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완역 난중일기 - 번역과 지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완결판, 개정2판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도서출판 여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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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웅이 빈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꿈을 꿀 권리가 있다. 혼자가 아닌 무리속에서 찾아낸 사명과 소명 의식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영웅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두 얼굴'은 이순신의 평범과 비범함을 의미한다. 


 1591년 2월 16일, 조선 조정은 시끄러웠다. 정읍 현감(면장,사무관,정6품)이던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소장급,정3품)로 파격 승진되었기 때문이다. 1592년 8월 27일의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맑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1592년 5월 2일 일본군이 서울 도착 후, 4개월이 못되어 명량 해전이 발발했다.


  7년전쟁(임진왜란)은 1592년에 개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2년만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실질적인 그의 명분은 10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배출된 무사들 때문이었다. 무사들의 실직으로 불만을 해결할 방도였다. 

  일본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는 첫째, 100여 년에 걸친 병사의 정예화. 둘째 정예병사에게 조총 지급(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총)되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목표는 명나라였다. 정명가도, 즉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이 길여 주는 것. 일본은 조선을 이용하여 명을 치려했고, 명은 조선을 이용해 일본을 막으려 했다. 일본군은 15만 8천 정도, 조선군은 17만 5천 정도였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 창건 이후 200년 만인 1592년 5월 2일 서울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일본군 병사들은 발들이 죄다 부르터서 걸음을 겨우 옮기는 형편이었다. 임금(선조)은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북쭉으로 피난 갈때 신하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흩어져 도망갔다.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임금이 북쪽으로 피신 할 때 이순신은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여수 바다에서 부하들과 선상 회의를 하며 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몸짓은 일본군에게 피바람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이순신은 출병일을 1592년 5월 4일로 잡았다. 

  명랑해전은 한산해전과 더불어 이순신 해전의 꽃이자 '7년전쟁'의 백미이다. 1592년 9월 16일의 날이 밝았다. 이순신은 투명한 하늘을 감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늘이 푸른만큼 적이 침입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이순신은 외로웠다. 이 많은 적선의 숲에서 자신이 탄 함선만이 외로이 분투하고 있었다.

  명랑해전은 전라도 연해안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에 벌어진 전투였다. '이충무공전서'의 '행록'에는 선박이 없는 민초들은 근처의 산에 올라가 전투를 관망했다라고 적혀있다.

  영화 '명량'의 '김한민(45)' 감독은 '최종병기 활'에서도 '두려움'에 대한 코드를 부각시켰다. 그는 전남 여수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 장군에 '체화'돼 있었다. 흥행은 사회적 사건이다. 영화 '명량'은 사회적 맥락 속에 들어가 있다. 대중은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 안에서 현재적 삶의 의미지를 찾는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명량'은 '우는 소리가 나는 물길'이란 뜻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던 맹골수도와 명량해전의 울돌목이 그리 멀지 않듯, 영화 속 역사는 우리에게 무척 가깝다. 조일전쟁(7년전쟁,임진왜란)이 끝난 뒤 공신 선정에 의병대 출신(곽재우,김덕령 등)을 철저히 배제한 것처럼 일제 치하의 독립 투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것도 닮은꼴이다. 진정 우려되는 것은 일본이 착실히 군사대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 2014.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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