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
채만식 지음, 한형구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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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메이드 인생>
 1934년을 살아가는 인텔리의 구질구질한 일상이 비루하게 그려진다. 빈곤한 시대에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한 M은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생활한다. 하지만 그나마 갖고 있던 얼마만의 돈마저도 구걸하듯 애원하는 매춘부에게 줘버린다. 설상가상으로 형에게 맡겨둔 아이까지 자신이 떠맡아야 할 처지가 된 M은 자신의 인생을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라고 자조한다.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대량생산된, 현대사회의 화려한 부산물을 의미한다. 하지만 식민지배 아래에서의 인텔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도,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날그날 억지스럽게 살아가는 길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차라리 그날의 생활만 걱정하며 살아가는 일용 노동자였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와 흐름에 한발 비껴서버린 그들의 행보가 허허로워 보인다. 갈 곳을 잃어버린 젊은 지식층의 모습이 길잃은 조선 황실의 모습과 묘하게 대비된다. 단돈 20전에 정조를 팔아버리는 매춘부의 애절함처럼 그 시대(1930년대)에 팽배했던 우리의 실상이 아니었을까.

 <미스터 방>
 해방과 함께 친일행적으로 모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백주사와 미군정을 등에 없고 한순간에 인생 역전에 성공한 '미스터 방'. 백주사의 하소연을 들은 미스터 방은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아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아뿔사!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결국 미스터 방 또한 미군에 기생하는 한낮 하루살이일 뿐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란한 상황에서 일어난 넌센스는 우리 근현대사에 숨어있는 비극과 닮아있다. 누가 누구를 흉보고 비웃을 수 있단 말인가...

 <민족의 죄인>
 문인으로 활동하던 나는 일제 강점기 때 몇 번의 대일협력사업의 일환으로 강연을 떠난 적이 있다. ‘일신의 안전’을 위해 참여한 소극적인 친일활동이라지만 하루하루 빠져드는 대일 협력자라는 수렁에 더럭 겁이 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일본의 청탁이 미치지 못하는 농촌으로 귀향을 결심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친일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 운동가를 밀고하거나 잡아들이는 등의 적극적 친일파와는 달리 가족의 부양과 사회적 분위기, 회유와 협박을 통해 친일활동에 가담하게 된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그날의 배를 굶지 않기 위해 했던 소소한 일거리가 친일이라는 딱지로 돌아왔던 경우에 과연 그 행위의 일면만 놓고 친일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이적행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했던 본인들의 잘못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촉각을 다투는 가족과 개인의 운명 앞에 단호하게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지 생각해보게 된다.
 문득 채만식의 행적이 궁급해진다. 최근(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아직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 싶다. 다만 그의 작품 속에는 시대와 타협할 수도, 그렇다고 과감히 맞설 수도 없었던 당시의 고뇌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민족의 죄인>은 해방 후 문학계에 던지는 작가의 고백이자 반성이 아닌가 싶다.

 <치숙>
 1930년대 사회주의를 바라보던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단지 “부자에게 뺏은 돈을 나누어 갖는다”고 이해했던 당시 모습이 인상 깊다. 사회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유인지 우익진영의 일방적인 매도인지는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그 대립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삶은 어전히 고달팠다. 어쨌든 폐병에 걸린 한 사회주의자의 무기력함과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시장경제의 꼭지점에 올라서려는 화자의 대비가 인상 깊다.

 <낙조>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를 거치면서 흥망을 거듭했던 황주댁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한 개인의 아픔이라기 보다는 시대가 가져다 준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우리는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렇게 버텨왔고 살아왔다. 그 미증유의 삶이 서쪽 하늘의 낙조처럼 아스라이 펼쳐진다.
 해방과 신탁통지, 그리고 38선의 생성과 전쟁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이 좌우의 대립으로 격하게 휘몰아치던 그 때, 채만식 선생은 우리의 앞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낙주>에서는 작가의 그런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마 채만식 선생도 급진주의자는 못된 것 같다. 옳다고 하는 것, 정의라고 하는 당시의 사회 통념도 동전의 양면처럼 어두운 면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이 그림자를 채만식 선생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지 않았나싶다. 친일파, 좌익과 우익,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전쟁과 통일의 이념이 뒤섞인 혼란기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통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 전쟁을 겪었더라만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 www.freeism.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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