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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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였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잘 모르는 사람 뿐 아니라 그의 팬까지 혹하게 만드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때부터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쭉 읽어왔고, 그와 관련된 아주 조그만 사실이라도 알고 싶어 하는 열혈 팬이다. 그런 내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서평집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팬이라면 다른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인물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법이다.

 

 저자인 시모쓰키 아오이는 "추리소설 평론가라는 간판을 걸고, 추리소설을 논하면서 돈까지 받고, 추리소설을 수천 권이나 읽었으면서 크리스티 작품은 고작 일곱 편밖에 읽지 않았다."(9P)고 말하며, 그 이유를 "'크리스티는 이러저러하게 재미있다'라는 설명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10P)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크리스티의 팬을 자처하는 나 역시 누군가가 크리스티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미있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소설 곳곳에 단서와 복선을 심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설에 사용한 트릭을 한 문장(아오이의 기준으로는 15글자에서 30글자 이내)으로 요약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트릭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가 트릭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그 말에 발끈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추리소설에서 TRICK은 주로 범행 수법에 관한 속임수를 가리킨다. 즉 범인이 피해자를 어떤 방법으로 죽였느냐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힌트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내용과 구성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트릭이 중요한 소설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MISDIRECTION, 독자의 시선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뛰어나다. 크리스티의 대표작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도 모두 이런 식이다. 특히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발표 당시 작가가 비겁하다는 비난까지 들었던 작품이라 다음과 같은 시모쓰키의 변론이 고마울 정도다.

 

 

 실로 대담하다. 트릭을 아는 상태에서 읽으면 작가도 아니면서 독자들에게 들통 나지는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발표 당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공정성 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단서를 이렇게 대담하게 심어놓았으니 나는 논의를 벌일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25P)

 

 

 한 마디로 독자가 크리스티의 교묘한 미스디렉션 기술에 속았다는 얘기다.

 

 아무튼 사정(?)이 이렇다보니 크리스티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참 난감하다. 줄거리를 하자니 작품 전체를 스포일러할까봐 걱정이고 단순히 재미있다거나 반전이 뛰어나다는 로는 사들의 흥미를 끌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라는 책의 존재가 참으로 귀하다. 애거사 크리스티 이름으로 발표한 백여 편의 추리소설과 필명 메리 웨스트매콧으로 발표한 일반소설 여섯 편, 희곡 아홉 편까지 말 그대로 크리스티의 전작을 '스포일러 없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도 좋다. 5막으로 나눠서 에르퀼 푸아로 시리즈, 미스 마플 시리즈, 토미&터펜스 시리즈, 희곡, 시리즈 외 장편 순서로 소개하고 별점을 매겼다. 왜 이런 구성인지 궁금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는데 크리스티 초기작품은 대부분 에르퀼 푸아로가 등장하고, 마플은 크리스티 추리소설이 웬만큼 뼈대가 잡힌 뒤에 나왔기 때문에 꽤 유의미한 구성이라고 본다. 사랑스러운 사고뭉치 부부탐정 토미와 터펜스는 크리스티가 두 번째로 발표한 <비밀결사>로 마플보다 먼저 데뷔했지만 작품 수가 적고(장편소설 4권, 단편집 1권) 십수 년 간격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푸아로나 마플보다 덜 유명하다. 그래도 나는 토미와 터펜스를 굉장히낀다. <엄지손가락의 아픔> 서문에 크리스티가 독자들이 "토미와 터펜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라고 묻는다고 쓴 것을 보면 이 부부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지난 2월에 동숭아트센터에서 <비밀결사>를 모티프로 한 <경성특사>라는 뮤지컬을 공연해서 보러 갔었다. 할인내역에 크리스티 할인(10%)이 있어서 <비밀결사>를 가져갔는데 지하철에서 다시 읽어보니 토미와 터펜스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었을 때도 변함없이 활기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터펜스는 토미 말마따나 냄새를 맡은 테리어 종 강아지처럼,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면 놓치지 않고 뒤쫓는 정열적인 여인이다. 시모쓰키 아오이는 크리스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을 아낌없이 깨부수는 여성들'이 크리스티가 지향하는 여인상인 듯하다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에 공감한다. 얌전하고 수동적이며 인내심 강한 여성의 미덕을 내팽개친 터펜스, 프리랜서 가사노동자의 길을 개척한 루시(패딩턴발 4시 50분),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엘리너(슬픈 사이프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어머니의 결백함을 밝히려 하는 칼라(다섯 마리 아기돼지) 등등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크리스티 작품에 많이 나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크리스티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이 경제적, 정신적으로 남성에 종속되기를 강요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표현되는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영국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써서 성공한 애거사 크리스티야말로 인생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자는 연애소설이나 쓰라"는 세간의 비난에 항의하듯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여섯 편도 하나같이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정치, 전쟁 등 이른바 남성의 영역에 비해 사소한 주변부로 여겨지는 연애/결혼/가정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여성작가의 시선으로 탐구한 여성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그린 수작들이다. 특히 저자는 메리 웨스트매콧의 세 번째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를 별 다섯 개(읽지 않고 넘어가면 안 된다. 뛰어가서 사올 것.)를 매기며 반드시 읽으라고 그러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가득한 죽음이 닥칠 것"(438P)이라고 겁을 준다.

