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세상을 지어라
안도 다다오 지음, 이규원 옮김, 김광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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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높아져만 가지만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막연하게만 느껴지게 된다. 그저 다양한 건축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런 저런 건축과 관련된 책들을 통해서 그 감상을 더욱 음미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만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

어떤 구체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침묵으로서 말한다는 것

건축이 공간에 그리고 공간이 건축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조금씩은 느끼게 되지만 아직까지는 그걸 제대로 알아간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그렇다는 것을 알아가고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건축에 대한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막연한 이해도 결국 책을 통해서 얻었거나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알게 된 지식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내가 느끼게 된 생각이고 어디서부터 책을 통해서 얻게 된 생각인지는 솔직히 알 수 없다.

 

그저 건축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가고만 있다는 것이 유일한 진실인 것 같다.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대해서 알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아마도 앞으로도 현대 건축의 대가들 중 한명으로 다뤄질 것이 거의 분명한 건축가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접함은 무척 부족하기만 할 뿐이고, 그나마 그에 대한 지식은 최근에 읽게 된 몇몇 책들을 통한 약간의 언급이 전부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손쉽게 잡게 된 그의 첫 자서전이라는 홍보 문구가 인상적인 ,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안도 다다오가 어떻게 건축을 시작했고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뻔하고 뻔한 내용이리라 생각되었는데, 그 자신이 어떻게 건축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지금의 그가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구성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건축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건축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단지 건축만이 아닌 삶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무척 의미 있고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그동안 건축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되고 책을 통해서 얻게 된 그리고 내 자신이 생각하던 건축이 무엇을 담아내야 하고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안도 다다오는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간결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고, 건축에 대한 안도 다다오의 입장은 쉽게 설득과 공감을 하게 되고 동의하게 되며 그의 입장을 옹호하게 된다.

 

단지 건축가의 자서전으로서 읽기 보다는 건축에 대한 여러 고민들과 그 고민에 대한 어떠한 자신만의 대답과 함께 삶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통찰력으로 가득한 시각은 어떻게 하면 저런 경지까지 올라설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누군가에게 그리고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지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건축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이라고는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안도 다다오의 건축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작품들을 검색한다면 좀 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그의 건축에 대해서 더 자세한 설명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으로 그의 건축에 대해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굳이 그의 건축의 특징을 몇 가지 꼽으라면 우선은 콘크리트일 것 같고, 다음으로는 간결함과 단단함 그리고 강인함과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게 될 것 같다.

 

글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그의 기질과 건축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생각한다면 건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놓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도 다다오 본인은 이런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독학으로 건축이라는 세계에 발을 내딛고 수많은 다툼과 분투의 이어짐 속에서 그 자신만의 건축을 이룩해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기자랑이 아닌 건축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더 느껴지게 되고 건축을 통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 속에서 큰 감명을 받게 되기도 했다.

 

안도 다다오는 우선은 자신의 사무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건축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째서 건축가는 게릴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또한, 조금씩 건축을 통한 도시와의 겨룸과 다툼을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하게 해야 할지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알려주며 지금 현재의 자신의 업무 처리 방식과 규모에 대해서 덧붙여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이어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여행을 통한 경험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건축을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고 건축을 통해서 사회와 대결하고 투쟁하기로 선택하는 과정을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하나의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생각해보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처럼 다뤄지는 스미요시 나가야에 대한 여러 논쟁들에 대한 안도 다다오 개인의 생각과 함께 시작되는 스미요시 나가야에 대한 내용은 무척 인상적인 시작이었고, 사진을 통해서 접했을 뿐이지만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놀랍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홀로 주변의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데, 당시에는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식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입장 속에서 그리고 의도 속에서 그런 건축이 이뤄졌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게 되면서 안도 다다오 스스로 어떤 입장과 태도, 철학을 갖고 건축을 하고 있는지를 매우 솔직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다.

