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묘한 광채가 나서 그쪽을 바라보니, 내 자리에서 45도 오른쪽에 있는 의자 옆으로 늘씬한 팔이 하나 보인다. 민소매 차림의 얼굴도 이름도 모를 그 여인을 향해 합장을 한 뒤 다시금 책을 읽었다. 하지만 집중이 잘 안됐다. 책을 읽는 틈틈이 그 팔을 바라보며 얼굴을 상상했다. 미녀일까. 아니면 팔만 늘씬한 걸까.


천안에 도착했을 때 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내렸다. 그녀를 지나치며 슬쩍 얼굴을 본 나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민소매와 늘씬한 팔을 근거로 무턱대고 여자로 단정한 나 자신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다시 보니 팔도 그렇게 가는 게 아니었다. 남자의 팔을 힐끗힐끗 보면서 혼자 좋아했던 꼴이라니.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몇 명이서 미국 관광을 갔는데, 들른 곳 중 하나가 바로 백악관이었단다.

“저기가 백악관이네. 정말 하얗다.”

“와, 사진에서 보던 곳과 똑같네.”

그네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이 들렀던 곳은 백악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건물이었단다. 글의 저자는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대신 원래 잘 알던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과연 여행인가?”고 개탄했지만, 난 백악관을 잘못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좋아한다면 그 건물이 백악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고 생각했다.


그때의 각성을 어제 일에 대입시켜 보자. 늘씬한 팔을 보고 혼자 좋아했다면, 그 실체가 어떻든간에 그 팔은 내게 기쁨을 준 것이다. 나중에 그가 남자인 걸 알고 실망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얻은 기쁨이 헛된 건 아니다. 남자면 어떤가. 내가 여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결론: 내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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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십니까? 책에 집중을 못할만큼?
이런이런이런이런....

해적오리 2007-08-10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ㅎㅎㅎㅎ...우피 골드버그가 생각나는 이유는? ^^

마늘빵 2007-08-10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지 않아요. :) 근데 다음 소설은 언제쯤?

Mephistopheles 2007-08-10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정체성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계신 겁니다.

무스탕 2007-08-1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에 이어 미남도 좋아지고 계신듯... =3=3=3

비로그인 2007-08-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상해지고 있으신거 맞아요.

울보 2007-08-1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내려서 얼굴 빨개지신것 아닌가요,

비로그인 2007-08-10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 조각 중 남녀추니의 조각이 떠오르는 반전!
기대어 엎드린 여인의 뒷모습에 설레어하며 앞을 보았더니 남자였던 조각이었어요. 그나저나 전 왜 한---참 전의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오세요'라던 메피스토펠레스님의 댓글들이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히힛

시비돌이 2007-08-1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긴요. 단지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뿐일지도 모르는거잖아요. ㅋㅋ

프레이야 2007-08-1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부리님이 이상해지신게야. ㅎㅎ

마노아 2007-08-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삼단논법이었어요^^ㅎㅎㅎ

2007-08-10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1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inpix 2007-08-11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와 실체. 왠지 철학적인 생각 거리인듯?^^ 'ㅁ' 제가 있었더라도 늘씬한 팔에 집중이 안 되었을 듯해요. 하핫.^^

부리 2007-08-1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튄픽스님/안녕하세요 그 제목으로 제가 글 여러번 썼었죠 아마. 왠지 멋진 제목 같지요^^
속삭님/아닙니다
속삭님/아 네...
마노아님/호호 삼단논법이라니 갑자기 제 글이 대단해 보이는데요^^
혜경님/혼자만 저 이상하다고 하시다니!! 삐짐!
시비돌이님/아앗... 그, 그게 그렇게 되나요?&&
정아무개님/호오 님도 경험담이...?
주드님/브로크백엔 의외에 인물이 있더군요 누군지 불면 여러사람 다치니....호홋
울보님/그렇게까지야.... 코가 빨개졌어요^^
너구리님/제겐 님밖에 없습니다!
무스탕님/미남 아니구요 팔만 미녀였어요!
메피님/사실은 님이 점점 더 좋아져요^^
아프님/너구리님이 협조를 안해주시는 바람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꼭 소설같잖아요...실환데..
해적님/골드버그는 어떤 스토리가 있지요??
민서님/집중이 안되는 건 아니구요 그냥 가끔씩 봤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