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의 장편소설이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책표지 그림이 눈길을 끈다. 책 제목이 낯설었는데 읽으면서 이해하게 된다. 욕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작가들의 심오한 질문이 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도둑 신부>를 통해서도 잔혹한 전쟁사를 문학으로 대면하게 된다. <시지프 신화>의 글귀를 함께 부여잡으면서 이 소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다." (89쪽)
무거움에 눌렸던 소설이다. 챕터 하나씩 크게 숨을 쉬어야 한다. 삶이란 무엇인지 <시지프 신화>의 내용과 접목하면서 소설의 인물을 살피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지도 <도둑 신부>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함께 질문하며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흰색 아마포 손수건과 스프 한 그릇, 어느 늙은 어머니와 아들을 소설에서 대면한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배고픔에 눈이 멀지 않았던 이유가 문장 하나로 귀결된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다.
근래 대한민국의 풍경들을 보면
우리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는 한다. 125
_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겨레출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언급된 이 작품은 근래 대한민국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려준다. 이 우려의 목소리는 지금은 벗어났는지 살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디에 갇혀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수용소는 단일의 공간, 단일의 의미가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된 사회는 위험한 것이다. 야금야금 하나씩 사라진 것들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운명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면 얼마나 비참해지는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인간의 영혼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질문해 본다. 출생, 사망이라는 간결한 어휘로 영혼이 정리된다. 작품에서 아들의 죽음을 짐작하면서 새롭게 아이를 출산한 부모를 기억하게 된다. 간결한 문구로 수용소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의 간결한 편지는 함축된 의미들이 되어 자식이 느끼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주위에서 느꼈을 침묵의 의미를 예리하게 통찰하게 된다. 전쟁과 강제추방. 이들이 머물렀던 러시아의 수용소와 강제노동. 뼈와 가죽만을 남길 정도의 배고픔과 추위. 이가 득실대는 자신의 몸과 옷 그리고 침구류. 수용소 뒤편의 감자껍질을 찾는 발걸음과 눈길. 배고픔의 한계에서 무너지는 부부의 참담한 양배추 수프 사건도 기억나는 장면이다.
작품 전체에 깊고 낮게 흐르는 문장이 있다. 수용소에서 생활한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흘러넘치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들이 평화로운 곳이라고 떠올리는 공간도 있다. 인간답게 사는 곳이며 평화로운 곳을 뜻한다. 상반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복종한 것들과 추락과 비굴함들이 이야기된다.
5년의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향한 이들은 예전의 삶과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왔을까? 그 세월의 빈 공간들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짐작하게 된다. 수용소로 이송되는 순간까지 경험한 것들도 전해진다. 수용소에서의 추위와 배고픔, 노동, 수용된 이들의 죽음과 그들의 사후경직이 진행되기 직전에 벗겨지는 옷들, 죽은 이들이 남긴 빵과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또렷하게 기억해야 한다. 이들에게 춤이 허용된 순간과 춤의 의미,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이들의 움직임까지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성경을 읽고 역사를 배우면서 던졌던 무수한 질문들의 단면들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책 두 권 <차라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파우스트>의 의미는 더욱 가중된다. 책을 좋아했던 화자의 영혼은 안전했을까?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 사실적이고 직설적으로 전해진다. 수용소 생활은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라고 말한다. 이들이 이곳에서 빼앗긴 것들은 다시 자유가 주어졌어도 가족,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생활하지 못한다.
파괴된 영혼은 온전하게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 <더 글로리>시즌 2의 문동은의 흉터는 영혼까지도 파괴해 버린다. 웃음마저도 잃게 한 것들이 있다. 복수는 지옥과 다름없는 삶이 된다.18년 세월이 흘러도 그 장소와 그 시간에 묶여버렸음을 여실히 전한다. 모든 복수가 끝나면 행복해지는지 보여준다. 수용소 생활은 영혼을 파멸시킨다. 자유도 없고 수치심도 없게 인간성도 파괴된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아도 본래의 자신을 찾지 못한다.
사랑하는 가정을 가지지만 온전한 것을 스스로 버리고 떠난다. 짧지도 않았던 수용소 생활은 이들의 남은 생애까지 휘어놓는다. 방황하고 흔들리며 노동강박에 짓눌리게 된다. 포크와 칼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음식을 향한 반응을 보인다. 훼손된 영혼이 비틀거린다. 본연의 삶을 되찾지 못하게 된다. 강제추방 당하는 순간 할머니가 건넨 말 한마디 덕분에 그는 버틸 수 있었는데 돌아온 이곳에서 가족들은 어느 누구도 그를 만지지 않았으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그가 살아돌아온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침묵이 흐르게 한 그 나날들과 그의 뇌리에 가득한 경험들은 사라질 수 있을까?
'수용소가 집'이라고 표현하는 화자가 있다. 도망쳐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되돌아오는 길은 포기이며 희망이 된다. 두껍지 않은 장편소설이다. 하나의 이야기에 긴 호흡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이며 그들의 뼈와 가죽이 붙어있었던 날들의 침묵이 된 이야기이다.
살아남지 못한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지속한다. 누군가의 쉽고 가벼운 폭력들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현주소까지도 살펴보게 된다. 폭력에 뽑혀진 것들, 복종의 흔적과 수치심의 상흔들을 보게 된다. 수용소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잃어버린 영혼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강한 여운까지도 상기해야 한다. 사랑하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빼앗아간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직시하게 한다.
수용소에서... 시체를 치우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옷이 필요하다...
그들이 아껴둔 빵을 먹는다....
죽음은 우리에게는 횡재다...
우리는 저지를 수 없는 짓만 남겨두고
온갖 짓을 다 저지를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 점이 더 중요하다. 136~137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누구든 결정할 필요도,
결정할 의지도 없었다. 290
자유 때문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감정은 널을 뛰었고,
추락과 비굴함에 길들어 있었으며,
뇌는 복종했다. 297
속은 완고하며 우울해지고,
겉은 개처럼 비굴하고 비열해진다. 41
배고픔에 눈이 먼다는 말은
그냥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예전의 우리가 아니었다.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