 

스미요시 나가야가 말없이 안도 다다오의 생각을 웅변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말없는 웅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언급하고 있었던 도시게릴라, 극단적인 제약 속에서의 풍부한 공간에 대한 고민,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주거와 공간, 가혹하고 냉혹한 자연을 받아들임, 편리함의 희생, 의도적인 공백과 여백, 완강한 버팀, 금욕적, 자연의 끌어들임과 자연으로의 들여보냄 등 안도 다다오가 항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스미요시 나가야를 통해서 접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다뤄져야 할 건축이었던 것 같다. 이것인 단지 스미요시 나가야가 그의 첫 번째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닌 안도 다다오의 작품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안도 다다오는 숱한 다툼과 타협 없음, 일관성, 완고함, 강인함, 사회와의 어긋남과 갈등, 악조건의 극복의 연속 속에서 자신만의 건축을 그리고 건축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에게 묻는 질문들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자신의 작품들을 예로 들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스미요시 나가야에 대한 논의 다음에는 단순힌 건축이 아닌 도시에 말을 건네는 건축으로 논의를 확장시키면서 어떻게 건축에서 도시를 고려하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안도 다다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도시와 상업건축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상업건축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무척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경제적인 고민 속에서 일정정도의 공공성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논의가 이어지며 이런 이어지는 생각들을 통해서 사회 비평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거품경제의 일본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건축을 지켜나갈 수 있었는지를 얘기해주고 있다.

 

잠시 안도 다다오는 주제를 바꿔서 어째서 콘크리트로 만든 건축물들을 고집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과 함께 그가 어렵사리 완성하게 된 록코 집합주택을 통해서 어떻게 건축이 지역성을 담아낼 수 있는지와 규제와 관료제와 싸워냈는지를 알려주며 건축으로서의 한계와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의도하는 건축을 완성하는 과정 속에서 겪는 제도와의 다툼 중 무엇이 더 힘들었을지 궁금하게 생각될 정도로 두 개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걸작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무척 흥미롭게 들려주고 있다.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와 힘겨운 경험을 통해서 안도 다다오는 단순한 건축이 아닌 누구를 위한 건축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공적-공공공간에 대한 좀 더 깊어진 사유, 지속성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고 있고, 이를 통해서 건축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그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다.

 

결국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로 압축해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공공시설과 건축들을 만들면서 생겨나는 건물의 쓰임새에 대한 수많은 고민은 그 고민에 대한 어떠한 대답으로서의 그가 완성한 건축들을 통해서 약간이라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안도 다다오는 생산과 소비만의 공간이 아닌 살아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고, 그 노력이 결국은 참 된 공공정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논의 뒤에 잠시 방향을 틀어서 건축가에게 필요한 건축주에 대한 입장과 오사카 출신으로서 지구화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해외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해주며 지역만의 특색의 필요성과 고유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건축가가 아닌 인문학자의 입장처럼 생각될 정도로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그가 지금 현재 갖고 있는 고민들인 어린이를 위한 건축과 환경의 중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는 시대에서 건축이 무엇을 해내야 할 것인지를, 어떻게 지을 것이고 어떻게 살려 나갈 것인지를, 고베 대지진을 통해서 어떤 충격을 받았고 재건을 통해서 어떤 전통을 이어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계승이고 그 자신의 건축에서 과연 일본적인 정체성이 있는지를, 새로운 일본의 정체성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최악의 조건 속에서 완성한 빛의 교회를 완성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게 된 건축이라는 직업에 대한 긍지와 빛과 그늘을 얘기하며 나름대로의 삶의 깨달음을 알려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고 있다.

 

뭔가 어정쩡한 마무리이기는 하지만 그의 건축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어색한 마무리는 당연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하다.

 

안도 다다오는 자주 자신이 독학으로 건축의 길을 걷게 되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로 어려움이 무척 컸을 것이고 여전히 어려움들이 간혹 생겨나겠지만 반대로 어떻게 본다면 안도 다다오가 지금의 안도 다다오가 되는데 있어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덕분에 좀 더 생각의 자유와 발상의 전환이 가능하기도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쨌든 ,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앞서 말했듯이 단순히 유명한 건축가의 자서전으로서 읽기 보다는 건축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를 그리고 건축을 통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읽게 된다면 무척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 같고 여러 생각들을 이어지게 하고 옮기면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들을 실제로 접해보고 싶다. 그의 말대로 글과 사진 그리고 그림으로 접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경험하고 느끼면서 그가 말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싶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그래보고 싶다.

