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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존 르 카레
1931.10.19 – 2020.12.12
존 르 카레의 죽음이 느닷없거나 충격적인 건 아니지만 분명 마음 한구석에 슬픔이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쩐지 그의 소설을 몇 개 더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때맞춰 (공교로운 것인지 의미심장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시의적절한 것인지) 읽게 된 ‘스파이의 유산’은 마치 존 르 카레 자신의 과거를 되짚듯 혹은 부끄러운 뒷모습이 들춰지려는 것을 막기도 하고 곰곰이 기억을 되살리듯이 피터 길럼을 통해서 그때 그 시절을, 조지 스마일리가 서커스에서 지내던 그 순간을 다시 회고하고 있다.
추억이란 항상 아름다운 부분만 남겨두려고 하고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싶고 마음에 드는 순간만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추억이지만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부분을 괴로우리만큼 후벼 파고 있고 감춰두고 싶은 과거를 계속해서 들춰내고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익숙한 이름-이들을 소환하고 있고 기억해내고 있다.
그걸 존 르 카레 본인이 직접하고 있으니 거기에 대해서 뭘 말하고 싶어지진 않게 된다. 남들이 아닌 그 스스로 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유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잔인한 혹은 고통스러운 회상을 통해서 비어져 있던 부분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식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지 조심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는 화려한 스파이가 아니라, 인간적인 고뇌를 품은 동시대 인물로 스파이를 그려 온 르카레. 흥미롭게도 이번 작품은 르카레의 분신 같은 캐릭터 스마일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스마일리의 부하 피터 길럼의 1인칭 소설이다. 길럼은 이미 스파이에서 은퇴한 상태지만 과거 사건이 문제가 되자 다시 한번 정보부의 부름을 받는다. 『추운 나라』에 이어 『유산』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윈드폴 작전>의 앨릭 리머스는 물론 컨트롤, 한스-디터 문트, 빌 헤이든, 짐 프리도까지 르카레의 팬이라면 반가워할 이름들이 속속 등장한다.
르카레는 『유산』을 통해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냉전기를 되돌아보며, <그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냉전기를 살던 사람들이 냉전이 끝나면 펼쳐지리라 생각했던 이상적인 세계와 달리, 현대 세계에는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고 냉전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우리가 한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는 질문은 사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향해 있는 질문인 것이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즐겼던 사람이라면 냉전에 대한 회고를 그리고 남겨진 유산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