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의 탄생
필립 아리에스 지음, 문지영 옮김 / 새물결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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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던 영역을 통해서 중세를 바라보고 있고, 근대를 되돌아보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가 그동안 자료로 취급하지도 않던 것들을 어떻게 하나의 시대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지 새로운 깨우침을 안겨주고 있는 저작이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다시 말할 것이 없을 정도로 ‘아동의 탄생’은 단순히 중세에 대한 그리고 아동에 대한 역사책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인식의 변화, 심리의 변화와 체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분류가 어떻게 이뤄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필립 아리에스는 ‘아동’이라는 존재가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 보다는 ‘아동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이전 중세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 아동이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이상할 정도로 높아지게 되었으며, 그 이행을 통해 두 존재가 부각되어가는 변화를 보였다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동이라는 존재는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을 별도의 존재로 구분하지 않던 입장(중세)에서 특별한 존재로서 구분(근대)하고 어떻게 그들을 바라보고 양육하며 가족이라는 집단이 재구성되는지를 필립 아리에스는 수많은 사례들과 자료를 토대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이의 말대로(아마도 폴 벤느가 아닌가 싶다) 아리에스의 분석은 미셸 푸코의 계보학적 분석과 유사한 성향을 보이는데, 아리에스의 분석은 보다 역사적인 분석이고 정치적 성격이 적은 대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푸코는 굉장히 정치적인 성향이 짙기 때문에 보다 다방면에 걸쳐서 논쟁적인 여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둘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보다 더 자세히 논의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쉽게 생각해서는 푸코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서 일종의 철학적 혹은 정치적 폭탄을 만들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면, 아리에스는 보다 학문적 입장에서만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정치적인 성향 보다는 죽음, 삶 등 철학적 혹은 하나의 삶의 태도에 보다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아리에스는 아동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는지,

그들이 등장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새로운 분류체계와 구분이 이뤄지고 있는지를 탐구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아동이라는 존재가 별도의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지에 대한 원인을 다루지는 않고 있다. 다만, 서문에서는 각 시대마다 특징적인 세대가 나타난다고 말을 하고 있고, 부르주아 계급의 부각과 함께 계급적 구분이 드러남에 따라 아동 및 기타 구성이 더욱 확연한 구분이 이뤄지고 있다는 식의 방식으로 얘기를 한다.

 

푸코와 같이 ‘권력’이라는 추상적 대상 혹은 전략에 의해서 그러한 구분들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타고난 역사가일 것이고, 하나의 사실들을 말하고 있을 뿐이고, 그 사실을 통해서 그의 통찰력을 논의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푸코는 거기에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제시한다. 그것이 둘의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어쩌면 필립 아리에스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 자체와 그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 그 과정에서의 원인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나 노베르트 엘리아스 식의 사회적 구별짓기[아비투스(Habitus)]에 대한 생각도 특별히 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하고 있었다고 해도 언급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언뜻 그런 생각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더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아리에스는 다양한 자료와 분석을 토대로 아동의 등장 자체를 다각도로 분석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세대로서의 아동과 삶에 대한 시기적 구분

복장 변화를 통해서 바라보는 아동 등장

아동에 대한 지칭 또는 명칭의 등장을 통한 인식의 변화

다양한 놀이에 대한 시대적 분류와 그 놀이를 즐기는 집단으로서의 아동의 등장

귀여워하기의 대상으로서의 아동

도덕성 주입 대상으로서의 아동

학교의 등장과 세분화 그리고 그런 분절화에서의 아동

규율을 통한 규제와 도덕성 통제 그리고 그 대상으로서의 아동

매너의 등장으로 인한 아동에 대한 사회적 / 문화적 제재 및 교육의 등장

 

아리에스는 말 그대로 온갖 것들을 토대로 아동의 등장과 가족의 탄생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있고, 그 분석을 통해서 중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아리에스의 아동에 대한 이와 같은 풍부한 분석은 동시대의 그리고 이후 세대의 학자들에게 수많은 영향을 주고 있고, 그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서 그의 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이와 같은 논의가 없었다면 과연 아날 학파는 지금보다 더 풍부해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필립 아리에스 없이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있었을까?

 

물론, 완전무결한 분석은 없듯이 아리에스의 아동에 대한 분석도 아날 학파와 기타 비판자들의 비판이 뒤따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아리에스의 반박도 정당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비판의 중심인 실제로 과거에는 아동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가에 대한 논의) 아동에 대한 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떠나서 관심이 근대로 이행되며 얼마나 더 높아졌고 집중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단순히 아동의 탄생만이 아니라 언어, 체계, 구분, 분류, 교육, 예절, 가족 등 하나의 특정 대상의 등장이 그로 인해서 관련된 수많은 것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탁월한 저작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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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ire of the Sun (Paperback)
Ballard, J. G. / Simon & Schuster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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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같은 제목의 영화만 많이 알려졌지만 J.G.발라드의 원작 또한 발표 당시에 많은 화제를 모았었고,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니 국내에 그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고 있어서 관심만 갖고 있던 중 (아마도)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번역되었던 것 같은 ‘태양의 제국’을 우연히 구하게 되어서 읽게 되었다.

