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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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들』, 『사랑의 이해』, 『누운 배』 장편소설의 작가이라 머뭇거림 없이 읽은 장편소설이다. 기대한 것보다도 더 많은 기대를 흡족시켜준 작가라 작가의 다른 소설들까지도 궁금해진 작품이다. 진지하고 결연한 얼굴을 가진 준연은 40세 플루트 강사이다. 직장을 정리하고 좋아하는 작곡을 하고 연주도 하고 레슨도 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았던 어머니가 자궁암이라 치료해야 하는 근심까지도 준연의 삶에 자리 잡는다.

41세 정해원도 미혼이며 주식도 하는 직장인이다. 우연히 플루트를 수강하고자 준연의 학원을 찾으면서 레슨이 끝난 후 위스키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들을 통해서 해원은 강사와 더욱 친근해진다. 강사 준연의 오랜 친구인 조하진을 만나게 되면서 해원은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음악을 그만두고 홀로 위스키를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이다. 준연과 하진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 세명이 위스키를 마시며 나누는 장면들에서 우정과 사랑의 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해원의 감정들이 전해진다.

준연과 해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머니와 연락을 단절한 사연들이 있는데 나름의 사연들도 전해진다. 해원이 처음으로 위스키를 마시게 된 일을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집이 남들 눈에는 대궐 같은 집이겠지만 소굴 같은 집이었다는 것과 버티고 끝내 벗어난 것을 회상하게 된다. 책장에 가득한 세계문학전집은 끝까지 읽히지 않았고 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인용한 책의 문구만이 사업에 쓰임을 다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던진 세계문학전집에 어머니의 이마가 상처 입었던 일까지도 해원에는 두려움과 불안의 원천이 된다.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가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어린 자신이 가졌던 두려움에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모순적인 언행에 그는 어머니와 단절하게 된다.

남들 눈에는 대궐 같지만 실은 아버지의 소굴 갔던 집에서 버티고 끝내 벗어나게 해준 것도 ... 사랑이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핑크색 사랑이 아니었다. 피 같은, 선지색의 사랑이었고... 지독한 피로 끝에 고이는 단내 같은 사랑이었다. 181

사랑의 빛깔만큼이나 형체도 각양각색하다는 것을, 감정을 감지하면서도 시작을 두려워하는 이유들과 끝나버리는 이별을 먼저 떠올리는 40대 인물의 감정적인 동요들이 보인다. 사랑이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 사랑하는 사람처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에 도취된 해원의 사랑의 출발선을 세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이는 사랑에 대해서도 예리함으로 전해진다. 사랑은 명백해서 잔인한 것이라고 떠올린다. 사소한 기억이지만 아들의 기억에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버렸던 일이 소환된다. 어머니가 친구에게 반찬을 먼저 주는 행위를 보면서 사랑은 선별적이고 차별적인 것이며 잔인한 것이라고 힘주어 기억한다.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만큼 전혀 다른 무게이며 상태라고 힘겹게 그날을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 사랑은 투명했고 벌거벗은 자신을 비췄다고 기억한다. 사랑은 다채롭다. 빛깔도 다르지만 온도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다. 소설의 인물이 떠올리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어떤 존재였을지 서서히 한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결혼을 믿지 않는 이유까지도 선명해진다.

준연의 어머니가 젊은 날 아들에게 휴게소 음식을 죄와 결부하면서 사주지 않았던 일과 지금은 맛있게 휴게소 음식을 먹는 어머니를 보면서 해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인물들이 서로 위스키를 마시면서 대화 나누는 내용들이 결코 가볍지가 않다. 오랜 시간 숙성된 사랑들의 선명한 정의들이 되어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씩 들려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삶을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너무 깊게 관찰해서 시작조차도 어렵고 시작하면서도 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흉터가 많은 손을 가진 하진은 많은 일을 이미 겪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자초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되는 인물이다.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21호>에서 읽은 "손을 움직이는 방식은... 은연중에 진실을 드러낸다."라고 인터뷰한 잔 보그의 글이 생각난다. 정원사의 손, 제빵사의 손, 조련사의 손들이 영국 최고의 흑백 사진작가 티모시 부스의 작품을 통해서 감동을 주었다. "어떤 사람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과 직업을 통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인터뷰 글이 하진의 흉터 많은 손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소설이다.

짐작한 것보다도 더 깊은 시선, 생각한 것보다도 더 풍성한 대화들과 사유한 흔적들이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새롭게 정리하는 시간이 되어준 멋진 장편소설이다. 정략결혼하는 풍습까지도 작가는 매섭게 꼬집는다. 다들 자식을 팔고 있는 정략결혼처럼 해원이 하진을 팔 거냐고 질문하는 장면도 압도적이다. 이 대화와 질문을 부여잡으면서 누가 어떤 광인이었는지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위스키의 맛을 표현하는 문장들에 그맛과 향을 무한히 상상하게 하는 작가이다. 하나의 사랑을 느끼지 않고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여러 겹을 이루는 감정을 이렇게 잘 전달하며 묘사하는 장면들에 몇 번을 놀라워했는지 모른다.



사랑과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이 제법 눈에 띄는 시대이다. 트렁크 드라마에서도 다르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만큼 이 소설에서도 이들이 나누는 예리한 질문과 정의들을 오랜 시간 사유하도록 이끌었던 작가이다.


흉터 많은 그 손처럼 많은 일을 이미 겪었지만 그 어디에도 자초당하지 않은 사람 88

사랑이란 명백해서 잔인한 것이었다. 오래되고 사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179


어머니 / 분명하고 열렬하지만 그만큼이나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다. 사랑은 늘 오래된 것처럼 선명하니까.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삶과 죽음만큼 전혀 다른 상태, 다른 무게니까. 180


사랑은 투명했다.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나를 비췄다. 181

남들 눈에는 대궐 같지만 실은 아버지의 소굴 갔던 집에서 버티고 끝내 벗어나게 해준 것도 ... 사랑이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핑크색 사랑이 아니었다. 피 같은, 선지색의 사랑이었고... 지독한 피로 끝에 고이는 단내 같은 사랑이었다. - P181

다들 자식을 팔고 ...정략결혼... 결혼부터 은행이 시켜주는 거라고들 하잖아요...준연은 나를 직시했다. 해원씨는 하진을 팔 건가요? - P220

착한 아들 노릇을 했던 것도 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가엾게 여겼으니까,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할 만큼 했고 날 위해 살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걸 위해... 이 나이가 돼서야 뒤늦게 - P174

소중함이란 말 역시 경험을 필요로 했다. - P137

우리는 한 인생에서 오직 한 사람만 될 수 있어요. - P214

흉터 많은 그 손처럼 많은 일을 이미 겪었지만 그 어디에도 자초당하지 않은 사람 - P88

사랑이란 명백해서 잔인한 것이었다. 오래되고 사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 P179

어머니 / 분명하고 열렬하지만 그만큼이나 선별적이고 차별적이다. 사랑은 늘 오래된 것처럼 선명하니까.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삶과 죽음만큼 전혀 다른 상태, 다른 무게니까.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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