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 - 하 - 京城, 쇼우와 62년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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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복거일의『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이런 줄거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다시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김명석이 쓴 논문「SF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소설『비명을 찾아서』의 서사 비교>를 읽고 비로소 두 작품 간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김명석은 두 작품의 등장 인물의 성격과 서사 상의 시간 구조, 작품에 내재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 등을 꼼꼼하게 비교ㆍ분석하고 있다.

김명석도 지적하듯이 나 역시 대체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 영화라는 장르 상의 차이를 감안한다하더라도 영화는 소설에 비해 역사와 자아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상력이 현저하게 천박하고 통속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이 소설은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거리가 탄탄하고 재밌으며 무엇보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민족주의와 국사, 국가주의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작품이 드러내는 이 명확한 주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고자 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진리성과 자본주의체제의 공적(公的) ‘정의’(?)를 변호하는 데 헌신해온 자유주의 이데올로그 복거일1)의 그 유명한 소설 데뷔작을 드디어 이번 기회에 읽었다. 최근에 나온 그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보이지 않는 손』을 얼마 전에 서점에서 본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예전부터 우리 사회의 일상의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복거일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게 상당히 중요하고 또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알다시피 복거일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는 고루한 근대적 사고의 산물인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오로지 자본과 시장의 무한경쟁을 보장하는 ‘자유’라는 이념 그 자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무능한 보수주의 일반마저 강력히 비판해온 요즘 말로 소위 ‘New-Right’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2) 또 친일 행위의 평가와 단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기존의 통념을 갖고는 ‘친일파’를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고, 오히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의 삶이 조선왕조 통치 하의 그것보다 훨씬 나았다고 주장하는 적극적인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친일파 옹호자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탈-근대적’ 역사 감각을 소유한 자유주의자인 것이다.3) 게다가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이념 설파의 연장선상에서 자본이 주도하는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를 사용하지 못해 입는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영어공용화가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국제적 감각을 지닌 ‘세계시민’(cosmopolitan)이기까지 하다.4) 

이렇듯 복거일은 자신이 신봉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는 탈근대적 자유주의자 곧 신자유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최초로 쓴 87년의 장편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지금의 작가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본다면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까싶다.

 

다른 독자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이 작품이 성취한 새로운 기법으로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를 소재로 한 점에 큰 흥미를 느꼈다.『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이라는 소설 속에 다시 다까노 다쯔기의『도오꼬우 쇼우와 61년』이라는 소설을 끼어 넣어 두어 실재하는 역사를 뒤집으면 소설의 세계가 성립되게 만들고, 그 소설의 세계를 뒤집으면서 ‘소설 속 소설’의 세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소설의 세계를 빠져나온 소설 속 소설의 세계는 독자인 내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의 역사와 축을 같이 하는 세계임을 말한다.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백 년의 고독』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해독하던 멜퀴아데스의 양피지 원고가 결국 독자가 읽어 온 마르케스의 소설『백년의 고독』이었던 것처럼 환상의 역사와 실제의 역사, 소설과 현실, 소설과 소설 내의 세계 간에 존재하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역사에 대한, 또는 문학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역사의 사실성은 문학의 허구성에 의해 문학의 허구성은 역사의 사실성에 의해 서로 허물어지고 해체됨으로써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독자가, 문학 속으로 이입되는 역사와 함께 문학 속의 인물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미래의 시간의 질서도 해체되고 독자들은 역사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설에서 기발한 점은 총 109개의 절마다 다 배치되어 있는 에피그람이다. 처음에는 이 에피그람이 각 절 본문의 내용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으나 독서가 진행될수록 이것들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소설 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해서 쓰인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실제 존재하는 저서들부터 작가가 창조한 저서들, 가상의 잡지, 실제 역사연표들까지 매우 다양한 장르의 에피그람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어느 것 하나도 의미없이 사용된 것이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가령 작품 내부에서 조선인들에게 금서로 되어있는 것으로서 동서양 관계에서의 일본의 위치, 일본의 정치, 일본의 미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노 히사이찌라는 사상가의 '독사수필'이라고 하는 서적이 있다. 이것은 작가 복거일이 소설 내에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 스스로 지어낸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서 지식과 사회에 대한 평가의 시선과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가 복거일이 이러한 대체역사의 기법을 통해 과연 무엇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실마리가 소설의 제목인 ‘비명(碑銘)’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기노시다 히데요(朴英世)가 찾는 ‘비명’(碑銘)이란 대체 무엇인가? 작품에서 이 ‘비명(碑銘)’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조선인이면서 철저한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가야마 미쓰로, 즉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 ‘여기 잠들다’이다. 이광수 및 이광수적인 선택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감옥에 갇혀 갱생교육을 받을 때 만난 조선 문단의 중견급 평론가이자 조선 평론가협회의 간사인 하꾸야마와를 통해 히데요에게 전달된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길은 ‘조선적인 것’ 즉 한용운이나 박은식의 길과 대비되어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6) 그에게 이광수적인 것은 “조선 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선언하노라”고 주장하는 다이쇼(大正) 6년의 민족주의자 춘원 이광수에서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올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쇼와 4년의 배교자 가야마 미쓰로로 상반된 방식으로 호출된다. 가야마 미쓰로, 혹은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를 믿지 못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자신의 기원인 ‘민족’을 부정해 버린 역사의 ‘전범’으로 호출된다.7) 물론 히데요는 그러한 이광수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 그의 비명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문제는 그가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한 이광수를 다시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려든다는 것이다. 히데요에게 있어 이광수적인 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 절망, 비겁함 그리고 반(反)민족적 주체화를 의미하지만 박영세로의 거듭남은 민족적 각성을 통한 진정한 자기의 발견에 이르는 길로서 역사에 대한 믿음, 용기, 피의 정화의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그의 스승의 스승이기도 한 만해 선사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한용운은 민족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님의 시학’에 담아낸 혁명적인 민족시인으로서, 민족을 배신한 ‘배교자’로 의미화되는 이광수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이광수의 절망과 대비되는 한용운의 ‘용기’는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행동주의적 결단에 이르는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된다. 이광수적인 길은 기노시다 히데요가 민족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동일시하는 한용운, 신채호, 박은식, 예이츠와 정반대에 놓여진다.8)

