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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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닌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서, 로랭 가리의 글을 어쩐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식으로 듣게 되어 그런 말에 궁금함을 느껴서 그로칼랭을 읽게 되었고 그렇게 열광할 정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쁜 느낌을 갖게 되지도 않는, 무덤덤한 기분으로 읽었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책을 덮게 되었었다.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재미보다는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라는 인물이 더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째서 내가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좋아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하게 되었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기분도 아니었지만.

아마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혹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고독-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 때문에 나와 어울릴 것 같다는 혹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부적응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무척 정직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순수하게 다가서고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불순하고 위선으로 가득하며, 인간적으로도 형편없는 나와 같은 사람과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게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책을 읽게 되었을 때의 느낌이라면,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어쨌든, 무덤덤한 기분으로 읽었기 때문에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따로 더 읽게 되지는 않고 있었는데,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알게 된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통해서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는 자주-반복해서 언급이 되었고, 그래서인지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는 다시금 떠올려지게 되었고 그런 과정 끝에서 그의 다른 작품인 자기 앞의 생을 읽게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떠올려지기 보다는 누군가를 통해서 떠올려지게 된다. 혹은 그는 오로지 그만이 아닌 항상 누군가와 함께 떠올려지게 되는 것 같다.

 

그게 좋은 것인지 안타까운 것인지는 나만이 판단해야 할 문제겠지만.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여러 대표작들 중에서 혹은 걸작들 중에서 꽤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자기 앞의 생은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글-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작품일 것 같고, 그가 담으려고 하는 이야기-주제가 흐트러짐 없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고독과 고립을 자처하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려지게 되는

그렇고 그런 삶을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글에 어떤 감탄이나 강렬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적으나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갖고 있는 힘이 워낙 빼어나기 때문에 그의 글에 별다른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끝까지 읽게 되는 것 같고, 결국에 가서는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 무릎 꿇게 만드는 것 같다.

 

결국에는 어떤 감동을 느끼게 만든다.

그걸 느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걸 전달해내고 설득해낸다.

 

보기 좋음을 느끼게 만들기 보다는 어쩐지 보기 싫음을

기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쩐지 보기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적인 무언가가 아닌 그냥 바라보게 만들고 적나라하면서도 담담하게 만드는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에서 등장할 인물들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게 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격렬하고 폭발적인 이야기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들만의 삶 속에서 그들만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가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꾸며내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기 보다는 일상의 조각들을 흩뿌려놓다가 어떤 사건을 혹은 무언가 파열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서서히 진행되는 듯이 느껴지고 마지막에 가서야 강렬한 혹은 인상적인 여운을 느끼게 하고 있는 끝맺음은 예상 가능한 진행과 결말일지도 모르고 약간은 생각과는 다른 결말로 치닫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피할 수 없는 깊은 감수성을 마주하도록 정교하게 꾸며져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소개하기 보다는 이 작품이 만들어낸 여러 감정들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어떤 깨달음을 느끼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꼭 그런 것을 알게 되기보다는 여러 생각들을 하면서 꽤 한동안 자기 앞의 생을 자주 떠올리게 될 거 같고, 쉽게 잊지는 못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다른 로랭 가리-에밀 아자르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 같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이처럼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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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트 원티드 맨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6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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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트 원티드 맨(영화) : http://blog.naver.com/ghost0221/220245364455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존 르 카레의 원작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어차피 존 르 카레는 단순히 모스트 원티드 맨만을 놓고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너무 한심한) 좁은 틀에서 그의 작품을 말해야만 할 것 같다.

 

존 르 카레

 

존 르 카레에 대해서 단순히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탁월한 스파이 소설 작가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어색하고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구석이 많은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주목을 받고 있고, 냉전 이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혹은 세계관은 여전히 인상적이고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감탄하는 것은 같은데, ‘모스트 원티드 맨또한 9.11 테러 이후 (확실하게) 뒤바뀐 시대-세계관을 존 르 카레는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지금 시대가 어떤 세계관과 이해 속에서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의심으로 가득하고 강박과 편견, 신경과민으로 가득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작을 영화로 만든 모스트 원티드 맨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소설의 경우 영화와 어떤 점들이 다른지에 대해서 생각해가며 읽게 되었는데(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각색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고 꽤 근사한 방식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들로서는 영화 또한 만족스럽게 느껴졌을 것 같다.