 

 

참고 : 너무 좋은 내용이고 글들이라 안도 다다오 본인이 직접 써내려간 내용인지 조심스럽게 의문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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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 한길 히스토리아 3
조르주 뒤비 지음, 정숙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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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계속된다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1340454

중세의 결혼 - 기사, 여성, 성직자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55867605

 

 

나는 단지 그 시대 사람들이 보았던 그대로의 세계를 보도록 시도하고 싶을 뿐이다.

 

 

 

 

조르주 뒤비의 책을 몇 권 읽지는 못했지만 항상 그는 중세시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며 그 시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그리고 그 시대를 말해주면서 겸허함을 보이며 진심으로 그 시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의 글을 통해서 중세시대를 접하게 될 때에는 좀 더 그 시대 속으로 접근하는 것 같고, 그 시대에 머물며 그들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듯이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게 되는 것 같다.

 

조르주 뒤비의 대표작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가 중세시대-봉건사회를 접근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읽은 책들을 통해서 추측한다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듯이 중세시대와 봉건사회에 대해서 논의하고 설명하기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혹은 다른 역사가들이 비교적 관심을 덜 갖는) 계급이나 집단, , 생활상 등을 통해서 그 시대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고 그런 구체적인 모습들을 통해서 사회구조와 특징,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감수성이나 삶의 태도와 방식을 탐구하고 있는데, 대단하지 않은 것들로 생각되던 혹은 그런 것들을 굳이 분석하고 검토하며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가 의문스럽던 주변부에 머물던 것들을 통해서 그 시대를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점은 무척 대단하고 흥미로운 것 같다.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또한 중세시대-봉건사회의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히는 윌리엄 마셜의 생애를 통해서 그 시대의 중요한 축이었던 기사계급에 대해서 그리고 그 기사계급의 삶을 통해서 그 시대가 어떤 구조와 구성으로 되어 있는지를, 그 구조-구성 속에서 어떤 방식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엿볼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단순히 윌리엄 마셜의 태어남과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흐름으로 논의를 진행하기 보다는 각각의 내용들에서는 다뤄지는 시기가 겹쳐지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중세시대와 봉건사회에 대해서 약간은 알고 있어야지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조르주 뒤비는 기사라는 계급을 재구성하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계급 중 하나인 기사계급을 좀 더 이해하려고 하고 그런 이해 속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접근을 위해서 어째서 윌리엄 마셜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이후에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의 죽음부터 다루고 있는 첫 번째 장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죽음을 깊이 염두에 두고 있던 중세시대-봉건사회의 특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고, 죽음의 과정 속에서의 엄숙함과 장엄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조르주 뒤비는 중세시대-봉건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그 생각의 틀과 범위 내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고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항상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단순히 문명화가 덜 되었던 이들이 아닌 지금의 우리들과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간 이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조금은 다른 삶의 태도가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태도이고 이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알게 모르게 내비치고 있다.

 

어쨌든, 윌리엄 마셜의 죽음과 그 이후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길게 설명한 다음 그의 삶의 시작부터 되짚고 있는데, 조르주 뒤비는 그의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그의 삶을 통해서 중세시대-봉건사회의 기사계급의 삶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고, 기사계급의 세계가 어떤 특징과 이해관계 속에서 계급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조르주 뒤비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던 그대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자신의 이해함을 전달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이해의 과정 속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다른 부분에서는 자신도 확신을 갖지 못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겸손하고 솔직한 인정은 그의 분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좀 더 그의 논의에 관심을 갖고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한다.

 

중반부에서 지배계급 사회-세계의 특징에서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다른 저서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가정 속에서 논의가 진행된 것 같아서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조르주 뒤비 본인도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만 머물 뿐 더는 파고들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내용을 읽다가도 책을 덮고 간간히 생각에 잠기게 되기도 했다.

