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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옛길
삐야닷시 테라 지음, 유미경 옮김 / 달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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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니 종교가 있었다. 기독교였다. 부모님은 모태 신앙을 강조하시며 교회에 데려 가셨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가기 싫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붓다를 만났다. 신세계였다.

 

  책 속의 붓다는 주체성을 강조했다. 제자도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신다. 선도가 당연했던 기독교인에게 주체성은 충격이었다. 붓다는 ‘깨달음과 해탈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문제를 영원한 존재, 구세주, 신에게 떠맡기지 말라’고 까지 했다. 통쾌했다. 그동안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불교에선 명쾌하게 해결됐다.

 

  불교는 마음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정신적이면서 지적인 수행 방법이었다. 행복과 평온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단 말에 무릎을 쳤다.


 

"자기가 실로 자기의 주인이다. 다른 누가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붓다께서는 결코 자신이 신의 계시에 의해서 영혼들을 구제하는 구세주라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인내심과 깨달음을 통해 그는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셨고,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계발하고 펼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는 깨달음과해탈이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증명하셨다.

"각 개인은 각자의 해탈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붓다께서는 자신의 문제를 영원한 존재, 구세주, 신이나 범천에게 떠맡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판단력과 탐구심을 가지고 자신의 내적인 힘과 자질을 계발하는 진실한 일에 몰두하라고 하셨다.

붓다께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의 자유를 결코 방해하지 않으셨다. 사상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의 외모, 성격, 정신적인 성향과 어울리는 생활방식을 다른 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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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자본론 -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
마스다 무네아키 지음, 이정환 옮김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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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에디터다』를 읽다 정병규 대표의 말에 밑줄을 그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편집자들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 첫 번째가 교정 교열, 두 번째가 기획, 세 번째가 *와리스케 능력이었다.”


 공감했지만 분업화가 잘 되어 있는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적 자본론』을 만났다.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라니.


 오늘날의 플랫폼은 다양하다. 오프라인에서부터 온라인, 모바일 매장까지.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나 생각에 형태를 부여한 것’이 디자인이기에 그 자체로 제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플랫폼이 많으면 많을수록 디자인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에 사내의 모든 사람들이 디자인하고 제안, 기획할 수 있는 병렬형 조직일 때 형성되는 자본이 바로 책의 제목인 『지적 자본론』이다.


 그렇게 기획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에서 기획의 가치는 ‘그 기획이 고객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가?’란다. 결국 편집자가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든, 분업을 하든 모두 독자를 위해서였다.


*여기서 와리스케는 레이아웃의 일본말이다. 당시에는 북디자인이나 편집 디자인의 개념이 없었고 와리스케로 통용한 듯하다.

기획의 가치란 ‘그 기획이 고객 가치를 높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넘쳐 나는 서드 스테이지에서 사람들은 ‘제안‘을 원한다. 서적이나 잡지는 그 한 권, 한 권이 그야말로 제안 덩어리다. 그것을 팔 수 없다면 판매하는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서점을 서적을 판매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서적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제안이다. 따라서 그 서적에 쓰여 있는 제안을 판매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깡그리 무시하고 서적 그 자체를 판매하려 하기 때문에 ‘서점의 위기‘라는 사태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이노베이션은 언제나 아웃사이더가 일으킨다.

소비 사회가 변하면 비즈니스의 바탕도 변한다. 따라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고 생산관계를 재조명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영구적으로 보장되는 비즈니스 모델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누군가가 꿈꾸었던 것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것, 그것이 이노베이션이다. 어느 누구의 꿈에도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

효율과 행복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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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사는인생 2017-03-16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의 도서 분류방식을 기존의 십진분류법에서 편집자의 주관이 반영된 방식으로 바꾼 것은 결국 백화점과 편집숍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 외 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0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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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치콕 영화에 열광하던 때가 있었다. 영화를 좀 본다는 아이들은 히치콕의 어떤 작품이 좋다느니 하면서 떠들었다. 누군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도 히치콕만 한 것이 없었다. 그런 히치콕 감독의 뮤즈가 ‘대프니 듀 모리에’인지는 몰랐다.

 

 현대문학에서 출간한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선』에는 총 9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이다. 귀신이나 살인마가 상황을 옥죄어 오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는 내내 자못 긴장된다. 작가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를 감상하며 정교한 복선과 설정을 따라가다 만나는 반전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글은 온 감각을 자극하는데 이러한 감각의 자극 이야말로 영화에 안성맞춤이니 어떤 감독이라도 영화화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여 차례나 영화 혹은 드라마로 옮겨졌다고 하니 아마도 보는 눈은 모두 비슷한가 보다.

앞으로 마주할 시간도 1이라는 숫자처럼 티 없이 깔끔해야 했다. 무엇 하나 지저분해서는 안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

수술 후 몇 주가 흐르는 동안 특별한 신체적 고통은 없었으나 암흑 속에서 주변 세상과 삶이 자기만 빼놓고 흘러가는 느낌이 낯설었다. <푸른 렌즈>

한 시대의 신성모독이 다음 시대에는 거룩한 말씀이 되고 오늘의 이단이 내일의 교리가 되는 것이다. <몬테베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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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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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술은 어릴 때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 이후 처음이었다. 24살의 히라노 게이치로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안겨준 작품이라는 수식어보다 이 소설이 더 눈에 뜨였던 것은 두 단어 때문이었다. 기독교와 연금술. 즉 마녀사냥이 횡행했던 중세 유럽에서 신성 모독일 수 있는 연금술의 의미가 궁금했다.

 

 내용은 15세기 프랑스에서 한 수도사가 겪은 기묘한 체험담이다. 수도사 니콜라는 이교의 사상을 다룬 헤르메스 선집의 완본을 구하고자 파리에서 리옹까지의 여정을 떠난다. 그러던 중 주교의 추천으로 독실한 연금술사인 피에르를 만나고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다. 한편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선 사람들이 하늘을 원망하고, 이단 심문관은 마녀를 처벌해야 한다며 사람들을 선동한다.

 

 결국엔 연금술사가 마녀로 지목되는데 그 모든 과정을 수도사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시선은 종교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자 비판이다. 또한 시간이 흘러 초로의 수도사가 연금술을 시작하는 것 또한 작가가 15세기를 배경으로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피에르의 말에 따르면 무릇 월하(月下) 피조물계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질료가 형상과 일치하고, 그뿐만이 아니라 결여태(缺如態)로부터 소유태(所有態)로의 복귀까지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눈먼 자는 그 눈장자에 빛을 밝히고, 귀 먹은 자는 음을 가려 들으며, 나병은 치유된다. 현자의 돌을 두고 만능의 약이라 칭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특히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에 그는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전 기도의 경건함에서도, 식사중의 침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식탁에서의 모든 동작은 대단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루어지고, 소리 하나 내는 법 없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길고 긴 단식을 끝낸 이가 마주한 최초의 식사를 입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과도 같은 외경(畏敬)이라 부를 만한 고요함과 눈앞 음식과의 진지한 교류가 보였다. 생리적인 욕구는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욕구가 핍박받고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형태를 부여받아서 인간에게 적합하게 고양되었다고 해야 할 그런 엄격함이었다. 그 순간 음식은 피에르에게는 분명하게 외적이고 이질적인 것이면서도 몸 안에 들어가기 이전에 한 발 앞서 이미 동질성을 획득한 듯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피에르가 연금로를 마주하고 있을 때에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불가사의하리만치 충실감이 넘치는, 외계와의 일치성의 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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