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늘 '가든뷰'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서 여섯시 전까지 학교에 다시 와야 하는데."

지도교수가 아침에 한 말이다.

아까 글을 급히 쓰다가 운이 없는 사건 한가지를 빼먹었는데

난 원래 중국집에서 지도교수 점심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든뷰라는 곳은 안타깝게도 중국집,

점심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기차 안에서 계속 생각했다. "어디로 하지?"

그러다 생각이 났고, 난 내 기특한 생각에 무릎을 쳤다. 탁!

 

"선생님, 제가 오늘 근사한 데서 점심 대접할께요."

이 말과 동시에 난 택시를 집어타고 '소도'에 가자고 했다.

소도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향기처럼 천안에 드문, 괜찮은 일식집이었다.

"여깁니다."

난 선생님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가...려 했다.

근데 그 식당은, 내부수리중이었다!!!

초조해진 난 "아무데서나 먹자"는 선생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아웃백에 갔는데

역시나 선생님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메뉴를 별반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ㅠ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는데 몸도 피곤하고 정신도 혼미했다.

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난 최선을 다해 선생님의 말씀에 응했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지라 어느덧 서울역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니 은근히 걱정이 됐다.

혹시 할머니랑 저녁 먹으러 가다가 접촉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비는 무진장 오고, 빼곡히 들어선 차들 때문에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리고 길은 겁나게 막혔다.

중국집에 도착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좋았다.

어머니와 나 할머니 외에도 삼촌과 이모할머니(할머니의 사촌동생),

제수씨와 조카 이렇게 일곱명이 모여 즐겁고도 맛있는 식사를 했다.

내 B급 유머에 이모할머니와 어머니는 시종 웃어댔고

참석들은 내가 알아서 고른 메뉴를 맛있게 먹어줬다.

할머니의 분전은 정말 감동적이어서

우리가 덜어드린 음식들을 하나도 안남기고 깨끗이 비우셨다(어찌나 고맙던지!!).

조카도 잘먹고, 간만에 참석하신 이모할머니 역시 아주 맛있게 드셨다.

원래 세명이 조촐하게 하려던 할머니 생신 축하 저녁식사는

엄마가 막판에 초대한 네사람 덕분에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내가 비를 맞으며 사온 케이크에는 아흔한살을 의미하는 초가 꽂혔고

노래가 끝난 뒤 초 한개에도 못미치는 나이의 조카가 촛불을 껐다.

많이 드셨음에도 할머니는 맛있다면서 케이크 한조각을 해치우셨고

조카 역시 자기 얼굴만한 케이크를 다 먹었다.

슬그머니 빠져나와 계산을 하는데 이토록 훈훈하게 계산하는 건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이런 거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만

할머니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참석자 모두가 즐거웠던 오늘 저녁의 가치를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오늘 내게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할머니의 웃는 얼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랬다.

오늘은 결코 운수나쁜 날이 아니었다.

가족에 대해 늘 회의적이던 내가 간만에 만난 가족들과의 자리에서

즐겁게 웃으며 식사를 한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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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4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4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4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4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석 2007-09-14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밀댓글로 달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저녁식사라도 가족과 함께 맛있게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할머님이 좋아하셨더니 몇 배로 더 좋은 일이고요.^^

2007-09-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9-15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읽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행운의 글이에요^^ 부리님 멋쟁이!

세실 2007-09-1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착한 손자가 계셔서 흐뭇하실듯^*^ 님은 정말 따뜻한 분이세요~~

무스탕 2007-09-1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빙긋 미소가 지어지네요.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

비로그인 2007-09-15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뻐요.

비연 2007-09-15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피엔딩은 이래서 좋아요~^^

2007-09-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6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축><

다락방 2007-09-1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들과 웃으면서 저녁식사라니. 정말 다행이예요. 그리고 내내 그렇게 좋으셨으면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