 지키지 못해서 할머니에게 고해 버린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많이 웃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말미에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의 지혜가 전해진다.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 <죽음의 노래>, 338페이지 -

 

 

 체로키 인디언들이 다음 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답게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작은 나무' 가족의 친구인 윌로 존은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이 죽으면 소나무 옆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몸이 2년치 거름은 될 거라면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은 죽음까지도 자연 친화적이었다. 오랜 세월에서 우러난 지혜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이 자연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섯 살에 고아가 되어 조부모에게 맡겨진 '작은 나무'는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조부모마저 잃고 서쪽의 인디언 연방으로 떠났다. 집에서 기르던 리틀레드와 블루보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와 함께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리틀레드는 빙판을 잘못 밟는 바람에 시냇물에 빠져 죽었고, 블루보이는 늙고 병들어 '작은 나무'가 만들어준 자기 무덤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혼자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인간이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작은 나무'는 결국 인디언 연방에 도착했을까? 그곳에는 인디언 연방이 없는데...... 담요처럼 포근했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마지막 구절을 옮겨 적어본다.

 

 

 블루보이는 코가 발달되어 있으니까 아마 지금쯤 벌써 고향산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블루보이라면 문제없이 할아버지 뒤를 따라잡을 것이다.

 

                                                                                        - <죽음의 노래>, 341페이지-

 

 

 '작은 나무'는 항상 키가 큰 할아버지의 걸음을 따라 잡으려고 애썼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자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던 할아버지처럼 '작은 나무'도 어린 생명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훌륭한 체로키 인디언으로 성장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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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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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포털사이트 다음의 '뉴스펀딩'이라는 코너에서 무척 가슴 아픈 기사를 읽었다. 지리산으로 방사되었던 어느 6년산 반달가슴곰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반달가슴곰은 북한에서 어렵게 들여온 대한민국 토종으로, 죽기 1년 전에는 건강한 새끼를 출산했던 어미곰이었다. 2007년과 2008년에 두 번이나 올무에 걸려서 죽을 뻔한 것을 구출해서 치료한 뒤 다시 방사했는데, 2010년 6월 또다시 야산 근처 농가에서 설치한 올무에 걸려서 결국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죽고 말았다. 살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올무가 연결된 통나무까지 뽑혀 있었단다.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온몸에 올무를 칭칭 감은 곰이 나무 위에 매달려 축 늘어진 영상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곰은 위기에 처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5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이 땅에 사는 동물들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는 것 같다. 야생 동물들이 농사를 '방해'하고 농작물을 '훼손'해서 올무를 설치할 수밖에 없다는 농민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동물이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가끔 인도나 부탄 같은 나라에서 코끼리 떼가 사람이 사는 마을을 습격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땐 그 코끼리들이 미쳤는갑다 싶지만 전후 사정을 알고 보면 99.9%는 습격을 당한 마을 사람들이 코끼리들을 못살게 군 전력이 있다. 밭을 일구기 위해 코끼리의 서식지를 침범했거나 심어놓은 농작물을 망쳤다고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였거나 등등.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고 자연에게 저지른 죄는 반드시 돌려받게 되어 있음이다.

 

 물론 농민들에게도 땅을 경작해서 얻은 작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다. 그 작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킬 권리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생존을 위협할 권리는 없다. 사람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단이 많지만 동물은 원래 먹고 살도록 타고난 것을 먹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길이 없다. 멧돼지나 너구리가 사람에게 앙심이 있어서 애써 가꾼 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서식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본능이 이끄는대로 살 길을 찾아 내려오는 것이다. 가을이면 사람들이 산에 있는 도토리를 싹 쓸어가는 바람에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 식량을 구하러 산 밑으로 내려왔다가 차에 치어 죽는 일은 너무 흔해서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다.

