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조선건국사 - 드라마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고려멸망과 조선 건국에 관한 얽히고설킨 흥미진진한 이야기
조열태 지음 / 이북이십사(ebook24)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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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드라마와 같은 TV 방송을 자주 보지 않는다. 드라마에 낭비되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딱히 큰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최근에 본 드라마라고 하면 아마 2~3년 전의 드라마를 떠올리는 나에게 있어 주위 사람들은 언제 적에 한 거냐고 되묻는다. 그러한 나에게 우연히 정도전이라는 KBS 사극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학창 시절 역사에 대해 공부했을 때 당시 사대부와 정도전이라는 인물에 대해 배우긴 했었지만, 시간이 흘러 머릿속에 잊혔던 인물들을 드라마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에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또한, 그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고 이건 대작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조재현, 유동근, 박영규, 서인석 등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사극 인물들이기에 드라마에 더욱 관심이 갔다.


정도전이라고 하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데 가장 일등공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잘 몰랐던 나에게 있어 이 책 '정도전과 조선건국사'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공민왕 시대인 1351년부터 그동안에 있었던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필자인 조열태님은 역사에 남겨졌던 일들에 대해 의혹이 있는 부분들도 설명을 해주기에 책을 읽는 내내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배웠던 고려의 역사는 고려를 무너뜨린 자의 입장에서 쓴 것이고(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고려가 비정상적인 나라였고 부득이 새로운 나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쳐야 하므로 필자는 이긴 자의 관점에서 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풀이했다. 공민왕 시대에 일어났던 쌍성총관부 탈환, 요동 공략, 홍건적 침입, 나하추 침입, 신돈의 등장과 우왕 시대에 일어났던 명 사신 채빈 살해 사건, 왜구 침범, 임견미 전성시대,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 이인임의 종말, 위화도 회군과 창왕 시대의 전제 개혁 태동, 김저 사건, 마지막으로 공양왕 시대의 우왕과 창왕의 죽음, 과전법, 군신 동맹, 고려 멸망까지 고려 말기의 역사를 책 한 권으로 풀이한 필자의 책을 통해 고려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드라마를 시청하는 입장에서 사극 정도전에 나오지 않았던 중요한 사건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고려 말기의 역사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극 정도전의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한 분들과 고려 말기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읽으면 궁금증을 풀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정도전이라는 드라마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1355년 11월 11일, 21세의 이자춘은 차남 이성계를 낳았다. 장남은 이원계로서 첩의 자식이라고 한다. 정실에서 나온 맏아들이 이성계인 것이고,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21세손이 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이인에서 이양무로 이어지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으며,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의혹이 없지 않아 있다. 만약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라면 그 가능성을 어떨까? 가능성은 있다. 당시 북쪽 지역에서는 고려인, 여진족, 몽고족들이 섞어서 살았으니까 이성계도 여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부하들 중에 여진족도 많았음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사실, 조선을 건국하고 기반을 닦아 나가는 과정에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성계의 족보를 전주 이씨로 조작했다는 이론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있다. - p.15


공민왕은 실로 100년 만에 쌍성총관부를 다시 고려 땅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 원나라로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고려가 너무 재빠르게 행동을 취했고 또 홍건적의 봉기로 나라가 혼란한 지경이라 쌍성총관부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마 이때 이인임은 이성계를 처음 봤을 것이다. 이인임은 40대의 원숙한 나이였고 이성계는 팔팔한 22세였다. 모습이며, 옷차림이며, 말투며, 행동거지며, 이성계에게서 풍기는 모든 것들이 이인임의 눈에 영락없는 촌놈의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것도 보통 촌놈이 아니다. 항상 멸시해 왔던 여진족 촌놈,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이인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훗날 그가 그를 내칠 것이며, 결국 고려를 무너뜨리라는 것을. 그가 그와 사돈이 되리라는 것을. - p.27


그동안 공민왕이 겪었던 여정을 요약해 보자. 22세에 왕위에 올라 개혁을 시도했지만 약 5년간은 기철에게 눌려 허송세월을 보내다시피 했다. 이후 기철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등 신바람을 냈다. 허나 홍건적의 칩입으로 개경을 적에게 내주고 1년 이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이어 나하추를 격퇴하기가 바쁘게 덕흥군 때문에 또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 무장들의 죽음과 홍왕사의 변까지 겪었다. 공민왕이 추구하고자 하는 개혁의 길을 멀고도 험난했다. - p.82


정도전은 영주에서 부모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터라 아직은 성균관에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학문 증진에 몰두했다. 이때 그가 탐독한 책이 정몽주가 보내 준 맹자였다. 하루 한쪽 또는 반 쪽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숙독했다. 왕도 정치와 민본 사상을 본위로 하는 맹자에는 임금이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폭정을 휘두르면 역성혁명도 가능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쩌면 훗날 정도전의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반을 맹자가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맹자 하나만 갖다 붙이는 것은 속단이다. 그가 유학뿐 아니라 역사, 병법, 불교, 수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친 책을 두루 섭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스운 사실은 고려를 정도전이 뒤집어엎게 될 줄도 모르고 정몽주가 맹자를 보낸 것이다. - p.112


