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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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소설은 단순한 서사를 넘어 브랜드가 되었다. 함축적이고 인상적인 첫 문장, 오감으로 전해지는 묘사 방법, 화자와 대상을 교차하며 반어적으로 서술되는 생각들. 이 모든 것은 김훈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었고, 그의 책을 선택하고 읽는 확실한 이유가 되었다.

  <저만치 혼자서> 역시 김훈이라는 이름만으로 선택한 책.

 

<명태와 고래>

  "태백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단편 첫 문장, 9페이지)

간첩 혐의를 받고 13년 간을 복역하고 출소한 이춘개는 향일포로 향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차가운 물(한류)를 따라 이동하는 명태처럼, 개인의 삶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춘개의 삶은 한국전쟁이나 이념갈등 같은 거대한 시대적 상황, 마치 해류를 거슬러 살아가는 고래와 대비된다.

 

<저녁 내기 장기>

  "저녁 내기 판이 길어져서 이춘갑은 시장했다. 차車, 마馬가 모두 죽은 들판에서 초상楚象이 포包의 엄호를 받으며 좌변을 치고 들어왔고, 한병漢兵이 힙겹게 상 길을 끊어내고 있었다. 오개남이 졸卒을 옆으로 밀자 초포楚包가 한궁漢宮을 바로 겨누었다."(97페이지)

  해질녘 마을 공터에선 한漢과 초楚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춘갑과 오개남은 각자의 고된 삶을 해쳐나온 일상의 명장들은 아닐까... 우리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가 장기판 위에서 펼쳐진다.

 

<영자>

  "노량진 고시텔은 십층짜리 주상복합건물에 있었다."(단편 첫 문장, 149페이지)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구준생인 나는 같은 구준생인 영자와 동거를 시작한다. 공무원 시험의 엄청난 경쟁률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갑갑한 일상을 더욱 건조하게 만들었다.

  20년 정도전에 노량진에서 임용을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분주하게만 보이던 고시생들을 측은하면서도 신기한듯 바라보며, 노량진 고시촌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공무원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리시대의 서글픈 단면이다.

 

<저만치 혼자서>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는 한발 비켜선 수녀님이나 신부님이지만, 이들이 늘 바라본 곳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저만치 혼자서 우리를 향해 기도하고 세상을 위해 봉사한다. 도라지수녀원은 수녀들의 노후를 위해 만들어진 호스피스 수녀원이다.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수녀님과 이를 돌보는 신부님의 이야기.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이야기를 찾아봤다. 그리고 그의 누나가 쓴 <누구에게나 삶은 가볍지 않다>는 중앙일보 칼럼도 읽었다. 나가 미안해지고, 겸손해지는 하루다...


  이들 작품 외에도 <손>, <대장 내시경 검사>, <48GOP>가 실려있다.

  무더운 여름이 물러가면서 책을 잡기 시작했다. 9시부터는 아예 온 가족의 스마트폰을 수거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기로 약속까지 했다. 폰과 멀어져야 책이 보이고, 여유가 찾아온다. 책과 폰은 영원한 상극이 아닐까. 폰을 접고 책을 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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