 

 동물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 동물 없이 사람들만 지구에서 살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 것이다. 알지만 마음이 불편하니까 애써 외면하고 우리도 살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므로 누굴 비난할 자격도 없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공존이 어려운 이 현실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를. 먼 옛날의 인류는 굳이 방법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주 당연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수천 년을 살았다. 그 때의 인류는 가능했던 일이 왜 지금은 어려운 것일까? 인류가 지구를 떠나 어디 다른 행성에 정착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이 책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환하게 웃는 라다크 사람들의 사진이 여러 컷 실려 있다. 그 사진들을 보면 따로 거울을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겠다 싶을 만큼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떠오른다. 서구식 개발붐이 일어나전의 라다크 사람들은 늘 그런 웃음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인도의 라다크 지역 거주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이 책의 저자는 16년 동안 라다에서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본 사람이다. 야크털로 을 해입고 꼭 필요한 만큼의 농지만 경작하며,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는 반드시 신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라다크의 전통이었다. 한 집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남녀와 노소, 족과 이웃의 구분 모두가 함께 돌보고 열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도 농사일과 가축 돌보는 일을 도우면서 협동심과 책임의식을 배웠다. 여자라고 해서 집안일만 하지 않고 남자라고 해서 바깥일만 지 않았다. 여자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논밭에 물을 대고 남자도 야크털에서 실을 자아내어 옷을 지입는 것다크 사람들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이 티베트에서 전수받은 대승불교 신자지만 소수인 이슬람교도, 기독교도들과도 상부상조하고 때로는 혼인관계까지 맺으면서 잘 지냈다. 종교 분쟁, 양성 갈등, 빈부 격차의 심화, 환경 파괴, 소수자 차별 따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삶의 방식그들은 20세기까지도 유지해왔던 것이다.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이를 중재해주는 마을의 큰어른 같은 사람이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이 각자의 책임을 인정하고 좋게 합의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어서 남이 기분 상할만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았다. 당연히 증오나 원한으로 인한 범죄도 없고 계급이 존재하기는 해도 그 차이가 크지 않아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지사. 책에 실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라다크 사람들의 밝고 자연스러운 웃음은 이러한 자부심과 확고한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다. 억지스럽고 때로는 불쾌한 코미디나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음을 얻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라다크의 장점만 잔뜩 써놓았지만 그 사회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기후 때문에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고(15%) 평균수명이 현대화된 사회보다 낮으며, 문맹률도 높다. 우리가 편의시설이라고 부르는 난방장치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해발 1만 2000미터의 고원에서 척박한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온 라다크 사람들은 생각보다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가스보일러나 히터같은 현대적인 난방장치가 없을 뿐이지 동물의 배설물을 말려서 난로에 넣어 태우는 식으로 겨울을 날만큼 자연환경을 체화한 것이다. 평균수명이 낮은 대신 라다크의 노인들은 젊은이들 못지않은 건강을 평생 유지하며 암이나 당뇨같은 질병은 알지도 못하고 농경과 가축 기르기가 중심인 사회의 특성상 죽을 때까지 할일이 있다. 삶의 질이 높다는 뜻이다. 영유아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고 개선해야 할 점이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죽음을 비극으로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불교의 윤회사상의 영향이기도 하고, 죽음을 자연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이 강해서 죽은 아이가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거라는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보기에는 아이들이 곧잘 죽고 오래 살지도 못하고 기름보일러조차 없는 라다크가 낙후된 사회, 뒤떨어진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낙후된 면'에 대한 대안이 없다면 모를까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라다크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약점을 보완하면서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라다크 주민의 대부분은 글을 모르지만 공동체 전체의 사안에 대해서 얼마든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거나 지배계층에게 착취당하는 것은(애초에 지배계층 자체가 없는 것 같지만) 라다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서로 협력하면서 가족과 이웃들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이루는 것. 오늘날 우리가, 그리고 현재의 라다크 사회가 잃어버린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라다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가치관에서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왜 인류는 동물과, 나아가 자연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가? 해답은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다'는 데 있다. 정확히는 '개발된 현대사회에서 사는 일부의 인간'이 자연스러움을 잃었기 때문이다. 개발은 자연을 싸워서 이겨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해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산을 깎아 터널과 도로를 만들고, 물길을 바꾸고, 온갖 폐기물과 쓰레기를 파묻어서 토양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발전'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싼 다음 라다크처럼 현대화되지 못한, 그러나 개발 없이도 수천 년간 유지해온 사회에 강제로 들이미는 것이 문제인 거다.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개발의 결과로 우리는 라다크 사람들보다 훨씬 잘 살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물질적인 면이나 생활의 편리성에서는 그들보다 앞서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전통사회의 라다크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병을 전혀 몰랐고, 저자에게서 서구사회에는 그런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왜 사람의 마음에 그런 병이 생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다크의 전통사회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강박장애 등 현대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명상이나 자연수련 등으로 얻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그들에게는 일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저자는 라다크의 전통 생활방식이 바뀌는 것도 안타까워했지만 무엇보다 라다크 사람들이 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열등감과 자기 부정에 시달리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부를 축적할 줄 모르던 사람들이 한순간 자본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내가 남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신경쓰기 시작했고 현대화의 어두운 면은 전혀 모른 채 서구식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전통과 옛 가치관은 낡아서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해 버렸다. 술을 담그고 남은 찌꺼기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던 라다크 사람들이 썩지 않는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내놓기 시작하면서 환경이 파괴되고, 무분별한 건축과 도로 건설로 동식물의 서식지가 줄어들었다. 책이 출간된 2007년까지도 도심에서 먼 지역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저자는 썼는데 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여러 NGO 단체와 라다크의 지성인들이 진행하는 '라다크 프로젝트'가 계속 성과를 거두고 있어야 할 텐데.

