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대학을 입학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1987년3월 대학을 졸업했다. 1980년에서 1989년까지는 파릇한 내 청춘기였다. 가장 피끓는 열정과 정의와 그리고 대학 현장과 이성에 대한 몽안의 시기였다. 그것은 저 산맥속에 묻혀 있는 다이아몬드와 같았다.


 1980년 초반과 중반기까지의 대학은 회색빛이었고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대학의 공기는 심각했고 짙은 중압감에 짓눌려 있었다. 대부분의 담론은 정치를 겨냥했고 인간이 서야 할 자리에 거대 이념의 패러다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젊었을 때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고 나이가 들어서도 사회주의자로 남는 사람은 머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386세대는 민주화에의 헌신, 탈인습적 가치관의 획득, 지식정보화의 선두주자 등의 성격으로 인해 21세기를 이끌어갈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에너지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류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한 당시 1981 년부터 1989년까지 서울대 학생들이 제출했던 생애사적 보고서인 (386세대, 그 빛과 그늘)<한상진 엮음, 2003> 을 다시 읽어 보면서 80년대 시대적 아픔과 그때의 대학생들의 진솔한 삶을 되새겨 본다.


   나는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할 처지였지만 막상 어디서 부터 시작할지 몰랐다. 친구들은 하나 둘 손안에 모래알처럼 내 곁을 떠났다. 일부 친구들은 낯선곳에 취직되었다. 작금의 청년실업에 따른 취직난의 심각성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개인 차원의 문제였다.


   30년이 지나 생각해보니, 1980년과 1987년은 나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이었다. 80년 5월을 거쳐 87년의 6월과 2014년 세월호를 거쳐 2016년의 촛불까지, 세월은 시대는 이렇게 흘러왔다. 우리는 6월항쟁으로부터 30년의 나이를 더 먹었다. 한때는 젊었으나 세월이 흘러 그때 혐오했던 기성세대들을 닯게 되었다.



   6월항쟁은 5.18과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한 축소 조작 사실이 폭로되면서 저항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이 정문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6.10항쟁의 시작이었다.


   386세대에게도 세월이 훑으고 간 흔적은 남아 있다. 그들이 민주화에 헌신하고 탈인습적인 가치관 변화와 정보화시대의 선두 주자로서 자기애적 몰아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의 경험적 급진성을 반성해야 했어야 했다. 더불어 군사정권으로부터 쟁취한 정치적 가치를 경제와 삶의 가치로 변환시키는 열정을 쏟아야 했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과거 민주화의 경력을 스펙 삼아 그들의 이전과 이후 세대들에게 좌장 대접을 받으려는 정신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타파하려 했던 기성세대를 닮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하고 구석구석의 모든 세대를 끌어 안을 자기 혁신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21세기의 급변하는 지정학적 한반도 상황과 이미 도착해 있을 융합시대를 이끌어 가는 동력의 세대로 더 우뚝 서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 뜨거웠던 6월!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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