그런데 과연 식민성의 극복이 필연적으로 민족성의 회복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복거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에게 ‘민족의식’이나 ‘민족감정’을 소극적으로 투영하고 있다기보다 아예 처음부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 및 ‘국가주의’의 열망을 내장시키고 있다. 물론 이때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식민치하에서든 해방된 독립국가에서든 제고할 여지도 없는 당연한 전제로 규정된다. 히데요가 일본 출장 중에 묵었던 집의 주인은 과격한 공산주의자였으나 그 역시 민족주의자로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히데요는 비난한다. 히데요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사회체제로서 별로 신중하게 탐구할 만 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히데요 자신이 이미 한도우 경금속의 유능한 직원으로서, 자본의 노예로서 부를 향한 욕망을 뼛속 깊은 곳까지 내면화하고 그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노동에 중독 되다시피 한 삶을 사는 전형적인 기업가적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복거일이 현재 이상적으로 설파하는 인간의 모델이 이미 히데요를 통해 투영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다시 민족주의 문제로 돌아와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제국주의에 대한 피식민지의 저항을 떠받치는 부정할 수 없는 도덕적 정당성은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을 시야에서 가리기 일쑤이다. 결국 많은 경우 식민지의 해방운동은 스스로의 국가를 지향하면서 그 국가를 절대화하고 신비화한다. 그러나 절대화한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식민주의가 식민지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히는 지점은 바로 이 곳, 즉 탈주와 전복이 완료된 그 순간에 여전한 옛 지배자의 얼굴을 혹은 그를 닮아버린 자기 얼굴을 대면하게 만드는 그 역설의 지점일 것이다.

민족주의ㆍ국가주의로 제국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반복하게 할 뿐이다. 저항 민족주의 자체에도 이미 권력의 담론이 해방의 담론 밑에 은폐된 형태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는 비단 민족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을 계급적 실체로 파악하여 노동계급을 역사변혁의 주체로 전면화하고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외쳤던 민중민주주의 역시 그 속에 ‘비(非)-민중’을 전제하고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민족이든 계급이든 국민이든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집단주체의 기획을 통해서도 역사 속의 식민성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족’이나 ‘계급’, ‘국민’을 신화화하는 모든 권력 운동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들이 하나같이 대중의 혼을 사로잡는 절대 신앙을 구축함으로써 대중의 권력 비판 능력을 차단하고 상실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서 권력지향적인 정치 신학이기 때문이다. 강자의 패권을 열망하며 자신과 다른 타자를 배제하면서 다중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주체를 획일적인 집단적 주체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이러한 기획의 결말은 결국 파시즘일 뿐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기어코 작가는 히데요의 아내와 딸을 강간하는 적군을 등장시키고 만다. 위대한 민족주의의 서사를 복원해나가는 ‘남자들의 역사’(his story)를 위해 '여성'과 '어린이'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것일까?


이 소설이 영원히 내게 불편한 것은 바로 식민성을 내면화한 나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식민성에 의지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의 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한민족이나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백성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삶을 허락해주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적 욕망을 담지한 기업가적 주체가 부정되지 않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면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탁월한 형식적 미학을 갖춘 작품이고 서사 역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재밌는 소설임을 부인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그 방식이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차원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길을 시종일관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 복거일,『현실과 지향』, 문학과지성사, 1990

          ―,『진단과 처방』, 문학과지성사, 1994

          ―,『소수를 위한 변명』, 문학과지성사, 1997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기업센터(CFE), 1998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2002』, 자유기업센터(CFE), 2002

          ―,『민중주의를 막아내는 길』, 자유기업센터(CFE), 2002

          ―,『진화적 풍경』, 자유기업센터(CFE), 2005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삼성경제연구소, 2005

       ―,『조심스러운 낙관』, 자유기업원, 2005

          ―,『21세기 한국-자유, 진보 그리고 번영의 길』, 나남, 2005

2) 복거일,『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알음(들린아침), 2003

3) 복거일,「한국의 보수가 부진한 까닭」,『한국의 보수를 論한다-보수주의자의 보수 비판』, 바오, 2005

4) 복거일,『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문학과지성사, 2003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003』, 삼성경제연구소, 2003

5)김현숙,「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우와 62년』의 의미,『현대소설연구』, 한국현대소설학회, 1994, p396

6)복거일,『비명(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下), 문학과지성사, 1998, p219~234

7)권명아,국사 시대의 민족 이야기-복거일,『비명을 찾아서』,『실천문학』, 실천문학사, 2002년 겨울호, p37-38

8)같은 글,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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