 

 현대화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개발을 잠시만 늦추고 우리가 괴롭혀온 자연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논리에 밀려서 외면받고 있을 뿐 라다크에 전기와 석유 대신 태양열 에너지를 사용하는 건물을 짓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과 친해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먹을 것과 집 짓는 재료, 난방연료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었고 필요한 만큼만 썼으며 그래도 남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재활용을 했다. 누가 가르쳐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이다. 자연스러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그것도 혹시 자연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주장에 공감한 이유는 그가 나보다 많이 배우고 더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문제삼은 것들을 나도 몇 년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무분별한 개발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 문제 뿐 아니라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문명인인 우리가 소위 비문명인인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없는 정신적인 문제들을 겪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개발이, 현대화가, 문명사회가 그토록 풍요롭고 무결점하다면 우울증으로 자살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비극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끼며 살아도 빈부의 격차는 커져만 가는데, 뉴스에서는 상반기 무역흑자를 얼마 달성했다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나 떠들어댄다. 국민 전반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너무 당연해서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우러러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일방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개발 논리에 물든 사고방식에서 먼저 벗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처음엔 페이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리뷰가 돼 버려서 카테고리를 바꿨다.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 남아 있었던 한 챕터와 에필로그까지 다 읽었고, 점점 극으로 치닫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힌트도 어느 정도 얻었다. 저자처럼 국제 NGO를 결성해서 여러 나라를 오가며 강연활동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점을 알리고 함께 생각을 바꿔 나가자고 권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높디높은 산도 결국은 작은 모래와 흙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행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웰빙이나 유기농식품, 자연치료법 등 자연적인 것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이 흐름을 한 차원 높여서 계속 이어간다면 분명 개발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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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 전2권 (한글판 + 영문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 영문판) 16
찰스 디킨스 지음, 바른번역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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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찰스 디킨스"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이름도, 작품도 유명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 캐롤>과 <올리버 트위스트>를 몇 번이나 읽었다. 비록 어린이용 축약본이긴 했지만 내용과 분위기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기억에 따르면 두 작품 모두 18세기 영국이 배경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디킨스 본인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그의 작품은 대부분 서민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두 도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혁명 직전 프랑스 국민들의 비참한 삶과 고통, 동시대 영국 런던의 풍경과 사회 분위기가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재미있다. 정말 매우 재미있다.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기분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고, 귀차니즘의 화신인 나를 리뷰까지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매우 단순하다. 작년 하반기부터 뮤지컬을 보러 다니면서 좋아하는 배우가 생겼는데, 이 배우가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초연과 재연에 연달아 시드니 칼튼으로 출연했었다. 공연 장면이 영상으로 남지 않는 뮤지컬의 특성상 그의 예전 출연작들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원작이라도 섭렵하고자 처음 고른 책이 이 <두 도시 이야기>였다. 따라서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읽었는데도 마지막에는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으니, 역시 고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시대를 초월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소설의 도입부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바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의 거리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디킨스가 워낙 묘사가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에 내가 작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로리가 마네뜨 박사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는 내가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있는 것 같고, 루시가 오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릴 때는 그녀의 심정이 깊이 공감되어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가 하면 찰스 다네이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증거들로 공격받는 장면을 읽을 때는 재판장 안의 열기와 분위기, 재판을 구경하는(분명히 말하지만 방청이 아니라 '구경'이다) 사람들의 눈빛과 숨소리까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재생된다. 루시와 그녀의 아버지인 마네뜨 박사가 이 재판에 원고측 증인으로 출석하여 찰스 다네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이 때 이미 루시와 다네이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데 찰스 다네이의 변호사로 같은 재판에 참석한 시드니 칼튼 역시 이 때부터 루시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의 장난이라 하는가!

