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시
아주라 다고스티노 지음, 에스테파니아 브라보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오후의소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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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모든 결점을 지웠어.

구겨지고 버려진 것들,...

결함과 균열과 작은 배신들.

저마다 품고 있던 비밀들은 사라졌고

모든 것은 뒤섞였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함께 흰 눈을 덮고 있어.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걷고 또 걷다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깨닫는 건

걷는 동안 우리가 함께였다는 것.

나뭇가지 위의 눈이

세상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듯

큰 소리로 떨어지고 있어.

...

눈은 순결한 마음 같아서

쥐려 하면 흩어지고

맑아지려 하면 더러워지고

멀어지려 하면 다가오지.

이제 곧 눈이 내릴 거야.

집집마다 지붕 위로 근사한 냄새가 피어올라.

흙냄새도, 볕에 널어놓은 빨래 냄새도,

향기로운 꽃이나 갓 구운 과자의 냄새도 아닌

오직 첫눈을 기다리는

계절의 차고 흰 냄새.

눈의 세상에서 선명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닌 존재.

작고 희미한 것.



큼지막한 양장본 그림책이다.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색감의 그림책을 펼치게 한다. 커다란 페이지를 가득히 채워준 그림들과 조각처럼 작게 활자들이 수놓여있는 그림책이다.

시어들이 수놓아진다. 눈과 인생의 길을 되감기하는 노인 부부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눈이 쌓인 계절의 횟수만큼 두 사람이 함께한 나날들이 펼쳐진다. 남은 시간들은 많지 않은 노년의 계절이지만 추억들은 되감을 수 있다. 그 추억들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눈과 함께 자리잡는다.



삶과 인생을 자주 돌아보아야 한다. 오늘의 시간, 찰나의 감동과 기쁨들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허투루 낭비한 시간들의 조각들은 없었는지도 살피게 한다. 결점과 균열, 부끄러운 자화상들을 눈이 덮어준다. 불완전하고 오점투성이인 우리들이다. 후회와 실패, 실수로 회상되는 발자국을 남기는 인생이지만 눈은 어김없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준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마음, 다시 시작하도록 마음을 준다.



함께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수많은 추억 속에 우리는 함께하였음을 보게 한다. 큰 세상 속에 작디작은 존재이지만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분자와 원자들로 구성된 놀라운 존재들이다. 물, 비, 바람, 눈, 숲, 바다, 동물, 식물, 인간의 존재들은 의미 있는 존재들이다. 하찮은 존재들은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우위에 서는 피라미드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최상층이라고 어리석게 사고하는 오류는 없어야 한다. 남성도 여성도 권위의식으로 차별과 편견으로 물들면 안 되는 세상이다. 우매함으로 남녀를 차별한 역사, 인종을 차별하는 사고 의식, 서열주의로 나누며 줄세우기하는 학교교육은 병폐가 어떤 우려를 발생하는지 사회문제가 결과를 보여준다.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과정에 다툼과 논쟁이 어김없이 등장하면서 다시금 우매한 인간의 역사는 거듭된다. 이기적인 집단의 목소리들은 자기 것만을 지키고자 한다. 타인의 고통, 억압, 아우성을 외면한다.

그림책 한 권은 함축적인 시어들이다. 노인의 뒷모습은 역사들로 점철된다. 노인의 시간에는 전쟁, 분쟁, 남녀차별문제, 노동자 문제, 환경문제 등이 함께한다. 오점투성이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이다. 동물의 피로 물든 땅과 강에는 생매장된 동물들이 있다. 원자력과 과학의 결과물은 바다와 수산물까지도 위협한다. 살인적인 더위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는 이런 더위를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자연의 경고등은 무섭게 울린다. 멈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분히 사고하게 하는 그림책이다. 작은 벤치 의자가 말해준다. 비어있는 벤치 의자에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사라지지 않도록, 깨어진 지구가 되지 않도록 멈추어야 하는 버튼들을 찾아야 한다. 멈춤 버튼을 찾고 실행력을 가져야 한다.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면서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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