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장례식
홍작가 글 그림 / 미들하우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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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장례식

홍작가

 

별 의미없이 펼쳤다가 괜찮은 첵을 발견했다. 요즘은 그런 책들이 종종 있어, 뒤를 이어가는 에너지를 주기도 하니, 좋은 일이다.

처음엔 색감이 어둡고 둔탁하고 진한 면이 부담스러웠다. 그림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단편이고 그림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니 내용은 짧다. 그래도 스토리를 잘 구성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좋은 머리로 공을 들인 것이 보이니, 나도 읽으면서 진지해졌다.

 

연애의 행방도 그렇고, 고양이 장례식도 그렇고 잘 쓰여진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작가를 들여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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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지음 / 놀(다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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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김수현

 

하나하나가 내 이야기였다. 이것이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여서 그런 것인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이 나와 비슷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내가 젓갈이라고 부르는 상사와 마주쳐야 하는 고된 날이었다. 그것도 그냥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집단에 안간힘을 쓰면서 2시간여를 보내야 했는데. 역시나 젓갈은 경력도 없고, 나보다 급수도 낮은 후임을 마치 위대한 영웅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나를 깎아 내렸다.

마음이 남아 있는 게 없는 날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 글을 읽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이야기가 있었다. 상대의 의미없는 말에 의미를 두지 말고, 그런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이 대목을 읽고는, 나는 잘 하고 있다는 약간의 안도감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똥은 피하고 봅시다......

내 경우에는 상대에 따라서 표정이 바뀌는 사람들,

사람들 앞에서 외모나 개인의 신상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

목적이 있는 순간에만 세상 다정해지는 사람들과는

가까워지면 남아나는 멘탈이 없기에 애초에 거리를 둔다.

 

현실적으로 물리적 거리를 두는 건 어렵다 해도

정서적인 거리를 지키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예를 들면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들은

일종의 자기애성 인격장애로 볼 수 있다.

이들이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전술은

종잡을 수 없는 칭찬과 비난 또는 침묵인데,

이들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면

비위를 맞추려 쩔쩔매게 되고

결국 그들에게 조종당하는 대상이 된다.

이런 경우엔 말려들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들의 칭찬을 기쁨으로 삼아서도 안 되고,

그들의 비난을 진실이라 믿어서도 안 되며,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추측하려 애써서도 안 된다.

칭찬과 비난, 침묵 모두에 거리를 두고,

그들로부터 관심 밖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좋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게 잘 안되서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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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캣의 혼자 놀기 - 혼자 노는 세상의 모든 방법 스노우캣 시리즈 (미메시스)
스노우캣(권윤주) 글.그림 / 미메시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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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없는 수많은 이들이 상처받은 일들을 위로하는 글들을 무수히도 많이 낸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공감을 발판삼아 다시 움직이기도 한다. 어쩌면 별볼일 없다고 여겼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심전심, 내 마음을 더 잘 알고 다독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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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이 무너진 마음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최신개정판
허지원 지음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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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주장이 들어간 글은 비평의 강을 무사히 건너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글이 짧은 에피소드식으로 되어 있어서, 글에 대한 화답도 쪼개졌다.

 

1부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융과 아들러의 이론을 가지고 버무려 놓았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가면과 그림자가 있다. 자존감은 그림자와 열등의식이라는 것으로 인해 낮을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저자는 자존감은 높을 수가 없는데, 높은 자존감에 열을 올리는 글들이 판을 친다고 한다. 그건 모두가 자존감이 높아지고 싶다는 열망을 건드리기 위함이다. 저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고 싶은가? 나는 자존감이 낮아요를 인정하고 다음은? 심지어 유아들의 자존감을 측정하는 검사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비판한다. 자존감을 측정하는 도구를 유아로 폭을 넓혀서 연구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이를 연구하여 학회에 발표한 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글쓰기는 씁쓸함을 낳는다.

 

나는 다 그렇게 살아’, ‘어쩔 수 없었어라는 말은 참 싫다.

사람의 무지를 시대가 그랬습니다. 라는 말로 단정할 수 있을까. 보살핌을 주지 못했던 부모를 시대가 그랬습니다. 라는 말로 단정할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말로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표현될 수 있을까.