 

다만, 당연하게도 영화는 원작의 느슨한 분위기를 좀 더 긴장감으로 가득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방식으로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달라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의 경우 영화와 큰 차이는 갖고 있진 않지만 보다 상세한 설명과 세심한 흔적들이 많다고 볼 수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성격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고, 이야기의 곁가지들이 여러 가지로 뻗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느슨함을 혹은 나른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어 자칫 지루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을 수 있겠지만 조금씩 조여드는 긴장감과 함께 느슨함 속에서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속도로 인해서 나쁘지 않은 읽기가 될 것 같다.

 

느리지만 단단하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

여러 방식의 협박과 유혹들

거기에 설득되는 것과 포기를 한다는 것

좌절하게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안심하게 되기도 하는 것

9.11과 그 이전에 있었던 여러 전쟁과 폭력

인종청소로 기억나는 동유럽에서 벌어진 수많은 참혹함들

첩보기관인지 뒷조사를 위한 집단인지 알다가도 모를 그들만의 세계

그들이 하고 있는 업무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하찮은 것인지 헷갈려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함과 함께 그 반대되는 여러 가지들

 

서서히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냉전 직전과 직후에 벌어졌던 추잡함과 추악함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식으로 그것들을 덮어내고 다시금 불거진 것들을 또다시 덮어내려고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지금 현재의 시대적 분위기-풍경을 함께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뛰어나다는 말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뛰어남이 무척 느슨함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느리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너무 사실적이고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박진감과 긴박감을 기대한 사람들이라면 허술하고 한심하다고 푸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항상 그렇듯이 현실은 지루하게만 느껴질 뿐이니까.

 

하지만 삶은 항상 그렇듯 그 지루함과 느슨함 속에서 무언가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러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 이야기들이 하나의 전체 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이끌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속에서 건조하면서도 냉정함을 보여주는 한계-현실 또한 잊지 않다는 점 때문에 더욱 인상적인 비극을 혹은 결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세상의 비정함을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의 작품에 좀 더 애정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아직은 존 르 카레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가를 미루고 싶어진다. 아직은 세상을 그렇게 보지는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렇게 보기를 미루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척 좋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인지 좀 더 그의 작품들을 찾게 될 것 같다.

 

존 르 카레는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숨죽이고 지켜보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를 칭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과 현실과는 조금은 다른 세계를 무척 가깝게 다가서도록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교묘하고

정교하다.

그리고 흔들림 없다.

씁쓸한 확신으로 가득하다.

귄터 바흐만의 익숙하고 이미 예상하고 있는 낭패와 패배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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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의 근원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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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른 사람들은 특별히 주목하지 않지만 (혹은 덜 관심을 갖지만) 무척 열광하는(환장하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그런 작가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문제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누구나 그런 작가가 있을 것 같다.

 

제임스 엘로이

 

현존하는 범죄소설-하드보일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드높은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 중 한명이면서 괴팍하고 자극적인, 폭력과 섹스 그리고 뒤틀린 욕망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을 (무더기로) 발표한 제임스 엘로이에 대한 관심은 ‘L.A. 컨피덴셜로 인해서 시작되었고 여전히 그의 작품들이 (다른 범죄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에 비해서 국내에서는) 덜 주목받고 덜 번역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자전적인 경험-과거와 소설가로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능력 그리고 현실과 소설-상상의 경계가 마구잡이로 뒤엉키고 그 한계를 극명하게 구분되고 있기도 한 내 어둠의 근원은 불편하고 어둡고 음침한, 자극적이면서도 외톨이 정서로 가득하면서 그리고 퉁명스럽고 냉소적이고 건조하기만 한 제임스 엘로이 특유의 글재주를 마음껏 즐길 수 있으면서도 기괴한 사건과 그 사건을 재주사하는 과정 속에서 제임스 엘로이의 어두운-뒤틀려진 내면을, 자신의 과거를 들춰내고 폭로하면서 그 과거와 화해하기도 하는 독특함으로 가득하며 더러움과 과격함으로 범벅이 된 작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롭게 읽혀지는 작품이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역겹고 구역질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제임스 엘로이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의문의 강간살인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무척 중요한 순간-사건-경험이라는 것을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혹은 언급되고 있는데) 여러 범죄소설 작가들 중에서 제임스 엘로이처럼 직접적으로 범죄를 (그것도 무척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니 제임스 엘로이의 독특함과 특별함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그가 많은 세월이 흘러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재검토하는 과정을 담아낸 내 어둠...’이 갖고 있는 음습함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우면서도 읽는 과정 속에서 불편함 또한 느끼게 만들게 된다.

