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 살아있는 동안 꼭 생각해야 할 34가지 질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백종유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꽤 알려진 책이고,

생각보다 괜찮은 책이라며 건네받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는 제목부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고, 옮긴이의 글과 저자의 서문, 그리고 목차 까지 순서대로 읽게 된다면 저자가 어떤 의도로 무슨 내용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쉽게 구성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는지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거나 오해를 하도록 만들어서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게 생각이 들기도 하다.

 

저자는 학술 전문 저널리스트이고 꽤 활약 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활약보다는 문제만 만들어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책이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 되었다.

 

저자는 원래는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철학이 갖고 있는 고리타분함과 시대에 뒤쳐져만 가고 있는 정체됨에 많은 실망을 하게 되었고, 그런 실망감을 갖고 있던 와중에 전혀 다른 분야의 학문이었던 뇌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방식인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고 있으며, 뇌 연구와 철학(그중에서도 공리주의)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논의는 다양한 학문에서의 논의를 종합하고 있기는 하지만 학문들 사이의 벽을 허물며 논의하는 다른 이들의 방식과는 조금은 벗어나 있다. 그는 뇌 연구가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것처럼 많은 의문들을 해명해줄 수 있는 분야이고 이 분야에서 모든 의문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논조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며 그동안 철학이 갖고 있었던 사변적인 방식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비판하며 철학이 갖고 있던 오류들을 과학(더 정확히 말하면 뇌 연구)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의 논의는 일정 부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에서 악의적인 부분이 엿보이고 있다. 철학자들의 통찰력 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사회성이 부족하고 별종들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뇌 연구자나 과학자들에 대한 삶을 설명할 때는 얼마나 투철한 연구 정신을 갖고 있는지와 얼마나 멋진 인물들인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 그대로 악의적인 부분이 엿보이고,

그의 시각 또한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와 인접한 학문들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가 아닌 과학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게 생각된다.. 철학과 기타 학문이 전면에 부각되는 경우는 어떠한 객관성을 제시할 수 없는 부분인 도덕이나 정의와 같은 부분을 논의할 때만 적극적으로 논의를 하고 있고, 나머지 인식이나 통찰력 또는 감정과 같은 것을 논의할 때는 얼마나 철학이 뇌의 구조적인 측면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논의했는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자의 서문에서부터 이미 그가 철학에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리라 생각은 들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철학을 격하시키면서 반대로 뇌 연구에는 많은 것을 해명할 수 있는 비술처럼 접근하고 있다. 물론 이정도 수준으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가 악의적으로 접근했으니 이정도로 악의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그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인용하는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는데, 그가 논의하는 철학들은 대부분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논의하는 철학이면서도 과학과 연결되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의 철학들만 선별하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결정적으로 꺼내는 철학적 통찰력은 대부분 공리주의에 한정되어서만 풀어내고 있을 뿐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크게 하지 않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저자는 ‘나’라는 존재를 사회적 존재 혹은 계급적 존재로 파악하는 맑스(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물론의 논의는 전혀 다루지도 않고 있고, 최근의 철학적 흐름(흔히 말하는 68혁명 이후의 철학)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열정을 바치고 있는 과학과 뇌 연구 분야에 관련되어 설명할 수 있는 부분만 선별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의 논의에도 지나칠 정도로 악의적이거나 철학자들의 의견을 간략화 시키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또한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은 내용은 그의 저작을 읽지도 않고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의식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고, 자주 언급하고 있는 니체의 논의들도 많은 부분을 왜곡시키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 대부분을 오해되기 쉽도록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혹은 직접 읽지 않고 개론서들을 읽고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켰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악의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며,

그의 논의는 철학자들의 입장을 자신의 생각에 맞춰버리거나,

혹은 뇌 연구에 더 비중을 두려고 노력하고 있을 분이다.

 

그가 젊을 때 열정적으로 읽어낸 책들과 토론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열심히 읽은 것 같지도 않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보지도 않은 것 같다.

