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가 끝난 후 친구와 <터미네이터 1>을 보면서 "이렇게 무서운 영화는 처음 본다”며 감탄에 감탄을 했었다. 아무리 총을 쏴도 죽지 않던 그 사이보그는 불에 다 타서 앙상한 몰골만 남은 상태에서도 주인공을 괴롭혔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지금, 난 그 당시 느꼈던 공포감을 다시금 체험했다. 조금 있으면 열릴 라파엘 나달과 페더러의 결승전이 주는 긴장감을 해소하고자 <검은집>을 봤던 것. 사실 난 한국 영화 중 호러 장르에는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여고괴담>1과 그 속편, 이렇게 두편의 예외를 제외하곤 한국에서 만들어진 호러영화는 주인공만 무서워하고 관객은 쓴웃음을 짓는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곤 했다. 아무리 황정민이 나온대도 <검은집>을 볼 마음은 없었는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긴장감 해소를 위해 영화를 고르던 끝에 평점이 좋아서 보게 된 것. 이런 걸 보면 난 참 점수에 연연하는 놈 같지만, 그 덕분에 <택시 4> 대신 머리칼이 쭈뼛한 무서운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좋은 거 아닌가? (참고로 ‘택시4’의 평점은 4.58).


예상치 못한 반전에 놀라면서, 잔혹한 장면에선 부채로 얼굴을 가려 가면서 영화를 봤는데, 정말 무서울 땐 옆에 앉은, 어여쁜 여인과 같이 온 남자를 껴안고 싶단 생각도 했다. 공포영화에 유난히 연인들이 많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텐데, 애인과 안고 싶다면 <검은집>을 보시라. 이 영화는 여러번 당신을 도와줄 테니까.


아쉬운 점 한가지. 늘 하는 생각이지만 선과 악이 대결할 때는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하는데 너무들 마음이 모질지 못한 것 같다. 나쁜 놈들은 우리 주인공을 사로잡은 뒤 바로 죽이지 않고 수돗물이 방안에 가득 차 죽게 한다든지,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진다든지 해서 살아날 가능성을 부여한다. 반면 좋은 쪽 사람들은 지나치게 생명 존중 사상이 뛰어나, 적군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예컨대 병으로 머리를 때려 기절을 시킨 뒤 추가로 두들겨 패 재기할 기회를 박탈하는 대신 그대로 방치하고 다음 코스로 가는데, 잠깐 기절했던 나쁜놈은 대개 정신을 차린 후 주인공들을 쫓아 곤경에 빠뜨린다. 선과 악이 치열하게 대결하는 이 영화 역시 착하디착한 주인공은 ‘쓰러진 적은 다시 때리지 않는다’는 프로권투의 원칙을 지키려다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생명이 걸린 싸움에서 그런 자비심을 발휘하는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가끔은 답답하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07-0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부리님 말씀대로라면....영화의 러닝타임이 반에 반으로 확 줄어들 꺼에요..^^
주인공을 사로잡자마자 순식간에 죽여버린 악당 -러닝타임 30분-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악당에게 하는 잔인한 복수 -러닝타임 40분-

이매지 2007-07-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보며 애인을 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쿨럭.
이건 뭐가 반대가 되도 한참 반대가 된 -_-;;
검은집은 후반에 쬐금만 더 끌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프레이야 2007-07-0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이랑 봐야되는 거에욤?? 부리님.
추천이에요^^

다락방 2007-07-0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공포영화는 '의미없는'남자와는 보면 안되는것 같아요. 무서워 죽겠는 장면에 끌어안지도 못하고 오히려 저 혼자 부들거려야 하니 말예요. 부리님 말씀대로 끌어안을 수 있는 남자와 함께라면, 저는 공포영화를 참 무서워라 하지만, 봐줄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완전 찬성이요!!

미즈행복 2007-07-08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주라기공원1 이 너무 무서웠어요.
대학때 의미없는 남자와 봤는데, 엄청 놀라는 저를 보고 그 오빠가 야, 이런 영화는 꼭 너랑 봐야겠다. 너랑 보니까 공포가 확 전이된다며 좋아했지요.

2007-07-09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7-1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 보신거 다 압니다.

부리 2007-07-1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서님/빙-고!
속삭님/누구 부탁이라고 거절하겠어요^^
미즈행복님/의미없는 남자랑 보셨다구요 호호. 그땐 그 남자가 의미없을지 있을지 모르는 상태 아닌가요??? 님이 그때 저 만나셨으면 아마 쳐다도 안보시지 않았을까...
새벽별님/페이퍼에 나와 있잖아요. 양쪽에 애인 있는 남자가 있었다면...혼자 본거죠
너구리님/어맛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선... 안아주지 않아 서운했삼
다락방님/오...의미없는,의 어원이 님이셨군요. 공포는 나누면 반이 되는데, 의미없는 남자랑 보면 안되죠 언제 저랑 공포영화라도.... 흐흐

혜경님/리뷰의 대가이신 님께서 추천을 해주시니 감사하옵니다..... 더 열심히하겠습니다
이매지님/어엇 님은 그전에 안아보시지 않았나요? 공포영화는 한번도 안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더 의미가 있을 듯 싶어요 호홋
메피님/그, 그렇긴 하네요. 너무 예리하신 메피님.....ㅠㅠ

비로그인 2007-07-11 23:27   좋아요 0 | URL
부리님, 아무도 안믿으세요. 아무래도 좀 더 큰 스캔들을 저질러야 믿어주시기 않을까요 ^.,~ 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