 

자극적이면서도 무언가 불편하고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척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지켜보게 만드는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내용의 구성도 조금은 특이하다고 볼 수 있는데,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극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온갖 사건에 관한 보고서와 메모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과 당시에 있었던 정보, 면담, 수사, 조사, 탐문의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고 그 기록을 접하면서 실제 수사-조사의 과정이 갖고 있는 여러 어려움과 지루함 그리고 막연함을, 결국에 가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리고 범인이 누구일지에 대한 궁금함 보다는 그저 지쳐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제임스 엘로이는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려주고 있기도 한데, LA의 변화와 그 역사를 혹은 시대의 풍경과 분위기(의 변화)를 알려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여전히 그 시대-당시에 머물려고 하는 듯이, 혹은 어떤 식으로 LA가 변화되었으면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그 이후의 시대는 어떤 식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는지를 (그나마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던 시대에서 어떤 식으로 제멋대로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는지를) 반복해서 말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임스 엘로이는 항상 LA를 생각하며 LA의 슬픔을, 그리고 광대한 욕망과 자극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기괴한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장에서는 살인사건 이후 제임스 엘로이 본인이 어떤 식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마치 노골적으로 자신의 삶을 폭로하듯이) 들려주고 있는데, 불우한 어린 시절, 부적응, 약물중독, 삐뚤어진 인성, 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과 혐오, 자극적인 욕망과 환상, 섹스와 약물에 대한 집착, 범죄에 대한 몰두, 갱생과 재활에 관한 이야기로 얼룩져 있다.

 

약물과 마약 그리고 술

피와 정액으로 얼룩진

그리고 수많은 자극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쏟아내고 있다.

 

위와 같은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는 과감하고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밝혔듯이 다른 의미에서는 그의 노출증이 여전하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에,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 그의 모습인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에 제임스 엘로이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는, 그러면서도 의문하게 되고 판단하기가 미뤄지게 되기도 한다.

 

3장에서는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재수사하게 된 빌 스토너 형사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형사라는 존재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빌 스토너 스스로는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삶과 형사로서의 삶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관찰하듯이 그를 그려내고 있고, 독백-고백하게 만들고 있다. 건조하고 우울하게 살인과 시체들 그리고 아스팔트로 가득한 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야 제임스 엘로이와 빌 스토너는 함께 자리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금 풀어내려고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소설가로서 하나의 이야기로서 사건을 다뤄냈었던 위치에서 직접 사건에 개입하는 모습과 함께 그런 과정으로 인해서 그 스스로가 생각했던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지고 붕괴되는 과정을 (혹은 모든 것들이 하나로 겹쳐지는 과정을), 자신의 과거로 향하면서 어떻게 과거가 그 자신의 상상에 맞춰서 달라졌었는지를, 때맞춰 일어났던 O.J. 심슨 사건이 그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혹은 관계되어 있도록 강요하듯 만들어내는 면담 속에서 어떤 식으로 과거가 다시금 되살려지게 되는지를 (혹은 잊혀졌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건을 재검토하면서 결국 사건은 미해결로 남게 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빌 스토너가 진행하던 미해결 사건이 마무리되는 과정과 O.J. 심슨 사건 그리고 제임스 엘로이 자신의 사건이 어떤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지를, 결국 어머니의 과거를 마주하게 되면서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으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어가면서 제임스 엘로이는 어머니와의 깊은 그리고 복잡한 관계를 인정하고 덜 뒤틀린 방식으로 (혹은 그 뒤틀린 방식 그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다.

 

내 어둠...’은 개운하고 시원한 결말을 확인하진 못한다.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이고, 해결된 사건들도 딱히 만족스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제임스 엘로이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서 파헤치려고 하는 것인지 LA에 관한 어두운 모든 것들을 들춰내려고 하는 것인지 그 스스로도 무엇이 우선인지 헷갈려하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모든 것에 역겨워하면서도 모든 것에 깊은 흥미를 보이고 있다. 어쩌다 이런 결과물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느낌뿐이지만 분명한 것은 독특한 구성과 해괴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그리고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기묘한 유혹이다.

마치 달리아의 유혹처럼.

 

사람들에 따라서는 읽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겠지만 이건 정말로 특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게 되는 것 같다.