원서에는 참고문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서에는 참고문헌이 없어서 그가 과연 어떤 책들을 참고하며 논의를 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특히나 꽤 거창하게 시작하는 그의 ‘나’에 대한 탐구가 말미로 갈수록 내용은 산만하게 되고, 결론으로 가서는 얼렁뚱땅 혹은 장난하듯이 무심히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을 갖고는 어디서고 학술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기분 나쁜 적은 오랜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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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향하여 - 에스프리 누보 총서 1
Le Corbusier 지음, 이관석 옮김 / 동녘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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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는 근대 건축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기존의 건축에 대한 관념에서 벗어나도록 선동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건축과 관련된 이론서들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서들과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알 수 없기는 하지만 건축에 관한 문외한인 사람들도 읽어보면 어째서 파격적인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색다른 글쓰기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많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있고,

대부분의 내용에서 그림들을 토대로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기본적인 입장은 산업사회(근대사회)는 이전의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이고, 지금의 대량생산 사회에서는 기존의 건축에 관한 입장을 갖고 있어서는 시대에 뒤쳐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쳐짐으로 인해서 더 많은 사회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고,

그 자신의 선언과도 같은 내용으로 새로운 건축의 사고방식을 전달하고 있다.

 

마치 건축에서의 테일러주의 혹은 포드주의자와 같은 느낌이 들고,

건축을 더 이상 거창한 무언가를 짓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혹은 건축의 가장 핵심에 다시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핵심은 ‘쉼’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도시계획의 필요성과 함께,

도시화와 노동자의 밀집화로 인한 주거(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품들의 대량생산과 같이 주택도 대량생산이 필요하고, 비행기와 자동차, 대형 여객선을 예로 들어 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주거(주택)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사회에서는 1900년대 초에 주장한 그의 말에 여전한 설득력이 느껴질 정도이니, 당시로서는 그의 주장(또는 선동)이 매우 파격적이었을 것이고, 그와 더불어 교육제도에 대한 집요한 비판은 커다란 논쟁을 만들어 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프랑스 인은 어떤 분야에 있던지 파격적인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는지 르 코르뷔지에도 매우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뜀뛰기를 하듯이 빠른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서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주장인지 선동인지 혹은 메모들의 묶음인지 헷갈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이야 보다 더 그의 의견을 잘 파악할 것 같지만, 건축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의 글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도 읽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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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
찰스 프레드 앨퍼드 지음, 이만우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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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흥미를 끌게 만드는 제목과 함께,

그 흥미를 (조금은) 좌절시키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는 찰스 프레드 엘퍼드의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고 생각하는 ‘악’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탐구를 하고 있다.

 

저자는 다양한 고전들과 실제 있었던 (끔찍한)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실제 각종 범죄를 저질렀던 재소자들의 면담을 통해서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엘퍼드는 기본적으로 멜라니 클라인과 그와 관련된 연구자들의 이론적 틀을 갖고 ‘악’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개인적으로는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기도 하고, 저자인 엘퍼드도 클라인의 이론적 성향을 특별히 설명해주지도 않고 있어서 조금은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저자인 엘퍼드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악’에 대한 편견을 해체시키고 있고, ‘악’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두려움’ 혹은 ‘모호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기존에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악’이라는 범위도 최대한 확장시켜서 ‘악’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갖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많은 것들이 악이고,

