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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최신개정판
허지원 지음 / 김영사 / 2020년 11월
평점 :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주장이 들어간 글은 비평의 강을 무사히 건너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글이 짧은 에피소드식으로 되어 있어서, 글에 대한 화답도 쪼개졌다.
1부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융과 아들러의 이론을 가지고 버무려 놓았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가면과 그림자가 있다. 자존감은 그림자와 열등의식이라는 것으로 인해 낮을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저자는 자존감은 높을 수가 없는데, 높은 자존감에 열을 올리는 글들이 판을 친다고 한다. 그건 모두가 자존감이 높아지고 싶다는 열망을 건드리기 위함이다. 저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고 싶은가? 나는 자존감이 낮아요를 인정하고 다음은? 심지어 유아들의 자존감을 측정하는 검사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비판한다. 자존감을 측정하는 도구를 유아로 폭을 넓혀서 연구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이를 연구하여 학회에 발표한 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글쓰기는 씁쓸함을 낳는다.
나는 ‘다 그렇게 살아’,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은 참 싫다.
사람의 무지를 시대가 그랬습니다. 라는 말로 단정할 수 있을까. 보살핌을 주지 못했던 부모를 시대가 그랬습니다. 라는 말로 단정할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말로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표현될 수 있을까.
나의 부모는 매일같이 싸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의 불길을 거세져갔다. 경찰이 출동하는 날도 잦아졌다. 그 화는 말리는 자식에게까지 번져 아이의 방문을 부수고 난도질을 했다. 외상. 하루 24시간 중 싸우는 시간은 3시간여. 나머지 21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 사람이 외상을 당하는 시간은 하루 중, 한 달 중, 일 년 중, 극히 일부분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번 받은 외상은 그렇지 않은 시간들을 모두 덮어버린다. 이런 것들이 부당한 취급에 속할까? 그래서 나는 다 그렇게 사는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나를 생각하며 살고 싶다.
저자는 각자의 가면을 만들어 척하기를 하라고 한다. ..하는 척. 나는 그런 가식이 싫다. 내가 만든 가면이 나로 뒤덮어 버리는. 그리고 자신만의 자기와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에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기 혼자서만 이 간극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가식적이고 싶지 않다. 그러면 군자가 남이 보고 있을때나 그렇지 않을때나 자신을 가다듬고 정좌해야 한다는 말은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라는 말인가. 왜 거짓된 삶을 살아야 할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는 자신은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등, 각자의 가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병리적인 상태라는 등의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왜 거짓되지 않은 행동이 무례함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진실하고 솔직하고 공유되는 감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이런 허례의식과 가면속에 빠져 자신이 자신이 아닌 듯이 살고 있나 보다.
친구 녀석이 한번 이성에게 크게 대인 이후로는 무서워서 누군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기전에 손절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 큰 녀석이 어린 시절 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며, 다 부모탓이라며, 애정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아우성을 친다.
애착. 이것이 잘 형성되지 않은 것의 주요한 포인트는 부모의 양육에 있다고 한다. 부모가 어떤 식의 양육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안정애착, 불안정애착, 양가적 애착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부모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갈팡질팡하고 날이 서있는 사람이어서 애착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아이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것일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에 있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기질이 있다.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커가면서 관계를 확장해 나간다.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어린시절받지 못한 사랑과 불안정 애착이 옳지 않음을 느끼고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해 나가는 것. 이 또한 자신의 몫 중 일부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던 데에 주요한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계속 그런식으로 살고 있는 것마저 부모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 만약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나를 보듬으면서 위로해줄 필요가 있다. 나는 나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전전긍긍하며 살지 마세요. 짓눌리는 감정으로 새벽에 눈을 떠 치받히는 불안에서 주의를 분산시키려 무의미하고 피상적인 인터넷 서핑에 몇 시간씩을 소모하는 일상들이 사실은 당신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이 글은 나같았다. 이전에는 거의 매일을 새벽까지 잠 못들고 위의 일을 반복했는데, 한동안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상사에게 연락할 일이 생기자, 나는 다시 지연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폰을 보며 시간을 삼켰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과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사태의 심각성이 담긴 문자를 받자 바로 전화가 왔다. 그런 식이다. 안도감과 찝찝함. 상사에게서 나는 항상 이런 감정들을 느낀다. 좋지 않다. 이게 뭐라고 내가 이렇게 쫄아야 되는가. 나는 그렇게 과장을 의식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했다.
지연행동. 살기위한 하나의 방어기제.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내야만 훌륭한 삶인가. 하루 24시간을 꼭 의미있게 꽉채워야만 하는 것일까. 지연행동도 할 수 있고, 폰도 볼 수 있고, 누워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가. 물론 생산적인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때, 혹은 이마저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무의미하게 폰이라도 보면서 시간 좀 때우겠기로서니 내가 더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인가. 살지말라는 것도 아니고. 이 길을 거쳐서 안개를 걷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수는 없을까. 어떤 책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도 충분히 나를 위로하는가 하면, 어떤 책은 보는 내내.... 그런데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고도 하니, 모두에게 맞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김수현 에세이나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