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 나남신서 138
미셸 푸코 지음, 이영목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권 ‘쾌락의 활용’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여주고 있는 3권 ‘자기에의 배려’는 읽어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인지 긴 시간을 읽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그리 많은 내용이 기억나진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 그럼에도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낯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가장 알맞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역설적으로도 느껴지게 되는 ‘자기...’는 자기 자신에게 성적인 배려를, 쾌락의 활용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 외부-교육의 시선 속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인지를, 어떤 식으로 통제받고 일정한 틀과 규율-교화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지를,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성에 관한) 기독교적 교화 이전 얼마나 기독교적 교화와 닮은 방식들이 있었는지를(혹은 어떤 식으로 기독교적 교화가 그것들을 교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하지만 그 방식과 관점 그리고 여러 시도들이 어떤 식으로 다르기도 했는지를 (혹은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다뤄내고 있다... 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것이 맞는지 그게 아닌지는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질 못하겠다.


제대로 읽었는지 자신이 없다.


성과 쾌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어떤 식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성적 긴장의 해소가 아닌 통제와 권력 그리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그런 식으로 발전적 혹은 확대된 관심이 어떻게 자기, 타자, 그리고 부부관계와 동성애에 하나의 기준과 (일종의) 법칙이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그 과정의 기원, 원형을 찾으면서 (반대로) 지금 시대의 성에 대한 관심과 관점들의 틀을 생각해보게 된다.


동성애를 기피하고 이성애와 부부관계를 좀 더 옹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그것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면서 엄격함과 절제, 그리고 지배-복종이 하나로 겹쳐지도록 만들고 있으며, 그 정교한 틀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복잡한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에는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하고 이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그저 그런 논의들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이런 논의들을 소화해내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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