 

무엇을 암시하는 것 같기는 한데,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포기하는 것 같은데, 좀 더 많은 연구와 검토가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이해되지 못했던 부분들이 좀 더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낟.

 

윌리엄 마셜의 삶을 통해서 조르주 뒤비는 중세시대-봉건사회의 가족의 구성, 기사계급의 특징, 그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의 존재에 대한 논의, 계급상승에 대한 논의, 왕과 기사의 관계, 전쟁의 의미, 결혼의 의미 등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이런 논의를 종합한다면 결국 중세시대-봉건사회를 기사계급을 통해서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하나의 계급을 통해서 그 시대를 바라본다는 방식이 얼마나 우수한 방식이고 탁월한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흥미로운 방식이며, 그들의 삶을 탐구함으로써 지금 이 시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조르주 뒤비는 기사계급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윌리엄 마셜의 삶을 통해서 그의 삶과 기사계급을 이해해보려고 하고 있고, 그들이 어떤 이해관계와 삶의 태도와 방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해버리는 시대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알아보고 있다.

 

어쩐지 그의 글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는데, 이제는 더는 그들을 실제로 만날 수 없다는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것 같다.

 

 

참고 : 조르주 뒤비는 중세시대-봉건사회가 마치 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시대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우리들의 선입견을 깨트리기 위해서인지 반복해서 그 시대에도 돈이 무척 중요했던 시대였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그 중요성에 대한 입장이 지금처럼 돈 자체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거나 혹은 돈-권력으로서의 입장이 아닌 돈이 없음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치욕-무력감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이유라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런 논의를 통해서 지금 시대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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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로버트 D. 헤어 지음, 조은경.황정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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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어하는 범죄와 관련된 주제의 책들에 대해서 무척 관심이 크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중고서점에 꽂혀 있던 진단명 사이코패스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쉽게 눈이 들어와 골라잡게 되었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고 논의였기 때문에 금방 읽게 되었다.

 

저자인 로버트 D. 헤어는 사이코패스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하지만 그 권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 얼마나 권위가 있는지 그리고 그의 논의가 얼마나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에 담겨진 내용으로서만 판단한다면 꽤 중요한 위치에 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마치 일상용어처럼 되어버렸을 정도로 쉽게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각해 본다면 사회적으로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쓰게 된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고, 그것의 제대로 된 의미도 잘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그저 또라이나 미치광이의 좀 더 세련된 형태의 혹은 전문가적 용어나 유행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목부터 사이코패스를 달고 있는 진단명 사이코패스도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 번갈아가면서 걸핏하면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일러두기를 통해서 간단하게 다루고 있었어도 명쾌하게 이해되지도 않고 있고, 희미하게만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내용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이것을 읽었다고 사이코패시와 사이코패스에 대해서 뭔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이해시키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그 노력이 많이 빛이 바랜 것 같다.

 

저자가 진단명 사이코패스에서 목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에 대한 보다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 판단과 구별을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서 이해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모색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내용을 다 읽었음에도 깨우침이 부족한지 사이코패시가 좀 더 넓은 의미로서 사이코패스가 좀 더 좁은 의미와 구체성을 갖고 있는 의미로서만 이해가 되고 있을 뿐이었고, 좀 더 이에 대한 논의를 해준 뒤 내용이 진행되었으면 좋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어쨌든, 저자는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에 한해서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그들의 여러 특징들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어떤 존재들인지를 이해시켜주고 있고, 그들과 뭉뚱그려서 다뤄지는 다른 정신질환 혹은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알려주며 좀 더 명확하게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를 정의하려고 하고 있고 구분을 주려고 하고 있다.