 

어쩐지 오랜 기간 이 작품이 안겨주는 여운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짤막하게 잘게 잘려져 있고 건조함과 냉소 그리고 염세적인 음울함으로 가득한 글자들의 묶음은 더욱 더 독특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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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2
소포클레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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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런 걸 왜 읽어?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면, 혹은 다른 고전들을 읽게 될 때면, 그게 아니면 여러 난해한 인문학 관련 책들을 읽을 때면 저런 질문을 받게 될 때가 곧잘 있다.


그 럴 때마다 (길게 설명하고 싶지만 귀찮으니까 간단하게) 재미나서 읽는다고 대답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재미를 느끼는 것-방법이 각자 다르기 마련이니까. 대부분은 그런 대답에 그냥 대충은 수긍하기 마련이다. 대부분 그런 식의 대답을 들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표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나도 그런 질문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서로 그런 것으로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자는 기분으로 적당하게 이해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어쩌다가 열심히 설명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괜한 것에 열을 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았고, 우선은 어머니부터 내가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고 열심인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낳아준 어머니도 이해해주질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을 때, 어디서 그런 한심한 질문을 하느냐고 말대답해서 한참을 다툰 적도 있어서 경험상 그런 질문은 가볍게 들어주고 그 사람과 되도록 (책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눌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무언가를 읽는 것에 어떤 식으로 재미를 느끼는지는 각자가 다 다른 것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까.


이 런 말을 꺼낸 다음에 굳이 그리스 비극을 왜 읽는지를 설명한다면, 그리스 비극을 읽게 되는 이유는 그 비극을 경험하는 과정과 그 비극을 직접적으로 경험했을 때의 반응에 대해서 큰 호기심을 느끼기 때문이고 비극, 비참, 괴로움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의 반응의 원형을 혹은 그 비극을 경험하는 가장 원초적인 순간을 그리스 비극은 무척 극적으로 만들고 있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읽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작가들 중에서 특히 소포클레스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에 집요하게 몰두하면서 비극을 피할 수 있는 혹은 비극이 비극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서도 그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고, 그러면서 더욱 비극성을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반복하면서 읽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가 만들어낸 비극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혹은 경험할 것을 예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그의 비극이 유난히 인상적으로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소 포클레스의 대표작이면서 그리스 비극을 대표하고 있는 (거기에 프로이트 덕분에 좀 더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한) ‘오이디푸스 왕’과 그 비극 이후의 이야기들을 모은 ‘오이드푸스 왕 외’는 오이디푸스가 겪은 비극과 함께 그가 겪은 비극과 그 비극 이후의 또다른 비극들을 알 수 있으면서 그 비극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으며 혹은 깨달을 무언가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다.


물론, 그렇게 진지하고 지나치게 열중하면서 읽을 필요는 없다.

그 비극 자체를 경험하면 각자가 각자에게 맞는 무언가를 느낄 것이다.


조 금은 느슨하고 약간은 겉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어쩐지 길고 긴 후일담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보다는 ‘안티고네’가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결국에는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탁월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선택을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반복해서 읽어도 여전히 재미나게 읽혀지게 되고 있고, 그 비극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과연 내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격렬한 감정과

우연하게 알게 되는 진실의 실마리들

감정적이고 고집스럽게 굴면서 진실을 알고자 혹은 자신의 감정과 고집에 집중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에 밝혀지게 되는 혹은 폭로되고 파국으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

어째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관심을 갖게 되고 재미를 느끼게 되는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경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하게 되기만 한다.


현명함과 깨달음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런 것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할 뿐인 인간의 오만함과 아둔함을 알면서도 모르게 되는 내 무지에 혹은 한심함에 대한 최소한의 (깨달음을 위한)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벗어나려고 하고 있고 용감하게 맞서려고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신들이 만들어낸 비극에 끼워 맞춰지고 그 비극의 운명에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운명을 나는 모르면서도 혹은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왜 알려고 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고, 그게 결국 내 운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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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킹 우드스탁
엘리엇 타이버.톰 몬테 지음, 성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우드스탁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



1969년 여름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 그 시대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혹은 쓸데없는 아는 척이거나.


직접적인 경험 없이 그걸 말한다는 것은 뒤늦은 아쉬움 이상은 아닐 것이니까. 그리고 그 아쉬움을 어떤 식으로도 채워낼 수 없을 것이니까. 그게 아니면 쓸데없는 호들갑일지도 모르겠다.