나의 부모는 매일같이 싸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의 불길을 거세져갔다. 경찰이 출동하는 날도 잦아졌다. 그 화는 말리는 자식에게까지 번져 아이의 방문을 부수고 난도질을 했다. 외상. 하루 24시간 중 싸우는 시간은 3시간여. 나머지 21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 사람이 외상을 당하는 시간은 하루 중, 한 달 중, 일 년 중, 극히 일부분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번 받은 외상은 그렇지 않은 시간들을 모두 덮어버린다. 이런 것들이 부당한 취급에 속할까? 그래서 나는 다 그렇게 사는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나를 생각하며 살고 싶다.

 

저자는 각자의 가면을 만들어 척하기를 하라고 한다. ..하는 척. 나는 그런 가식이 싫다. 내가 만든 가면이 나로 뒤덮어 버리는. 그리고 자신만의 자기와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가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에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기 혼자서만 이 간극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가식적이고 싶지 않다. 그러면 군자가 남이 보고 있을때나 그렇지 않을때나 자신을 가다듬고 정좌해야 한다는 말은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라는 말인가. 왜 거짓된 삶을 살아야 할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는 자신은 그런 의도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등, 각자의 가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병리적인 상태라는 등의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왜 거짓되지 않은 행동이 무례함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진실하고 솔직하고 공유되는 감정으로 연결될 수는 없을까. 저자는 이런 허례의식과 가면속에 빠져 자신이 자신이 아닌 듯이 살고 있나 보다.

 

 

친구 녀석이 한번 이성에게 크게 대인 이후로는 무서워서 누군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기전에 손절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 큰 녀석이 어린 시절 엄마가 주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며, 다 부모탓이라며, 애정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아우성을 친다.

애착. 이것이 잘 형성되지 않은 것의 주요한 포인트는 부모의 양육에 있다고 한다. 부모가 어떤 식의 양육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안정애착, 불안정애착, 양가적 애착 등으로 나뉜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부모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갈팡질팡하고 날이 서있는 사람이어서 애착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아이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것일까?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에 있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기질이 있다. 그리고 개개인의 삶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커가면서 관계를 확장해 나간다.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어린시절받지 못한 사랑과 불안정 애착이 옳지 않음을 느끼고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해 나가는 것. 이 또한 자신의 몫 중 일부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몰랐던 데에 주요한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계속 그런식으로 살고 있는 것마저 부모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고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 만약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나를 보듬으면서 위로해줄 필요가 있다. 나는 나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전전긍긍하며 살지 마세요. 짓눌리는 감정으로 새벽에 눈을 떠 치받히는 불안에서 주의를 분산시키려 무의미하고 피상적인 인터넷 서핑에 몇 시간씩을 소모하는 일상들이 사실은 당신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이 글은 나같았다. 이전에는 거의 매일을 새벽까지 잠 못들고 위의 일을 반복했는데, 한동안 횟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상사에게 연락할 일이 생기자, 나는 다시 지연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폰을 보며 시간을 삼켰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과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사태의 심각성이 담긴 문자를 받자 바로 전화가 왔다. 그런 식이다. 안도감과 찝찝함. 상사에게서 나는 항상 이런 감정들을 느낀다. 좋지 않다. 이게 뭐라고 내가 이렇게 쫄아야 되는가. 나는 그렇게 과장을 의식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생각하며 전전긍긍했다.

지연행동. 살기위한 하나의 방어기제.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내야만 훌륭한 삶인가. 하루 24시간을 꼭 의미있게 꽉채워야만 하는 것일까. 지연행동도 할 수 있고, 폰도 볼 수 있고, 누워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가. 물론 생산적인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때, 혹은 이마저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무의미하게 폰이라도 보면서 시간 좀 때우겠기로서니 내가 더 불안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인가. 살지말라는 것도 아니고. 이 길을 거쳐서 안개를 걷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수는 없을까. 어떤 책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도 충분히 나를 위로하는가 하면, 어떤 책은 보는 내내.... 그런데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고도 하니, 모두에게 맞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김수현 에세이나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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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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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기억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나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길을 걸어가지만 각기 다른 느낌을 받고 가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이들은 떠나는 갈림길에서 미래의 진화 속 과거의 퇴화를 경험한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지고,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모호한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렇듯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이들의 기억을 향한 향수에 대한 물음이다.