 

그들의 특징과 구분, 정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들을 통해서 조금씩은 접하기는 했지만 진단명 사이코패스는 다른 책들에 비해서 좀 더 넓은 범위로서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를 정의내리고 있다는 점이 그동안의 연쇄살인범에 한해서 정의를 내리려는 일반적인 접근과는 다른 점인 것 같고, 지나치게 범위를 넓혀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면서도 저자가 상세하게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의 특징들을 다루면서 그 특징과 구분 속에서 다양한 방식의 사이코패스와 사이코패시의 모습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해서 접하게 된 선입견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만들어주고 있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내용은 후반부에 많이 있었는데, 화이트칼라 사이코패스에 대한 내용은 특별할 것이 없기는 했어도 일상에서 어떻게 그들을 만나게 되는지를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으며, 이어지는 그들의 언어 사용에 대한 논의는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들의 특징과 일반인들과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되었다.

 

저자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구분하려고 하고 있고, 그들을 어떤 식으로 사회적인 접근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단순히 탐구하고 연구로서의 대상이 아닌 좀 더 실천적인 접근과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본보기가 될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어떤 극단 속에서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다양한 고려 속에서 자신의 결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저자는 무언가 뚜렷한 답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을 하는 듯이 현재로서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고 그들의 유전적인-태생적인 문제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삶의 과정에서의 문제 모두가 고려의 대상이며 어떤 방식으로도 그들은 쉽게 그 잔인성을 제어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며-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약간은 허무하고 조금은 아쉬운 대답에 흐지부지한 마무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결론이 지금의 한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점점 더 사이코패시와 사이코패스가 활동하기 좋아지기만 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인데, 바로 그런 존재들이 지금 이 시대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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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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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양한 주제를 갖고 자신만의 글쓰기와 생각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빼어난 능력을 보이는 알랭 드 보통은 무언가에 대해서 좋은 정돈과 흥미로운 내용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가 그동안 다뤘던 여러 주제들(사랑, 건축, 불안, 여행 등)은 무언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들거나 독보적인 의견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각각의 주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주요 논의들을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주고,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어쩐지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함께 알고 싶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글쓰기의 모범 중 하나인 것 같다.

 

하지만 일의 기쁨과 슬픔은 어쩐지 그동안의 알랭 드 보통의 글이 보여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무엇도 제대로 발휘되지가 않는, 그의 글답지 않게 도통 흥미롭게 읽혀지지가 않고 솜씨 있게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논의를 못하고 있는데, 어쩐지 이런 실패가 그의 글이 예전만 못해졌기 보다는 선택한 주제로 인해서 그의 글의 매력을 보여주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해보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은 다양한 직업을 통해서 혹은 일-노동-업무를 통해서 자본주의 근대사회 혹은 지금 이후의 사회에서의 삶을 엿보려고 하는 듯이 보이는데, 그는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인 화물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고, 이어서 물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이 얼마만큼 복잡하게 이어져 있으며 거대함으로써 다가오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비스킷과 관련된 지루한 논의를 통해 얼마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되기만 하는 비스킷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것들이 오직 돈이라는 이유를 통해서 엄숙과 진지함을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런 설명과 함께 그곳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일-노동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을지를, 어떤 의미가 부여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고 있고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의미와 동기부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알랭 드 보통은 항상 그렇듯 현실적인 논의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데, 비스킷에 대해서 논의에서도 비스킷을 만들고 판다는 것이 어쩌면 별 것 아니기는 하지만 그 별 것 아님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살아감이 가능하지 않았을 때의 경우(실업률, 범죄율, 자살률 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바로 이런 점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혹은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의 특이성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노동의 진부함을 생각하며 희미한 절망감을 느끼다가도, 거기에서 나오는 물질적 풍요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이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가 일을 통한 기쁨과 슬픔보다 그것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현재의 세상이 어떤 구성과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비스킷에 대한 논의 후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최초의 시대로서 지금-현재를 정의하고, 일에 대한 고귀함을 찬양하기 시작한 백과사전파에 대한 간단한 논의 후 직업 상담가에 대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무관심한지를 그리고 비관주의적 자부심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그저 주어진 현재의 조건 속에서만 삶을 꾸려나가려고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기도 해서 조금은 혼란스러운데, 그가 이 시대를 담아내려고 하는 것인지 그저 일-노동이라는 주제 속에서 무언가를 모색하려고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읽혀지지가 않고 있다.

