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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알라딘 메인에서 <침이 고인다>를 보자마자 장바구니에 넣은 이유는 아마도 제목이 독특해서였을 것이다. 김애란이란 작가를 알지도 못하고 이 책이 무슨 상을 탄 것도 아닌데다 저자가 절세 미녀도 아니었으니까. 문학과 지성에서 아무 책이나 내주는 건 아니겠지만, 출판사 이름을 본 건 책을 산 뒤였다. 내 선택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계절에 안맞게 틀어대는 난방 때문에 짜증스러웠던 춘천행 기차를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이 책 덕분이다.
추측컨대 내가 느낀 재미는 남들과 다른 종류일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배경은 ‘아버지의 부재’라 할 수 있는데, 진짜로 없다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데 별반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다. 예컨대 ‘도도한 생활’에서 엄마는 만두집을 하며 주인공을 키웠는데 아버지는 친구 보증을 서서 재산을 다 날리고, 비가 새는 반지하로 주인공을 찾아와 애써 모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빌려달라 한다. ‘칼자국’에 나오는 아버지는 평생 아내에게 배려를 한 적이 없는데다 유흥비를 위해 사채를 빌리고, 결혼반지를 술값으로 날리고 바람까지 피울 정도로 대책이 없는 분이다.
“어머니가 (사립대 가는 걸) 반대해놓고도 등록금을 대주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는 찬성만 하고 아무 신경 안쓰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좀 난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166쪽).”
이상하게도 난 이렇게 남성의 무능을 드러내는 소설을 재미있어한다. 어느 여자보다 시댁을 싫어하고, 남성의 악행에 치를 떨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세상의 악은 죄다 남자에서 비롯된다’는 내 신념과 일치하기 때문일텐데, 가끔은 내 성향의 근원이 궁금해진다. 네이버를 찾아보니 남성이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여성적인 요소를 아니마(anima)라고 한다던데 나한테 유독 아니마가 많은 이유는 뭘까?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길러진 걸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입을 가리고 웃거나 여자처럼 다리를 모으고 앉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5학년 때 별명이 ‘아가씨’였다는 걸 보면 타고난 것 같기도 하지만, 남자를 싫어하게 된 게 여성학에 관심을 가진 후였던 걸 보면 길러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타고났건 길러졌건 <침이 고인다>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으니 어찌되었든 좋은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