그 악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남’ 또는 (‘지배’가 아닌) ‘받아들임’ 또는 ‘승화’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악’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 혹은 우리 자신이 ‘악’과 관련 없는 거리감을 갖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악’이 우리를 지배할 것 같다는 방식의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전반적으로 그가 면담했던 재소자들의 의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 관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악’을 대했었고,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론적으로 많은 부분 부족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읽어나가는 것에 조금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분석들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해가 조금은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또한 그가 밀그램의 연구 결과와는 달리 인간의 ‘악’한 행동이 하나의 구조나 관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수동적인 입장만을 갖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 행동을 자발적으로도 할 수 있다는(즉, 능동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갖고 있을 그 ‘악’을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보다 긍정적인 혹은 배출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색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기도 하고, 그의 분석이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또한 최근 들어서 다양한 잔혹한 범죄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악’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엘퍼드의 논의에서 그가 기본적으로 ‘악은 두려움이다’라는 논조로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결국 그는 ‘두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어째서 두려움을 느끼는지 그리고 두려움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는 공포와 악이라는 것을 두려움으로 말을 바꾸는 것일 뿐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 : 번역자는 ‘향락의 전이’를 번역하여 엄청난 악명을 갖고 있는 분인데, 왜 악명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문장 번역이 엉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원본과 대조할 정도의 수준 있는 독자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꽤 알려진 학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이름을 (영어식의) ‘노버트 엘리아스’라고 성의 없이 번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엘퍼드의 책이 번역 및 출판되기 이전에 ‘문명화과정’과 같은 책들이 이미 번역되어 그의 이름을 (어느 것이 정확한지를 떠나서) 적절하게 기재할 수 있었는데도 저런 식으로 번역을 해버렸다는 점에서는 순전히 번역자의 성의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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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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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부터인가 건축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아마도 그 관심은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관심 때문에 책방에 가게 되면 건축과 공간 그리고 디자인과 관련된 책들이 모여져 있는 곳을 들리게 되었고, 그곳에 꽂혀져 있는 책들 중 몇 개의 책들을 뒤적거리고 그 책들 중 가장 읽기가 쉬울 것 같은(혹은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구하게 되었다.

 

김석철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그리고 글에 대해서도 잘은 모른다.

나름 유명하신 분인 것 같은데,

유명세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어차피 건축에 대한 문외한이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지만.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은 그가 이것 저곳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으게 된 책이고, 그렇기 때문인지 조금은 건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의 글이기도 한 것 같다.

 

평소부터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축가들 그리고 20세기 건축에서 빠질 수 없는 탁월함을 보였던 건축가들의 대표작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에 대한 비평을 찾아낼 수 있지만 전문적이고 세밀한 소개와 비평이기 보다는 일종의 관광가이드와 같은 소개로 자신의 발언을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알려면 알아서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건축의 문외한이면서도 한두번 들어본 사람들도 있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번 보았던 것 같은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통해서 조금은 그 건물에 대해서 그리고 20세기 건축에 대해서 조금은 달리 보이게 되는 것 같고, 지금도 걷고 있는 주변 건물들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자신이 어떻게 건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솔한 글은 꽤 인상적이고, 간간히 건축가들에 대해서 설명할 때의 그의 감동어린 회고를 읽을 때는 더 많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도통 느껴지지 않고 있다. 그냥 일반 건물에 비해서 특이하다는 느낌이거나 멋지다는 느낌만이 들고 있을 뿐이다.

 

건축이 사회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각각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그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철학 또는 시각이 하나의 입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생각이든지 자신만의 입장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항상 믿으면서도 의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꽤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은 건축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경제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자유로움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겠지만 꽤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부담감이 있는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라고 말하는 뜻은 아니다. 그 경제적 부담감이라는 것이 없어질 때 얼마나 창조력이 발휘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참고 :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이후에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를 읽고 있는데, 김석철은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과 ‘주택(주거)’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은 건물의 건축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게 된다면 르 코르뷔지에의 보다 중요한 점들을 놓치게 된다는 점에서 큰 실수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한국사회와 같이 주거와 주택과 관련된 부분이 매우 중요한 사회를 그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그가 놓친 것들은 매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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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마지막 기회 - 세 대통령이 초래한 제국의 위기를 넘어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김석원 옮김 / 삼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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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는 두 개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고(이것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두 개의 체제 중 하나의 체제는 미국(그리고 그 주변국들)에 의해서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로 패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승리이고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과정과 결론 속에 수많은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고리타분하고 복잡한 얘기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미국은 그 이후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견에 대해서 큰 반박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승리로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을 맺으리라 생각되었던 세계는 보다 더 급격한 변화를 그리고 불안정을 보여주게 되었고, 그 급변과 불안정 속에서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위상은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브레진스키의 물음은 여기서 시작되고 있고, 그의 물음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 이후에 집권했던 세명의 지도자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통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것이 부족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하게 된다.