 

이런 헷갈림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로켓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시대가 천재들의 시대에서 집단의 시대로 변화되었음을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서 기술적 숭고함의 시대라는 정의를 내리기도 하는 등 그 스스로도 무엇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인지를 좀처럼 정리하지 못하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처럼 일-노동에 대해서 어떤 명확함을 찾는 방식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 그 자신이) 경험한 사례들을 통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접근과 이해가 얼마나 일-노동에 대해서 적절한 분석으로 이어졌는지는 무척 의문스럽게 느껴진다.

 

송전 공학에 대한 글에서 드러나듯이 알랭 드 보통은 기존의 글들에 비해서는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려고 하고 있고, 논의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럽게 정리하질 못하고 있고, 어떤 흥미로움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게 될 뿐이다.

 

이는 일상과 회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쩐지 알랭 드 보통은 르포르타주와 같이 현장취재를 통한 무언가를 담아내려는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우리들이 자주 말하게 되는 밥벌어먹기의 피곤함에 대해서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는 의문스럽기만 하다.

 

오히려 알랭 드 보통의 글쓰기가 여전한 효과를 발휘할 때는 그런 경험 / 체험을 통한 글이 아닌 (경험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스스로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만의 정의를 내릴 때였는데, 그런 글들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크게 차지하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극히 부분적이기 때문에) 마치 섬광과 같이 순간적으로만 그의 빼어남이 번쩍거리고만 있다.

 

창업자에 대한 논의를 우겨넣은 다음 항공 산업에 대한 글을 통해서 알랭 드 보통의 여전한 매력적인 글쓰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제는 낡고 오래되어 모하비 사막에 버려진 항공기들의 잔해물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을 18세기 독일인들이 이탈리아의 고대 로마의 풍경에 황홀해 했다는 폐허에서의 기쁨이라는 표현과 유사한-동일한 감정으로서 이해하면서 이런 이해를 통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이해하는 내용을 통해서야 알랭 드 보통의 이전과 같은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 사회가 과거와는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어떠한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라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하고 있고, 이로 인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일-노동이 어떠한 영속성도 갖지 못하고 끊임없이 불안감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고, 이런 이해는 어쩐지 이전에 그가 발표했던 불안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는데, 아쉽게도 그가 불안에서 어떤 논의를 했었는지 잊게 된지가 오래되어서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켜서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명쾌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알랭 드 보통의 논의에서 폐허에서의 기쁨에 대한 과거의 정의를 그와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는데, 지금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어떤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을 바라봄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시대가 해내지 못하는 동기부여가 이 시대의 잔해물인 우리 자신들이 하나의 폐허처럼 혹은 폐품과 같은 존재들로서 알게 모르게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일을 통한 어떠한 기쁨도 그리고 동기부여도 부족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감상적인 글쓰기를 하다 느닷없이 일-노동을 긍정하고 우리에게 안겨주는 품위 있는 피로를 존중해야만 한다는 알랭 드 보통의 결론은 조금은 뜬금없는 것 같고, 이런 결론이 어쩐지 그가 이미 결론을 내린 다음에 여러 논의들이 이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도 항상 타협하듯이 혹은 지금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듯이 결론내리는 알랭 드 보통이었기 때문에 약간은 예상하기도 했지만 그가 논의하던 여러 내용들과 그가 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이처럼 서투른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이 얼마나 일-노동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가 얼마나 그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같은 글을 통해서 먹고 살지 못하고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서는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고 간간히 날카로움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가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다른 저작들에 비해서 제대로 읽혀지지가 않는 것 같고,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무언가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자신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고 하다가 결국 그 시도가 실패하는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언가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얼마나 고민이 필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물론, -노동에 대한 글에 대한 또다른 글인 내 글에 대해서도 이런 비판은 당연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부족한 이해만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랭 드 보통의 글로서는 어떤 식으로도 일에 대한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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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김석철 지음 / 창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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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상형문자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5989715

