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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평점 :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 글을 읽었다. 작가가 어떤 상황에서 집필한 소설이었는지도 들려주었기에 펼친 작품이다. 부르면 찾아가는 게 내 일이라고 말하는 화자가 있다. 그에게 일이 섭외되었고 섭외한 남자는 화자를 집에 초대하게 된다. 남자의 초대를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을 섭외한 의뢰인은 임경주이며 전직 물리치료사이다. 의료사고로 직장이었던 병원에서 퇴사를 강요당하게 된다. 경주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빚쟁이로 몰리게 한 아버지로 인해 그는 질주하는 기차처럼 살았다고 한다. 타인의 빚을 연대하는 책임은 누구의 잘못일까. 아직 어린 나이에 빚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그는 아버지의 빚을 갚아나가는 젊은 청춘이 된다. 『구의 증명』이라는 최진영 소설에서도 아들은 부모의 빚을 무겁게 갚아야 하는 삶을 젊은 나이에 시작한다. 태어남과 부모라는 사슬이 이렇게 질기고 무겁게 억누르는 존재로 시작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의 흐름을 짐작하게 된다.
질주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보다 살려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평화롭다는 사실은 얼마나 참혹한 현실이었을지 충분히 떠올리게 한다. 살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가 온다는 그 마음, 동요되었던 복잡하고 휘몰아치는 감정들이 평온해지는 것은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경주에게는 늦둥이 동생인 승주가 있었다. 지금은 죽어서 경주에게 잃어버린 결과물이라는 상징이 되어버린 남동생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인 승주의 죽음은 그에게 모든 것이었음을 설명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 없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결과물이라고 말할 만큼 그의 상황은 텅 비어버린 상황임을 전한다.
희망이라는 언어가 사기꾼의 언어라고 말하는 이유,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언어가 희망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사기꾼의 언어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현실인지 직시하게 된다. 그러한 인물이 화자에게 일을 의뢰한다. 그는 무엇을 의뢰한 것이며 화자는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인지도 궁금해진다.
경주의 집에 초대되어 첫 방문한 느낌은 고적하고 질서정연하다는 느낌으로 일축된다. 작가가 경주가 머무르는 그 집의 공간을 여러 번 언급하면서 표현한다. 그리고 공달이라고 부르는 앵무새의 존재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경주에게는 죽은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남한테만 착한 아버지였고 경주인 아들에게는 전혀 그런 아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누군가에는 한없이 착하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냉정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러한 부자관계의 숙제는 오롯이 정을 전혀 받지도 못한 가족들이 품어안으면서 살기도 하는데 경주가 그러하다. 아버지가 차갑게 드리운 그늘 같은 삶과 빚에 경주는 질주하는 기차가 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웠음을 보여준다. 화자와 경주의 만남, 경주가 의뢰한 일, 화자가 하는 일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경주와 경주 아버지의 상호성을 언급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부자연스럽고 아들을 마당 잣나무처럼 보았던 아버지, 아버지를 울타리 정도로 보았던 아들이 있다. 그 울타리는 누구나 넘보고 누구나 뛰어넘는 울타리였다니 얼마나 가치가 없는 아버지였는지 적절하게 표현하는 부자 사이이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했던 경주가 선택한 것과 그가 의뢰하는 일의 의미는 어떤 일을 계획하는 것이며 어떤 욕망이 드리우는지 소설은 이야기된다.
경주의 늦둥이 동생 승주는 어머니에게 버려진 아이이다. 승주가 긴 세월 어머니가 떠난 후 움켜쥔 것이 상실감도 아니며 슬픔도 아니었음을 뒤늦게서야 형은 알게 된다. 그것은 암흑 같은 허무이며, 진흙탕 같은 무력감이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로 회복될 거라고 믿었지만 남동생 승주는 형의 험준한 말에 가출하고 노숙자로 굶어죽었음을 알게 된다. 승주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경주는 자신도 승주와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유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승주와의 차이점이라면 세상에서 돈을 벌었다는 차이만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두 형제가 감당하였던 감정들의 가해자들은 누구였는지 소설은 보여준다. 사라져야 했던 별이 되었던 승주, 경주의 등장은 소설에서 어떤 의미로 전개될지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인물이다.
소설의 화자인 이해상이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하려면 의뢰인의 내면 언어의 볼륨을 올려야 한다고 설명하는 인물이다. 롤라라는 커뮤니티가 등장한다. 해상은 롤라의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돌아와서 허무했고 후회했으며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정체성 혼란에 시달렸다는 것까지도 설명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러한 상황들과 후유증은 상징성을 띈다. 현실이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하고 고통과 고달픈 삶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것은 상당한 암시를 시사한다.
지금 상황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결과물이고.
승주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는 승주의 죽음으로. 44
나는 롤라의 커뮤니티에 접속하지 않습니다... 돌아온 후엔 후회했고. 부질없고 허무했거든요. 한동안 정체성 혼란해 시달리기도 했고. - P22
행복에 내성이 생겨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고달픈 삶을 택할 수도 있겠다. - P20
승주가 움켜지고 있는 건 상실감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암흑 같은 허무요, 진흙탕 같은 무력감이었다. - P32
나를 향할 땐 마당 잣나무 보듯 했다. 나도 아버지를 울타리 정도로 여겼으니까. 누구나 넘볼 수 있고 누구든 뛰어넘을 수 있는, 울타리 같지 않은 울타리. - P32
남한테만 착한 아버지는 내게 그런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 P51
내게 희망이란, 실체 없이 의미만 수십 개인 사기꾼의 언어가 되었다. - P52
살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가 온다. - P45
아버지 덕에 빚쟁이가 됐을 때 나는 질주하는 기차처럼 살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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