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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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기억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나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길을 걸어가지만 각기 다른 느낌을 받고 가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이들은 떠나는 갈림길에서 미래의 진화 속 과거의 퇴화를 경험한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지고,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한다. 일상에서 느끼는 모호한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렇듯 정처 없이 떠도는 영혼을 붙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이들의 기억을 향한 향수에 대한 물음이다.

피해 망상이 있는 환자의 경우, 임상가와 논의하는 표면적인 목표는 연인에 대해 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극복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실제 치료 목표는 망상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어느 날 엄마가 사라지고, 가족들이 모여 엄마를 찾으면서 그 가족의 히스토리를 가족 구성원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글이다. 이 글의 표면적 목표는 읽어버린 엄마를 찾는데 있지만, 내면적 목표는 표면적 목표를 통해 엄마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다시 바라보는데 있다.

그런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 작가는 사람들은 네 어깨를 앞에서 뒤에서 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의 엄마가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갔을 것이다.라는 상황적 묘사를 통해 엄마의 상황을 알려준다. 그 이후에도

서울역에 도착했다. 너를 서울에 데려다주러 온 엄마는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빌딩도 무찌를 듯한 걸음걸이로, 오가는 인파 속에서도 너의 손을 꼭 꽉 잡고 광장을 걸어가 시계탑 밑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그 엄마가 길을 잃다니.와 같은 서술을 통해 엄마의 상황을 독자가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글의 앞부분을 읽고, 뒷부분을 자신이 완성하는 문장완성검사라는 검사가 있는데, 누군가 생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엄마와 보던 감나무 사이의 하늘이라고 한 기억이 난다. 이처럼 우리의 어린 시절은 엄마에 목말라 있다. 나의 어린 시절도 기억을 곱씹지 않아도 으레 엄마가 툭툭 튀어나오기 일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리내 어린 시절의 기억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엄마와, 그 엄마의 기억에 관한 것이어서 더 치명적이다.

이 책은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기 보다는 기억되었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조망하고 있다. 치매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억을 잃는 것에 대한 초점이 아니라 기억을 망각하지 않고 끄집어내려고 한다.

반년 정도 연이 닿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나를 만나면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래야 기억을 다시 되짚으면서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중요한 강의를 듣고 와서는 강의자가 되어 다시 한번 자신이 강의를 하면서 교수법을 익히기도 한다. 그는 말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반면, 나는 오히려 말을 하면 나의 생각이나 지식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고 꽁꽁 감싸두듯이 혼자서 곱씹는 경향이 있다.

그나 나나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오래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같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종국에는 숨을 쉬는 것 조차 잃어버리며 생을 마감하는 병이 있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포이고 죄악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치매를 소재로 한 글에서도 우리는 생을 기억하고 싶어하고,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잘 있어요. 난 이제 이 집에서 나갈라요. 라는 문장은 죽음을 의미하면서도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두통으로 표현되었던 기억에 대한 소실을 의미하는 문장으로 느껴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붙잡고 있는 수많은 기억, 그 기억을 통해 형성되는 삶에서 벗어나 놓아버리기까지 한 엄마의 기억.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짧지만 긴 문장이다.

점점 사회적으로 부여되는 정체성이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려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곤 한다.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엄지 쪽 발등이 깊이 패어 뼈가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고 했다. 상처가 곪아터지고 또 터져서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했다.

지난여름 지하철 서울역에서 혼자 남겨졌을 때 내겐 세 살 적 일만 기억났네. 모든 것을 잊어버리니 나는 걸을 수밖에 없었네. 내가 누군인지도 몰랐으니까. 걷고 또 걸었어. 모든 게 다 뿌옛네. 나는 걸을 수 있는껏 걸었네. 아파트 사이를, 풀숲 언덕길을, 축구장을 걷고 또 걸었네. 그렇게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나. 세 살 때에 뛰어놀던 그 마당이었을까. …』 라는 대목이 나온다. 퇴행 속에 나오는 인간의 진화적인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뉴스나 기사 혹은 주변의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종종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곳까지 가 있는 상태에서 경찰이나 목격자에 의해 발견되는 일이 종종 있다. 어쩌면 수없이 걸으면서 진화해왔다는 어느 이론에 걸맞게 미래의 진화는 과거의 퇴화이기에, 그렇게 과거의 진화 속에서 걷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중히 대할 필요가 있다. 길거리 나무의 잎 하나가 얼마나 큰 마음을 담고 있는지, 햇살 하나가 얼마나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는지 느낄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을 비추어서야 비로소 행복을 인생의 더 적절한 때로 미루고 있는 나의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까지 오랜 밤을 걸어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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