피해 망상이 있는 환자의 경우, 임상가와 논의하는 표면적인 목표는 연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극복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실제 치료 목표는 망상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어느 날 엄마가 사라지고, 가족들이 모여 엄마를 찾으면서 그 가족의 히스토리를 가족 구성원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글이다. 이 글의 표면적 목표는 읽어버린 엄마를 찾는데 있지만, 내면적 목표는 표면적 목표를 통해 엄마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다시 바라보는데 있다.

그런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 작가는 사람들은 네 어깨를 앞에서 뒤에서 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의 엄마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갔을 것이다.라는 상황적 묘사를 통해 엄마의 상황을 알려준다. 그 이후에도

서울역에 도착했다. 너를 서울에 데려다주러 온 엄마는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빌딩도 무찌를 듯한 걸음걸이로, 오가는 인파 속에서도 너의 손을 꼭 꽉 잡고 광장을 걸어가 시계탑 밑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그 엄마가 길을 잃다니.와 같은 서술을 통해 엄마의 상황을 독자가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글의 앞부분을 읽고, 뒷부분을 자신이 완성하는 문장완성검사라는 검사가 있는데, 누군가 생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엄마와 보던 감나무 사이의 하늘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이처럼 우리의 어린 시절은 엄마에 목말라 있다. 나의 어린 시절도 기억을 곱씹지 않아도 으레 엄마가 툭툭 튀어나오기 일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리내 어린 시절의 기억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마와, 그 엄마의 기억에 관한 것이어서 더 치명적이다.

이 책은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기 보다는 기억되었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조망하고 있다. 치매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초점이 아니라 기억을 망각하지 않고 끄집어내려고 한다.

반년 정도 연이 닿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를 만나면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래야 기억을 다시 되짚으면서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중요한 강의를 듣고 와서는 강의자가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이 강의를 하면서 교수법을 익히기도 한다. 그는 말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반면, 나는 오히려 말을 하면 나의 생각이나 지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고 꽁꽁 감싸두듯이 혼자서 곱씹는 경향이 있다.

그나 나나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오래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종국에는 숨을 쉬는 것 조차 잃어버리며 생을 마감하는 병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포이고 죄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치매를 소재로 한 글에서도 우리는 생을 기억하고 싶어하고,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잘 있어요. 난 이제 이 집에서 나갈라요. 라는 문장은 죽음을 의미하면서도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두통으로 표현되었던 기억에 대한 소실을 의미하는 문장으로 느껴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붙잡고 있는 수많은 기억, 그 기억을 통해 형성되는 삶에서 벗어나 놓아버리기까지 한 엄마의 기억.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짧지만 긴 문장이다.

점점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이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려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곤 한다.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엄지 쪽 발등이 깊이 패어 뼈가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고 했다. 상처가 곪아터지고 또 터져서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했다.

지난여름 지하철 서울역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내겐 세 살 적 일만 기억났네.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 나는 걸을 수밖에 없었네. 내가 누군인지도 몰랐으니까. 걷고 또 걸었어. 모든 게 다 뿌옛네. 나는 걸을 수 있는껏 걸었네. 아파트 사이를, 풀숲 언덕길을, 축구장을 걷고 또 걸었네. 그렇게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나. 세 살 때에 뛰어놀던 그 마당이었을까. …』 라는 대목이 나온다. 퇴행 속에 나오는 인간의 진화적인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뉴스나 기사 혹은 주변의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종종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까지 가 있는 상태에서 경찰이나 목격자에 의해 발견되는 일이 종종 있다. 어쩌면 수없이 걸으면서 진화해왔다는 어느 이론에 걸맞게 미래의 진화는 과거의 퇴화이기에, 그렇게 과거의 진화 속에서 걷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중히 대할 필요가 있다. 길거리 나무의 잎 하나가 얼마나 큰 마음을 담고 있는지, 햇살 하나가 얼마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는지 느낄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을 비추어서야 비로소 행복을 인생의 더 적절한 때로 미루고 있는 나의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까지 오랜 밤을 걸어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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