 

브레진스키는 타고난 전략가이고, 그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이 가장 이득을 줄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의견에는 냉정함과 함께 치밀한 계산이 담겨져 있다.

 

그의 평가로는 아버지 부시를 시작으로 해서 클린턴, 그리고 아들(이자 얼간이) 부시의 순으로 집권자로서 시대와 세계에 대한 리더로서의 적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고, 그 근거를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으로 그의 분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분석이 갖고 있는 명료함과 치밀함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작에도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고, 뒤늦게 읽기는 했지만 아주 늦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말을 돌리거나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대한 단호한 평가와 함께 그동안 무엇이 부족했고,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 부시에 대해서는 뛰어난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고, 클린턴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물론, 아들 부시에 대해서는 칭찬할 부분을 찾을 수도 없기 때문인지 담담하게 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망치게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망칠 수도 없다는 식의 무표정한 담담함으로 느껴진다.

 

브레진스키는 이전 ‘거대한 체스판’과 같은 저작에서는 당시의 정세를 분석하고 그 정세분석과 향후의 방향에 대해서 모색함으로써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를 들려주었다면, 이번 ‘미국의...’는 기존의 그의 분석방식에서 ‘지도자(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중요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인 것 같다.

 

그가 점점 더 마키아벨리처럼 되어가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그는 마키아벨리였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쨌든 그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제도’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이 결국 지도자가 어떤 운용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혹은 어떤 파트너들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큰 특이점을 보이는 것 같다.

 

이제는 시스템이 모든 것을 장악했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떤 변화도 모색할 수 없다는 관점이 우세한 상황에서 그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고, 어쩐지 그의 생각에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는 현재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들을 서술하면서 그 사안들이 어떻게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의 몰락이 어떠한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 말하며 그 이후의 세계의 모습과 세명의 지도자로 인해서 그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분석하며 앞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 모색을 해야 하고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야 하는지 들려주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여전히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으로 어떻게 미국이 지도국(또는 지도자)으로서의 모습과 본보기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그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있다.

 

약간은 의외의 해결책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상을 할 수 있는 해결방안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지도자(오바마)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민주당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과는 다르게 움직여지게 마련이고, 그의 분석에도 어느 정도의 한계 또는 그릇된 판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분석과 제시들이 갖고 있었던 철저한 현실적인 판단이라는 점에서 그의 의견은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공통된 규범과 국가들 간의 그리고 사회 간의 유기성을 강조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 미국이 보다 선도적이고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절제와 온정(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브레진스키의 시각을 갖고도 다양한 분석 또는 해석을 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장황스러운 분석을 하기 이전에 그가 갖고 있는 치밀한 현실감각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국내의 문제들에 대해서 그는 세밀하게 다루지 않고 있고, 굵직한 문제점을 간단히 거론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고,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경제적인 문제와 불평등에 관해서도 특별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는 전략가이고, 정치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아예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을 찾아내기 보다는 그의 시각 자체를 받아들이며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말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현실을 파악하고(그는 말 그대로 그냥 그대로 이 시궁창과 같은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파악한 결론에 따라 앞으로 어떤 선택을 혹은 모습을 보여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제 미국의 헤게모니가 많이 위축되었고, 이전에 갖고 있었던 이점들이 약해진 상황에서 그는 이 기회가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미국의 선택이 어떤 선택을 보일지 혹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고 있는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따라 당연히 모든 것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 모든 국가들은 또다른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참고 : 그는 ‘거대한 체스판’에 비해서는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한반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크게 관심을 갖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햇볕정책에 대해서 조금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합의에 의거해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햇볕정책이 갖고 있는 독자적인 움직임에 비판적이며, 일관성은 있지만 그런 일관성은 좋지 않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반론 또한 가능하겠지만 그건 아마도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바라보는 것과 실제 당자로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일 것 같다. 혹은 손해와 이득으로서 바라보는 사람이거나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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