 

 마네뜨 부녀가 찰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고는 하지만(그리고 마네뜨 부녀는 어떻게든 찰스를 변호해주려고 애썼다) 사실 증거같지도 않은 엉터리 증거여서 머리 좋은 시드니의 기지로 찰스는 무죄 방면되었다. 영국인인 시드니와 프랑스인인 찰스는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얼굴이 닮았는데, 시드니가 이 점을 이용해서 찰스를 모함한 첩자들의 증언을 무력화한 것이다. 자칫 사형당할 수도 있었던 위험에서 찰스는 시드니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십여 년 후 또다시 시드니 덕분에, 게다가 반역죄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똑 닮은 얼굴을 이용해서 목숨을 건지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상상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디킨스의 또 다른 장점이 나온다. 바로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전개되는 이 소설에는 마네뜨 부녀와 로리, 찰스, 시드니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시드니의 동료 변호사인 '섬세한 남자' 스트라이버, 텔슨 은행의 심부름꾼인 제리, 루시의 헌신적인 하녀인 미스 프로스, 마네뜨 박사가 프랑스에서 살 때 부렸던 하인이자 현재는 파리의 생앙투안 거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드파르지와 그의 아내 마담 드파르지, '자크'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고통받는 민중과 방장스, 미스 프로스의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 살러먼 등등, 과연 이들이 서로 얼마나 연관이 있을까 싶을 만큼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씨줄과 날줄을 엮듯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디킨스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앞에서 무심하게 읽어넘겼던 대화가 뒤에 가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인물의 존재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하나의 사건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뒤에 일어날 다른 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그렇다. 오랫동안 이어진 귀족 계급의 횡포가 낳은 결과가 바로 프랑스 혁명이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그 횡포의 또다른 결과로 마네뜨 박사가 자기 손으로 사위인 찰스의 고발장에 서명한 꼴이 되어 버렸다. 마네뜨 박사는 오래 전 찰스의 숙부인 에버몽드 후작이 저지른 죄를 고발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 감옥의 독방에 18년이나 갇혀 있었다. 그 때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버몽드 후작의 가문과 그 자손까지 고발한다는 내용의 고발장을 써서 숨겨두었는데, 이것이 훗날 혁명당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찰스가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찰스는 자신의 가문에 회의를 느끼고 영국으로 망명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지 오래였으나, 이미 귀족의 피맛에 깊이 중독된 프랑스 민중 앞에서는 그런 근면성실함 따위는 아무 소용 없었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 계급을 내세워서 온갖 죄를 짓고도 잘못을 몰랐던 조상을 둔 죄로 그는 석방된 지 몇 시간만에 다시 재판정에 세워져서 24시간 이내에 단두대의 칼날 아래에 목을 들이대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히려 마음의 평화를 얻은 그의 앞에 시드니 칼튼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신이라 해도 찰스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순간에 시드니는 영국의 첩자였던(찰스를 반역죄로 모함했던 바로 그 첩자) 간수를 위협해서 찰스가 갇혀 있는 독방으로 들어와서는 옷을 바꿔 입고 그를 약으로 재웠다. 감옥으로 들어올 때 이미 아파서 곧 쓰러질 것처럼 연기했기 때문에 간수가 잠든 찰스를 업고 나가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처럼 똑 닮아서, 그 눈썰미 좋은 마담 드파르지마저 시드니를 보고 찰스와 똑같이 생겼다며 놀랐으니까.

 

 찰스를 잠재우기 전 시드니는 루시에게 보내는 편지를 찰스더러 대신 쓰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시간도 없지만 시드니가 신파를 즐기는 성격도 아니어서 편지는 몇 줄 뿐이었다. '오래 전 당신에게 했던 맹세를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자기 자신을 쓸모 없는 인간으로 여겨 사랑하는 여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던 시드니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루시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것이 루시의 남편 대신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일인데도. 후에 프랑스 민중의 입에 회자된 것처럼, 시드니는 성자와 같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 피의 복수가 무고한 이들의 생명까지 집어삼키는 참혹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 살았다. 18년의 억울한 수감생활로 폐인이 된 마네뜨 박사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외동딸 루시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 먼발치에서 손키스를 보내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루시를 살게 한 것은 딸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찰스가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감옥에서 1년이 넘게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미스 프로스는 사랑하는 마네뜨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마담 드파르지를 쏘아 죽였다. 늘 아내 탓만 하는 제리도 아들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준 남자, 시드니 칼튼은 루시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죽지 못해 살던 그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 또한 사랑이었으니, 비록 보답받지 못할지라도 루시를 향한 사랑이 그의 삶을 밑바닥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지금까지 누렸던 어떤 휴식보다도 평안한 길'을 향해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리라.