그 런 의미에서 음악적으로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그 당시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흥미로운 행사였거나 괜찮은 돈벌이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진짜 막대한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르지만) 1969년의 우드스탁에 관한 이런 경험담-후일담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다지 의미 없는 책읽기일지도 모르고 일종의 추억놀이에 쓸데없는 동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읽어보니 나쁘지 않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1960년대 시대정신의 한 단면을 혹은 본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는 순간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뭐, 어떤 입장에서 읽게 되든 ‘테이킹 우드스탁’은 우선 재미있다. 읽는 재미는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그 리고 그때 그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든 것이 가능하고 허락되(리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을 솔직하고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것 같고 반복하고 싶지만 반복할 수 없는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는지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라도) 읽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읽는 과정 속에서 그런 내용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생각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쏟아내고 있는 엘리엇 타이버의 고백을 통해서 그 시대의 모습과 풍경만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뚱댕이에다 못난이였으며 게이였던 그 자신이 어떤 식으로 그 스스로-시대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가족들과 갈등하고 화해하게 되는지를 감동까지는 아닐지라도 웃다가고 씁쓸해하고 그러다가도 그의 감정에 설득하고 공감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좋은 기분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 같다.


‘테이킹...’은 우드스탁이 어떤 과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행사가 치러졌는지를 알려고 한다면, 그 시작과 끝 그리고 의미를 찾아보려기 위해서 우드스탁이라는 행사 자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게 된다면 무척 난감한 기분에 빠지게 될 것 같다. 무슨 뜻이냐면 ‘테이킹...’은 우드스탁에 관한 책이기 보다는 우드스탁을 알게 되면서 혹은 우드스탁을 경험하게 되면서 어떤 식으로 엘리엇 타이버라는 사람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무척 개인적인 입장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이킹...’은 성장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우드스탁은 한구석에 조금은 밀려나져 있는 내용이라고 (일종의 소재이자 때때로 주제가 될 때도 있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읽을 맛이 나는 것은 아닐까?

만 약 우드스탁 공연 그 자체에 대해서, 온갖 뒷얘기와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에 집착했다면, 그것 들에만 집중했다면 (물론, 다른 방식으로) 읽는 재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재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 신의 엉망진창이기만 했던 어린 시절-삶을 솔직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내놓는 앞선 내용들과 자신의 성적 정체성(남성 동성애자-게이)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을 털어놓는 내용들(무척 적나라하기 때문에 흥미롭기도 하고 자극적이기도 했다)을 지난 다음에 자신의 가족들과 갈등하고 어려움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이 있은 다음에야 (엘리엇 타이버는 당황스럽고 어쩔 줄을 모르며 난감-난처한 표정으로 가득하지만 그게 무진장 웃긴 상황들이기로 묘사하기도 한다) 자신이 꿈만 꾸던 상황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다시 말해서 우드스탁이 농담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과정을 자세하게 다뤄내고 있는 중후반부 속에서 온갖 황당한 사건들과 상황들 그리고 찬성과 반대의 갈등, 통제 불가능 한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지를,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를, 스스로에 대해서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게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긍정하고 화해하는지를, 히피들의 야릇하고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혹은 눈살이 찌푸려지고 고개를 돌려지게 만드는 그들만의 문화를, 섹스-마약-로큰롤이 한꺼번에 뒤엉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면 어떤 폭발을 만들어내는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여러 엉망진창의 방식으로 


우 드스탁은 결국 개최되었고 그건 하나의 사건이면서 사고였고, 어쩌면 뒤돌아보니 덧없는 순간이었지만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런 식으로 우드스탁은 한 개인과 밀접하고 긴밀함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 같고, 그걸 확대시켜 해석하면 엘리엇 타이버 개인만이 아닌 그 순간 그 공간에 머물렀던 이들 중 모든 사람은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큰 변화를 혹은 자신만의 삶의 태도와 확신을 갖게 만드는 순간-공간이었다는 것을 이해되도록 만들고 있다.


엘리엇 타이버의 글을 멋대로 인용한다면 우드스탁에 향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도 우드스탁이 찾아오도록 그는 노력-설명하고 있다. 그 자신의 실제 경험을 말하면서.


물 론, ‘테이킹...’을 읽었다고, 그것으로 내 삶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벼운 기분으로 무겁기만 했던 자신의 삶을 수다스럽게 얘기해주면 결국에는 어떻게 삶이 변화되었는지를 어떤 찡그림도 없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조금은 바꿔보고 싶기도 하고 변화를 찾고 싶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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