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거리 Chinatown (Hardcover, 한영합본) Modern Korean Short Stories 6
오정희 지음, 남주현 그림, 페기 C. 조 옮김 / 한림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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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탄광촌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貨車)가 밑구멍으로 석탄 가루를 흘려 보내면, 아이들은 시멘트 부대에 가득 석탄을 팔에 안고 낮은 철조망을 깨금발로 뛰어넘어가는 그곳이 바로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리어지는 화자의 동네이다. 화자인 '나'를 비롯한 식구들은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 피난지로부터 항구 도시(인천) 외곽에 있는 중국인 거리로 이주해왔다. 이곳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건물들과 낯선 모습의 중국식 적산 가옥, 그리고 기지촌과 미군 부대로 둘러 싸여 전형적인 전후(戰後)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어린 소녀는 전후의 궁핍하고 어수선한 생활을 노란색으로 불명확하고 몽롱한 색깔로 받아들인다. “공복감 때문일까, 산토닌을 먹었기 때문일까, 해인초 끓이는 냄새 때문일까, 햇빛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치마 밑으로 펄럭이며 기어드는 사나운 봄바람도 모두 노오랬다.” 봄바람이 천지간을 노랗게 채색할 정도의 어지러움과 역겨움을 가증시키는 사나운 풍력이 되고 있는 것은 공복에 복용한 회충약의 충격과 해인초 끓이는 고약한 냄새 때문이다.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중국인 거리에는 끊임없이 집을 짓고 있어 날마다 해인초 끓이는 냄새가 진동한다. 그것은 ‘노란빛의 회오리’를 일으켜 거리를 들쑤시고 ‘머리털 뿌리까지 뽑히는 것처럼 골치가 아프게 하는“ 고통을 화자에게 준다.

이 거리를 배경으로 공복감과 해인초 냄새가 어우러져 피어 오르는 노란 빛의 환각적 이미지로 표상되는 유년의 기억 속에서 한 편의 성장 드라마가 펼쳐진다. 성장의 조짐은 주인공이 우연히 건너편 이층집 창문에서 중국인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지럼증의 ‘노란빛의 혼미’ 속에 정체불명의 낯선 남자가 나타남으로써 야릇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미지(未知)의 남성의 등장은 노란색을 배경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드리운다. 이 순간 주인공은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비애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의 창백한 표정에 담긴 욕망의 시선이 주인공의 내부에서 움트고 있던 욕망과 내면을 일깨운 것이다. 이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는 ‘나’의 호기심의 인력이 되어 서사가 전개된다. 주인공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된 이러한 역동적인 욕망의 움직임은, 양공주 매기언니와 관계의 그늘 속에서 어두운 삶을 살다 간 할머니의 죽음을 거치면서 정적인 성장의 고뇌로 성숙되어 간다.

매기언니가 없는 틈을 타서 치옥이가 주는 박하향이 나는 초록색 술을 마신 ‘나’는 술기운이 돌아 어지러움을 느낀다. 욕망의 역동적인 이미지와 죽음의 정적인 이미지가 교차하는 고독과 사색의 공간 속에서 주인공은 핏속에 순(筍)처럼 돋아 오르는 무언가를 감지한다. 그것은 마치 상처가 아무는 듯이, 참을 수 없는 근지러움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장의 고비를 확인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할머니의 유품을 묻어두었던 것을 확인하고 장군 동장 위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나’는 깜깜하게 엎드린 바다를 보았다. 동지나 해로부터 밤새워 불어오는 바람, 바람에 실린 해조류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중국인 거리, 언덕 위 이층집의 덧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와 장방형으로 내려앉는 불빛과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다시 봄이 되고 ‘나’는 6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집 앞에 이르러 언덕 위의 이층집 열린 덧창을 바라보았을 때, 그 젊은 남자가 창으로 상체를 내밀어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화자가 끌리듯 언덕 위를 올라가자 그 젊은 남자는 창문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닫힌 대문을 무겁게 밀고 나왔다. 코허리가 낮고 누른빛의 얼굴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내게 종이 꾸러미 하나를 주는데, 그 속에 든 것은 중국인들이 명절 때 먹는 세 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넣었다. 안방에서는 어머니가 산고(産苦)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나’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몰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어가, 절망감과 막막함 속에서 초조(初潮)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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