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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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태고의 시간들> 소설이 인상적이라 작가의 소설들을 계속 읽게 된다. 작가의 책을 따라가는 시간은 의미 깊은 여정으로 남는다. 첫 문장부터 작품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게 한다. 정적을 표현하는 작가이다. 유목민과 같은 삶을 살아갔던 부모님에 대한 회상과 심리학과 통계학을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작가의 목소리로 전달된다. 기대감이 증폭되는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낯선 느낌으로 화자가 다른 많은 소설들을 만나면서도 유유히 흐르는 느낌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트러스트>장편소설의 이민자인 대필 작가의 아버지의 삶이 그러하다. 이민자가 아닌 추방자라고 언급하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 소설이 떠올랐다.










익숙하지 않았던 소설이었고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강열하였던 작품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들, 화자도 저마다 달라지는 작품이다. 단편소설이 긴호흡을 필요로 한다. 긴호흡은 절실하게 작품을 뚫어지게 오랜 시간 바라보게 한다. 강열하게 각인된 작가이다. 그리고 지금도 독서의자 곁에 쌓아 올린 문학 소설들의 하나로 소중하게 자리 잡는 작품이다. 작가의 작품들은 이유 불문하고 펼치는 독자가 된다. 오랜 시간 곁에 두면서 읽게 되는 작품이다. 결코 다른 장편소설처럼 똑같은 속도로 읽지 못하게 한다. 작가는 수없이 많은 호흡을 하게 한다. 기나긴 시간을 사유하게 하는 매력적인 작가이다.



잠자던 사고를 깨워주는 작품이다. 이 책의 목소리는 매력적으로 채워진다. 여행자, 순례자, 방랑자들이 떠나면서 느끼고 기록한 것들을 통해서 많은 경험을 하게 한다. 소설이 던지는 문장은 경직된 사고의 틀을 깨어나게 한다. 그 여정은 수많은 감탄사로 점철된다. 멋진 여행길이 되어준다. 문학이 가진 틀을 깨고 유영하면서 더 깊은 곳을 사유하는 작품이다. 기꺼이 동행해도 좋을 작품이다. 작가가 걷는 광폭의 발걸음에 매번 놀라움을 멈출 수가 없다.





여행자가 있듯이 정지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보다는 그대로 머무르는 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타자에 의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타자의 시선에 의한 전달성은 적당히 포장되고 적당히 배제되는 날것의 경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은 개인적인 기록물로 남겨진다. 방랑자가 되어 사적인 기록물로 기록된 사진, 여행이야기는 다채로움을 전달하게 된다. 타자가 전달하는 것은 지극히 단면적인 지식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떠나는 여행자를 선호한다. 여행에서 경험한 것들은 우리의 자산으로 남겨진다. 이 작품의 수많은 이야기처럼 말이다.




장애인 아이를 돌보는 여인이 지하철역 노숙자 삶을 선택하는 이유와 마음껏 기도하고 울고 싶었던 여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은 기도하고자 교회를 이곳저곳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마음편하게 기도하며 울 수 없는 여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숙자의 삶을 선택한다. <고독사 워크숍> 박지영 장편소설에서도 마음껏 울지 못하는 어른으로 성장한 인물이 생각난다. 노숙자의 삶이 더 자유로움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집과 타인들이 여인을 얼마나 구속하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눈물과 울음이 주는 치유, 기도할 장소의 부재가 결국 여인을 노숙자를 선택하게 한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교회는 여인에게는 더 이상 기도의 장소가 아닌 상업적 공간이 되어 여인을 치유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집도 여인을 위로해 주지 못한다. 여인이 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상황의 고단함이 절박하게 투영된다. 집과 교회가 온전히 몫을 다했는지 질문하게 된다. 여인의 고단함을 치유해 주는 우리들인지, 사회인지도 질문하게 한다.




<트러스트> 장편소설에서도 다르지 않은 경계선의 이민자를 보게 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방랑자들이다. <방랑자들> 소설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다정한 서술자>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이 작품에서도 상기하게 된다. 서로 헌신하며 돌보는 균형을 작가만의 문체와 작품성으로 거듭 강조된다. 경쟁과 투쟁, 승리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던지는 작가만의 신랄한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나무학자의 책을 통해서도 언급되었던 학술 내용이 떠오르면서 작가의 목소리에 더욱 밀착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들로 채우게 된다. 내밀한 깨달음을 전해주는 작가이다.




저주의 발길질로 그 문을 걷어차라.

잊어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복도로 우리를 내모는

그 문들을 저주하라.

그 어떤 몰락이나 죄악도 부끄러워하지 말라.

입에 올려진 죄악은 이미 사함을 받은 것이다...

지그문트 성인과 카를로스 성인,

야고보 성인이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다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힘을 이해했지만, 그것도 여전히 잘못된 해석이었다. 자연의 선택도 없고, 투쟁도, 승리도, 적자 생존의 법칙도 없다.

경쟁이라고? 개나 줘 버리라지.

경험이 풍부한 생물학자일수록 생물계의 복잡한 구조와 연결 고리를 더욱 오래, 그리고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장하며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서로를 원조하고 돕는다는 직감 또한 강령해진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서로 헌신하면서,

자신이 효율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경쟁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균형이 깨졌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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