20세기 건축산책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08274533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5603000

 

 

 

 

건축가 김석철의 글을 그리고 그의 책을 좋아하지만 어쩐지 그의 글은 건축가의 글이기 보다는 건축에 대해서 무척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인문학적인 관심 속에서 건축을 바라보고 있는 이의 글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는 건축을 통해서 건축을 말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건축에 대해서 논의를 할 때, 되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표현을 통해서 설명해주면서도 어쩐지 무척 개인적인 감정을 많이 담아내면서 자신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흥미롭게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만 보다는 호감을 갖고 있는데, 이런 입장 속에서 김석철의 글은 건축을 모르는 사람은 건축의 특성을 무척 풍부한 표현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건축에 대해서 관심을 높이거나 갖게 만들 수 있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건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지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건축을 말하기 보다는 엉뚱한 것들에 대해서만 실컷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석이 있을 뿐이고 감상적인 표현만이 있을 뿐이지 정작 건축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다는 비판은 분명 타당한 비판일 것 같다.

 

저자가 이런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대해서 글을 남기려 할 때에는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생각해볼만한 문제일 것 같다.

 

어쨌든 세계건축기행은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정리한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하고 짧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로 현대 건축들이 아닌 오랜 기간 남겨지고 지켜져 온 건축들을 통해서 저자는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하고 있다. 오래된 건축들을 통해서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유럽의 건축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일본, 라틴 아메리카, 미국, 이집트, 인도 등 간간히 흔히들 말하는 고전 건축의 중심지 이외의 곳에 있는 주요 혹은 유명한 건축물들에 대해서도 조금씩은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죽음의 공간, 신의 공간, 삶의 공간과 인간의 공간이라는 4개의 주제를 갖고 건축과 도시라는 (저자의 말대로) ‘인간의 역사를 증언하는 상형문자에 대해서 얘기해주고 있지만 저자의 글쓰기 방식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어떤 건축과 도시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한편으로는 분석하고 전문가의 시각으로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그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오는-침잠하는 경향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의 침울한 분위기 혹은 짙게 깔린 죽음과 허무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부담스럽게 느껴질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읽으면서도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시각이나 지식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고, 건축을 어떤 방식으로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이런 저런 다양한 지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고, 단지 여러 가지의 것들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인지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게 되는데, 사람들에 따라서는 건축을 말하기 보다는 건축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만을 쏟아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저자의 글에 대해서 불편한 생각을 갖게 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간간히 각각의 건축물들에 대한 특징과 놓쳐서는 안 될 핵심에 대해서 뭔가를 말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논의의 양과 질이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에는 동의하기 때문에 저자의 글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의 입장에 선뜻 반박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냥 개인적으로는 이런 성향의 글도 좋다는 말로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하게 될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죽음의 공간부터 인간의 공간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동시키고 있는데, 저자의 글의 특징을 그리고 관심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죽음의 공간에 대해서 논의들은 흥미롭게 읽혀지고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글에서 별다른 흥미가 느껴지지를 않게 되고 있는데, 이런 내용에 대한 판단이 저자가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죽음이라는 주제가 좀 더 저자의 글을 명확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서인지 반대로 그의 글을 읽는 독자인 내 자신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죽음의 공간에 대한 논의에만 흥미를 느껴서인지는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를 않는다.

 

이런 방식의 읽기를 떠나서 후반부의 논의는 대체로 심심하고 건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머무를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떤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쳐있고 피곤함이 잔뜩 묻어나는 저자의 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전세계 곳곳에 있는 수많은 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건축들의 특징과 구조 그리고 그것을 그것으로서 느낄 수 있는 열려진 시각이 부럽게 느껴질 뿐이다.

 

또한, 그런 다양한 건축들을 접하면서 항상 한국을 떠올리고 한국의 도시와 구조 그리고 건축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가해보는 언급을 통해서 과연 한국에서는 어떤 건축을 해야만 더 좋은 건축과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기도 한다.

 

건축과 공간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있는 것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열심히 아무거나 읽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는 뭔가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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