 

J.G.발라드의 작품 중 가장 그의 작품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되도록 다른 작품을 읽고 싶었지만 (원서가 아닌 번역서로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이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무기력하게 읽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과 일정부분 유사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 작품과 함께 두 작품 모두 글을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글이 어렵지도 않고, 내용의 구성도 복잡하지도 않은데도 읽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두 작품이 들려주는 정서와 풍경에 전혀 몰입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거나, 두 작품 모두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되도록 후자이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내 자신이 두 작품의 소년들의 경험들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읽어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경험적으로 그들의 심정에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지침과 정서적인 피폐해짐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반응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건성으로 읽게 된 것 같다.

문학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간접적인 체험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은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체험 자체가 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서를 읽지 않았을 것이고,

과거에 출판된 번역본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원작은 영화와는 다르게 어떤 구성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은데, 원작은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구성을 갖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이 달라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원작은 스필버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감상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있고, 주인공의 시각을 때로는 주관적으로 때로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가끔은 회상하고 어떨 때는 현재의 시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독특한 시각적 구성을 갖고 있다. 혹은 번역의 잘못일 것이다.

 

이와 함께, 소년의 눈을 통해서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 직후의 상하이의 혼란과 도망침 속에서 겪는 고독과 상실감에 집중을 하고 있고, 수용소로 향하는 과정과 수용소에서의 삶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J.G.발라드는 인간에 대한 씁쓸한 시선을 던져주고 있다.

 

소년은 수용소에서의 삶을 통해서 많은 성장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정신은 점점 더 망가져가게 된다. 그 과정을 J.G.발라드는 우울함과 허무함을 짙게 풍기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고, 소년은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서 점점 더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물고 있고, 비관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감수성에 집중을 하고 있다면,

소설은 정서의 붕괴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운명’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겪게 되는 경험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과 혼란(주인공의 혼란과 함께 주인공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혼란)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혼란 속에서의 소년의 시선과 정서적 변화들을 J.G.발라드는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고, 작품의 끝에서 보여주는 깊은 허무는 다른 성장 소설에서 맛볼 수 없는 분위기일 것이다.

 

너무 건성으로 읽어서 많은 것들을 놓치기는 했지만,

J.G.발라드의 이례적인 작품인 ‘태양의 제국’은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전쟁이 만들어낸 공허와 혼란을 잘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대표적인 소설들 중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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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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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된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에서는 ‘지의 거인’으로 알려졌고, 국내에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함께 수많은 책들에 둘러싸여서 무언가를 끝없이 습득하려는 그의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는 특정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전문가이기 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교양인 혹은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 자신도 스페셜한 제너럴리스트라는 식으로 자신을 표현했으니 아마도 큰 불만을 갖지는 않을 것 같다.

 

그가 그동안 읽은 책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보다는 그가 어떤 지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지식을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보다 무언가를 습득하고 지식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에만 집중했을 때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를 제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그처럼 노력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고,

그가 제시하는 방식으로도 읽기도 꽤 어려울 것 같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있어서의 ‘지식’은 기본적으로 ‘축적으로서의 지식’이고, 지식을 어떠한 관점에서 실천해야 하는지와 같은 철학적인 자세와 입장보다는 ‘지식’ 자체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과학적인 입장에서 지식을 바라보고 있고,

그런 입장으로 지식을 접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인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그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의 입장에 한편으로는 수긍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은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식의 접근과 축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지식들로 인해서 발생되는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심하고(혹은 언급하지 않고), ‘축적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전복의 지식(기존의 지식체계에 반하는 지식이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게 만드는 지식)’에 대해서도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는 축적자로서,

그리고 지식에 대한 검토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잡은 것 같고, 그런 위치로서 보자면 그는 가장 탁월한 존재일 것이고,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당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거나 관심이 가는대로 무언가를 읽어가는 것보다 그처럼 무언가 확실한 목표와 목적을 갖고 읽어내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참고 : 생각해보면 그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자료를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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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살아있는 동안 꼭 생각해야 할 34가지 질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백종유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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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꽤 알려진 책이고,

생각보다 괜찮은 책이라며 건네받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는 제목부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고, 옮긴이의 글과 저자의 서문, 그리고 목차 까지 순서대로 읽게 된다면 저자가 어떤 의도로 무슨 내용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쉽게 구성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는지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거나 오해를 하도록 만들어서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게 생각이 들기도 하다.

 

저자는 학술 전문 저널리스트이고 꽤 활약 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활약보다는 문제만 만들어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책이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 되었다.