 

 

 이제 군말은 그만 두겠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장인'이라는 그릇에서 넘쳐흐른 '크리스티'가 더없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결정을 이룬 걸작이다. 이 말이면 충분하다. (441P)

 

 

 메리 웨스트매콧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들은 포레에서 좋은 번역으로 전권 출간했으니 크리스티에게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사서 읽어보시기를. 나도 마지막 작품 <사랑을 배운다>를 빼고 다 읽었는데 좋은 작품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을 배운다> 역시 별 네 개짜리 걸작이다.

 

 시모쓰키는 크리스티가 쓴 희곡들도 모두 읽었다. 아직 크리스티의 희곡은 구경조차 못나로서는 무척 부러운 일이다. 그는 크리스티가 연극적 연출에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한다. 추리소설 걸작들에 연극 요소가 두드러진 작품이 많고, 아홉 편의 희곡도 두 편 빼고는 모두 걸작이라며. 추리소설 평론가의 글을 읽으니 이런 점이 좋다. 걸작이 왜 걸작인지, 졸작은 왜 졸작인지 다 설명해준다. 다소 미숙했던 데뷔 초기의 크리스티가 성숙해가는 과정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보여주고 말이다. 그가 졸작이라고 한 크리스티 작품은 대개 국제음모와 비밀기관이 등장하는 스릴러물인데, 나도 그런 작품들은 재미없어서 읽다 말았거나(ex:그들은 바그다드로 갔다), 완독했어도 기억에 남지 않아서(ex:빅 동의할 수밖에 없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독일 스파이를 잡으려고 종횡무진하는 토미와 터펜스의 모험담인 <N 또는 M>은 시모쓰키도 나도 걸작이라 생각하는 예외적인 작품이지만 그렇다 해도 애사 크리스티는 스릴러에는 영 소질이 없다. 본인은 스릴러를 좋아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 예를 들면 <누명>, <리스터데일 미스테리>, <쥐덫>, <비둘기 속의 고양이> 등을 시모쓰키는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분석한 부분도 흥미롭다. 장르소설은 취향이 갈리기 마련이므로 내가 걸작이라고 여기는 작품을 남이 평작이졸작으로 여긴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 (세계 3대 추리소설로 불리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조차 별로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봤다.) 반대로 나는 그냥 그랬던 <서재의 시체>, <주머니 속의 호밀>,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를 시모쓰키가 걸작으로 평가한 이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거의 잊었었는데 이게 왜 걸인지 설명한 부분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평작인 <서재의 시체>, <주머의 호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들은 다시 읽으려고 목차에서 제목을 찾아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두었다.

 

 자, 이쯤에서 시모쓰키 아오이가 뽑은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베스트 10을 보자.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541P)

 

 

 의외로 세계적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목록에 없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ABC 인사건>의 명성에 가려서 알려지지 않은 걸작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대중들에게 유명한 크리스티의 작품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겠지만 시모쓰키그 작품들에다가 별 네 개(추리소설 역사에 남을 걸작)를 매겼다. 나도 기존 베스트 10보모쓰키 베스트 10에 오른 작품들을 더 좋아해서 반갑다. 특히 <커튼>은 더 이상의 가 필요없는 걸작이다. 그러나 크리스티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중으로 미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 에르퀼 푸아로가 사망하기 때문이다......

 

 시모쓰키 베스트 10에 없는 작품들 중에도 뛰어난 소설이 많다. 이 책에 작품별, 탐정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별점이 높은 순서대로 골라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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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8 13: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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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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