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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평점 :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
여행 초기의 뜨거웠던 피는 식고 마침내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얼어붙는다.
이제껏 해오던 일들이 식상해지고 무덤덤해질 때가 있다.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이나 감동도 예전만 못하고 그에 따라 재미도 덜해져 그저 그런 반복이 계속될 때가 있다. 작가는 그것을 ‘빙점’이라고 표현했다. 빙점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경험이며 인생에서, 사랑에서 혹은 하는 일에서 시시때때로 찾아올 수 있는 권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인 후지와라 신야가 ‘여행의 빙점’을 겪은 시기에 동양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쓴 글이다. 그는 빙점의 시기에 대해 ‘여행 초기의 뜨거웠던 피가 식고, 살아있는 존재가 특히 인간이 귀찮았으며, 얼어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지고, 얼어붙는 여행이 녹아들며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하였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노랫말처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하라’는 말처럼, 작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람에 대한 귀찮음과 무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이라고 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여행에 대한 권태를 여행으로 치유한 셈이다.
이 책은 저자인 후지와라 신야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여행한 동양 여러 나라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터키의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지중해, 흑해와 이란, 파키스탄 등 이슬람의 여러 나라, 콜카타와 티벳, 버마, 치앙마이와 중국, 홍콩, 한국을 거쳐 자신의 나라인 일본까지의 긴 여정이다. 이전에 <동양방랑1, 2>로 나왔던 것인데 이번 개정판에서는 한 권으로 묶여졌다. 책의 여정에는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두루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는 작가의 말처럼 곳곳에서 사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다만 이전에서부터 지적되어 왔듯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한국만 나라나 도시명이 아닌 ‘한반도’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역시 의아한 기분이 든다. 또한 아라키( Araki Nobuyoshi)의 사진에서처럼 한국 여행은 유곽과 기생에 대한 기억으로 점철되어 경험의 한계를 보인다. 아마 두 경우 모두 80년대 초에 있었던 일본인의 여행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사진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인지라 책을 읽는 내내 사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작가의 여행기를 따라가며 사람을 만나는 재미가 있고, 사진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진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 여행의 풍경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80년대 초의 여행이지만 사람 사는 모습이 주는 재미, 여행이 주는 낯설음과 설렘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