 

저자는 원래는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철학이 갖고 있는 고리타분함과 시대에 뒤쳐져만 가고 있는 정체됨에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고, 그런 실망감을 갖고 있던 와중에 전혀 다른 분야의 학문이었던 뇌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방식인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으며, 뇌 연구와 철학(그중에서도 공리주의)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논의는 다양한 학문에서의 논의를 종합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문들 사이의 벽을 허물며 논의하는 다른 이들의 방식과는 조금은 벗어나 있다. 그는 뇌 연구가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것처럼 많은 의문들을 해명해줄 수 있는 분야이고 이 분야에서 모든 의문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며 그동안 철학이 갖고 있었던 사변적인 방식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비판하며 철학이 갖고 있던 오류들을 과학(더 정확히 말하면 뇌 연구)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의 논의는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에서 악의적인 부분이 엿보이고 있다. 철학자들의 통찰력 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사회성이 부족하고 별종들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뇌 연구자나 과학자들에 대한 삶을 설명할 때는 얼마나 투철한 연구 정신을 갖고 있는지와 얼마나 멋진 인물들인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악의적인 부분이 엿보이고,

그의 시각 또한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와 인접한 학문들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가 아닌 과학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게 생각된다.. 철학과 기타 학문이 전면에 부각되는 경우는 어떠한 객관성을 제시할 수 없는 부분인 도덕이나 정의와 같은 부분을 논의할 때만 적극적으로 논의를 하고 있고, 나머지 인식이나 통찰력 또는 감정과 같은 것을 논의할 때는 얼마나 철학이 뇌의 구조적인 측면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논의했는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의 서문에서부터 이미 그가 철학에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리라 생각은 들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철학을 격하시키면서 반대로 뇌 연구에는 많은 것을 해명할 수 있는 비술처럼 접근하고 있다. 물론 이정도 수준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가 악의적으로 접근했으니 이정도로 악의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그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인용하는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는데, 그가 논의하는 철학들은 대부분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논의하는 철학이면서도 과학과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의 철학들만 선별하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결정적으로 꺼내는 철학적 통찰력은 대부분 공리주의에 한정되어서만 풀어내고 있을 뿐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크게 하지 않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저자는 ‘나’라는 존재를 사회적 존재 혹은 계급적 존재로 파악하는 맑스(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물론의 논의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최근의 철학적 흐름(흔히 말하는 68혁명 이후의 철학)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열정을 바치고 있는 과학과 뇌 연구 분야에 관련되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 선별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의 논의에도 지나칠 정도로 악의적이거나 철학자들의 의견을 간략화 시키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은 내용은 그의 저작을 읽지도 않고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의식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고, 자주 언급하고 있는 니체의 논의들도 많은 부분을 왜곡시키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 대부분을 오해되기 쉽도록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혹은 직접 읽지 않고 개론서들을 읽고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악의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며,

그의 논의는 철학자들의 입장을 자신의 생각에 맞춰버리거나,

혹은 뇌 연구에 더 비중을 두려고 노력하고 있을 분이다.

 

그가 젊을 때 열정적으로 읽어낸 책들과 토론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열심히 읽은 것 같지도 않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보지도 않은 것 같다.

원서에는 참고문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서에는 참고문헌이 없어서 그가 과연 어떤 책들을 참고하며 논의를 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특히나 꽤 거창하게 시작하는 그의 ‘나’에 대한 탐구가 말미로 갈수록 내용은 산만하게 되고, 결론으로 가서는 얼렁뚱땅 혹은 장난하듯이 무심히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을 갖고는 어디서고 학술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기분 나쁜 적은 오랜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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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향하여 - 에스프리 누보 총서 1
Le Corbusier 지음, 이관석 옮김 / 동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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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는 근대 건축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기존의 건축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선동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건축과 관련된 이론서들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서들과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건축에 관한 문외한인 사람들도 읽어보면 어째서 파격적인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색다른 글쓰기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많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있고,

대부분의 내용에서 그림들을 토대로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기본적인 입장은 산업사회(근대사회)는 이전의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이고, 지금의 대량생산 사회에서는 기존의 건축에 관한 입장을 갖고 있어서는 시대에 뒤쳐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쳐짐으로 인해서 더 많은 사회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고,

그 자신의 선언과도 같은 내용으로 새로운 건축의 사고방식을 전달하고 있다.

 

마치 건축에서의 테일러주의 혹은 포드주의자와 같은 느낌이 들고,

건축을 더 이상 거창한 무언가를 짓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혹은 건축의 가장 핵심에 다시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핵심은 ‘쉼’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도시계획의 필요성과 함께,

도시화와 노동자의 밀집화로 인한 주거(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품들의 대량생산과 같이 주택도 대량생산이 필요하고, 비행기와 자동차, 대형 여객선을 예로 들어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주거(주택)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1900년대 초에 주장한 그의 말에 여전한 설득력이 느껴질 정도이니,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또는 선동)이 매우 파격적이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교육제도에 대한 집요한 비판은 커다란 논쟁을 만들어 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프랑스 인은 어떤 분야에 있던지 파격적인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는지 르 코르뷔지에도 매우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뜀뛰기를 하듯이 빠른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주장인지 선동인지 혹은 메모들의 묶음인지 헷갈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야 보다 더 그의 의견을 잘 파악할 것 같지만,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글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도 읽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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