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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동아시아의 반란성’ 회복을 위한 미지(未知)의 역사 탐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7년 5월
지난 세기말부터 한국 인문학 및 사회과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화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이다. 다소 무리가 따르겠지만, 현재까지 한국 지성계에서 통용되는 동아시아 담론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편으로 세계화에 적응하고 이 물결을 활용할 목적으로 ‘동아시아’ 혹은 ‘동북아시아’를 말하는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선 문명의 차원에서 세계화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거점으로서 ‘동아시아’를 논하는 입장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와 다른 시각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공통된 문화적 특징으로서 ‘유교’를 들고 서구의 근대성과 다른 동아시아의 ‘유교 자본주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 번째 입장이 있다. 이렇게 내포와 외연이 각각 상이하여, 그 문제의식의 기원이나 실천의 방향성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동아시아 고유의 역사, 문화, 제도적 특질에 주목하면서 이로부터 대안적 세계 인식 및 실천의 준거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 동아시아 담론의 출발점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동아시아 공동체 혹은 동아시아적 삶의 방식이 다른 문화권의 삶의 방식, 특히 서구적 근현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 후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앞에서 설득력 있는 답변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동아시아 문화’나 ’동아시아 역사’가 세계의 다른 지역과 주민들을 향해 인류의 미래적 삶의 방식에 관해 말해줌에 있어 물질적 번영이나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는 한에서의 ‘문화적 코드’나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부정적 근거로서 ‘역사적 트라우마’ 이외에 질적으로 다른 대안적 근거를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에는 여전히 무엇인가 많이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빈약한 문화적 역사적 근거를 표면에 내걸고도 동아시아 담론이 하나의 실체로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이유는 기존의 국가적인 중심을 강화하는 도구로서 동아시아 담론이 국가에 의해 정치경제학적인 의도로 함께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당장 한국의 노무현 정권만 하더라도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하며, 한-미 FTA를 그토록 막무가내로 서둘러 체결했던 것이며 앞으로 한-중 FTA, 한-일 FTA의 체결도 목표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기존의 유교 자본주의와 같은 동아시아 담론에서 말하는 아시아적 가치로서 가족주의, 공동체주의, 가부장적 관계 등은 이런 동아시아의 정치경제학적인 이권 획득을 목표로 설정한 가운데서 추천되는 가치, 즉 그 기저에 국가주의 및 경제성장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깔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 현상에 이의를 제기하며 21세기의 바람직한 동아시아의 모습과 동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동아시아에서 국경을 비롯한 온갖 경계선을 극복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 바로 박노자 교수의 신간,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이다. 이 책의 부제는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서”이다. 박노자 교수는 이제 ‘동아시아 담론’이 학자들만의 추상적인 논의를 벗어나 동아시아 민중들의 가장 현실적인 당면과제를 실감나게 묶을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감추어져 있었던 대안적인(혹은 좌파적인) 동아시아의 반란적 정체성을 새롭게 발굴하여, 돈과 국적이 모든 ‘관계’의 불가피한 매개가 되는 현실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의 근거로 선사하고 있다. 그는 동아시아 시대는 어떤 면에서 이미 도래했고, 어떤 면에서는 현재진행형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지역화의 추세 역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인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역화의 사회․정치․문화의 정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인 우리 모두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의 ‘동아시아’를 원하고 있는가?
저자는 반란의 뿌리를 동아시아의 다양한 저항적 역사의 전통에서 확인한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실이라 믿어온 동아시아의 감추어진 역사적 실재들, 현재와 같은 우리의 왜곡된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해온 이데올로기적 상식들을 비판하고 부정할 것을 주문한다. 중국 근세(명조)의 급진적 개인주의의 원조 격으로 ‘천고의 이단아’, “나는 쉰 이전엔 정말 한 마리 개였다”고 고백한 이지(이탁오), 승려의 몸으로 국왕에게 절할 일이 없다며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초로 ‘종교 자유 선언’을 해버린 동진의 혜원, 만인의 욕구가 자유롭게 대변․충족되는 ‘공(公의 사회’를 꿈꾸며 군주 전제를 가혹하게 비판한 〈명이대방록〉의 저자 황종희, 병역거부와 반국가주의를 주창한 아나키스트의 원조 톨스토이를 등장시키고 그런 톨스토이 급진적인 사상을 ‘개인 수양의 이념’ 따위로 탈바꿈시킨 이광수와 최남선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각종 규율로 우리의 안팎을 구속하는 한편, ‘소비’라는 달콤한 당근과 ‘대중문화’라는 신종 ‘아편’으로 우리를 부단히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 상실해 버린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래로 우리 사회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인 폐습, 군사주의와 국가주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부단한 저술 작업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노동의 도살을 막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복지사회로 점차 나아갈 것을 주장해온 박노자이기에 이 책 역시 우리에게 혁명을 위한 ‘의식의 준비’를 요청하고 있다. 차별과 폭력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참에 박노자와 함께 ‘동아시아의 반란성’ 회복을 위한 역사 탐험에 나서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