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묘한 광채가 나서 그쪽을 바라보니, 내 자리에서 45도 오른쪽에 있는 의자 옆으로 늘씬한 팔이 하나 보인다. 민소매 차림의 얼굴도 이름도 모를 그 여인을 향해 합장을 한 뒤 다시금 책을 읽었다. 하지만 집중이 잘 안됐다. 책을 읽는 틈틈이 그 팔을 바라보며 얼굴을 상상했다. 미녀일까. 아니면 팔만 늘씬한 걸까.
천안에 도착했을 때 난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내렸다. 그녀를 지나치며 슬쩍 얼굴을 본 나는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민소매와 늘씬한 팔을 근거로 무턱대고 여자로 단정한 나 자신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다시 보니 팔도 그렇게 가는 게 아니었다. 남자의 팔을 힐끗힐끗 보면서 혼자 좋아했던 꼴이라니.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몇 명이서 미국 관광을 갔는데, 들른 곳 중 하나가 바로 백악관이었단다.
“저기가 백악관이네. 정말 하얗다.”
“와, 사진에서 보던 곳과 똑같네.”
그네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이 들렀던 곳은 백악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건물이었단다. 글의 저자는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대신 원래 잘 알던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과연 여행인가?”고 개탄했지만, 난 백악관을 잘못 알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그렇게 믿고 좋아한다면 그 건물이 백악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고 생각했다.
그때의 각성을 어제 일에 대입시켜 보자. 늘씬한 팔을 보고 혼자 좋아했다면, 그 실체가 어떻든간에 그 팔은 내게 기쁨을 준 것이다. 나중에 그가 남자인 걸 알고 실망을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얻은 기쁨이 헛된 건 아니다. 남자면 어떤가. 내가 여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결론: 내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