 

 시드니보다 한 발 앞서 처형된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한낱 시골 마을의 재봉사에 지나지 않는 그녀는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단두대에 올랐다. '혁명의 적'인 귀족을 동정하는 기색만 보여도 목이 날아가는 세상이었으니 세 치 혀로 죄 없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으나 그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혁명의 이면에는 그 당시 죽은 귀족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찰스의 아내와 딸까지 죽이려 하는 마담 드파르지의 무자비함, 항상 피에 굶주려 있는 자크 3호와 방장스의 모습, 단두대 앞에 모여 앉아 뜨개질을 하며 떨어지는 목의 숫자를 세는 여인들, 오늘은 단두대에서 몇 명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처럼 프랑스 전역에 퍼지고 많이 죽일수록 '기요틴이 일을 참 잘한다'며 좋아하는 일반 민중. 디킨스는 프랑스 혁명은 귀족 계급이 스스로 불러들인 필연적 결과이며,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을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세력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복수심에 매몰된 나머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잃은 인물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해 혁명세력의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민중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몹시 씁쓸했다. 욕하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탄압을 견디다 못해 저항하기 시작한 민중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서민의 목숨까지 뺏다니.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치닫는 혁명의 불길을 끈 것은 결국 나폴레옹 1세의 제정 수립이었다. 뿌리까지 썩은 나무는 마땅히 베어내야 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 심은 나무도 뿌리가 썩는다면 앞서 썩은 나무를 베어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긴 혼란기를 거친 현재의 프랑스는 살만한 나라가 되었으니 '내가 죽어서 나같은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어요'라던 어린 여자 재봉사의 죽음이 아주 헛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에 비해 시드니의 죽음의 의미는 조금 좁다. 그는 오로지 마네뜨 가족이 행복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죽었다. 그 가족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루시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루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기를,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눈물 흘리기를 바랐다.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기원하는 동시에 그 여인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소망을 담아 단두대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루시는 말 그대로 세상의 전부였다. 자기가 죽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어두운 세상에 내려온 한 줄기 빛같은 존재. 그 빛이 꺼지면 세상이 사랑과 평화로 가득 찬다 해도 시드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고귀한 생각을 할 리가 없고, 또 그는 영국인이므로 프랑스가 어떻게 되든 관심 밖인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영국 귀족이라면 프랑스 혁명이 영국 민중에게 미칠 영향이 두려워서라도 관심을 가지겠지만 시드니는 귀족도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했다. '친구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생명은 귀한 법. 그 생명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바친 시드니 칼튼의 사랑은 더없이 고귀하다. 그 사랑이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경외심도 든다. 나라면 칼튼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내 것 하나 지키기도 힘든 요즘같은 세상에서 과연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소설은 시드니 칼튼이 죽음을 맞는 곳에서 끝난다. 지옥 같은 파리를 탈출한 루시와 그의 가족들이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시드니가 자기 대신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찰스의 충격은 상당할 것이고 이는 루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전에 자신이 쓴 고발장 때문에 사위가 죽게 생기자 다시 정신을 놓아 버린 마네뜨 박사도 언제쯤 회복될지, 회복이 가능은 할지 장담할 수 없다. 미스 프로스는 마담 드파르지를 총으로 쏘면서 그 소리에 청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예전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 사랑이 그 가족 안에서는 끈끈하게 흐르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책을 펴낸 출판사에게 쓴소리 한 마디만 하고자 한다. 영문판과 번역판을 함께 묶은 구성도 좋고 번역도 괜찮고 책의 만듦새도 참 예쁜데, 교정이 엉망이다. 분명 인물이 하는 말인데도 마지막에 큰따옴표(")가 생략된 문장이 많고 오자와 탈자도 적지 않다. 인터넷이나 SNS는 몰라도 책에서는 '물어다 받친다' 같은 틀린 맞춤법이 나와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물어다 바치다'가 맞다.)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400쪽이 넘는 책 곳곳에 이런 실수가 지뢰처럼 숨어 있어서 좀 그랬다. 앞으로는 편집과 교정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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