공민왕의 영전 공사는 계속되었다. 백성들의 고통도 계속되었다. 4월에 농사를 위해서 공사 인부 5.000명을 일시 귀가시키기도 하지만 영전 공사에 대한 공민왕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5월에 비가 내릴 때 영전 공사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 비를 그쳐 달라고 불당에서 기도를 했다. 왕의 기도는 백성들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농사철인 5월에는 비가 내려야 백성들이 살 수 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살 수 없으면 영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여간에 공민왕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 p.131


최영이 10월에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공민왕은 죽고 없었고, 우왕이 즉위해 있었다. 때문에 제주도가 없었다면 조선도 없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한다. 최영이 개경에 머물렀더라면 공민왕 살해 사건도 없었을 거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 p.168


이인임은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말했다. 또한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거라고 말한 이인임이 정말 옳았다."고 최영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선 이인임의 눈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p.266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는 막중대사를 눈앞에 두고 우왕과 최영은 움츠렸다. 이는 실수로 덮어질 수 있는 행태가 아니다. 잔인한 말 같지만 만약 다른 속셈이 없었다면 그들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최영이 군 지휘권을 넘겨 버린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조선 학자들의 왜곡이 어쩌고저쩌고 말할 바가 못 된다. 왜곡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 p.278


4월에 이색은 빈손으로 귀국해야 했다. 그는 바닷길을 이용했다. 오는 길에 발해만을 경유했고, 여기서 객선 두 척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행이 반양산에 도착했을 때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서 두 객선이 모두 침몰되고, 동행했던 이방원이 탄 배도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던 이방원은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만약 이때 사고가 생겼더라면 세종과 한글이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 p.308


1392년 7월 12일, 34대 고양왕을 끝으로 고려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태조 왕건이 개국한 지 474년 만이었다. 공양왕이 쫓겨난 뒤 5일간 고려에는 주인이 없었다. 신하들이 이성계를 추대했으나 그가 사양했기 때문이다. 관례상 바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없으므로 형식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드디어 왕위를 받아들였다. 1392년 7월 17일이었다. 시골 무사 이성계가 드디어 태조 이성계가 되는 순간이었다. - p.377


의외로 조선이 잘못 들어섰다는 소리를 필자는 가끔씩 듣는다. 조선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필자가 어떻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의견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필자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만약 고려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1418년에 우왕이 54세가 되고 창왕은 39세가 된다. 즉 54세의 우왕이 통치하는 고려가 되었을 것이다. 단, 우왕의 수명이 짧았을 경우 39세의 창왕이 통치하는 고려가 된다. 가정의 역사는 이렇지만 실제 역사는 세종과 한글을 탄생시켰다. 과연 우왕아 창왕이 그만했을까?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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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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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읽었던 책과 문서를 계속해서 기록하여 10~20년이 지난 후 다시 그 글을 읽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부분 어렸을 적에 학교 숙제로 썼던 일기를 시간이 지난 후에 읽어보면 창피하거나 '내가 정말 이랬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과거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기록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아는 일본의 소설계의 거장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 1위에 뽑혔던 그의 소설 1Q84를 쓰신 작가인 그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작가 중에 한 분이시다.


이번의 더 스크랩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4년 동안 <스포츠 그래픽 넘버>라는 잡지에 연재한 글이다. 그의 나이 30대 초중반 시절 미국의 유명한 잡지와 신문인 <에스콰이어><뉴요커><라이프><피플><뉴욕><롤링스톤><뉴욕타임스>를 읽으며 재미있을 법한 기사를 골라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작성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역사라 그런지 읽기 전부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자못 궁금하였다.


이 스크랩북은 문자 그대로 잡탕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라든가 "오오, 이런 일이" 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겨주신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기쁠 것이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이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삿짐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졸업앨범을 무심코 넘겨보는.. 그런 기분으로 읽어주시길 - p.6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건은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한두 개쯤 기억할 테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 그런지 내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신선함이 느껴졌다. 특히 작가였던 그가 겪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소설로만 봐서 자세히 알지 못했던 그의 성격과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재미있게 읽혔다. 특히 그가 조깅을 좋아한다는 것과 재즈, 클래식, 고전 소설, 영화 등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이제까지 나온 그의 소설 속에 나온 소재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다. 아마 이 스크랩 북을 꾸준히 작성하였기 때문에 최고의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는 일본 디즈니랜드가 개장하기 전 매스컴 프리뷰에 참가했던 역사적인 기사와 '올림픽과 별로 관계없는 올림픽 일기' 또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새로웠다. 


나 역시 이제까지 귀찮은 성격 탓에 일기를 꾸준히 쓰거나 스크랩 북을 제작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읽었던 신문 기사나 칼럼 등을 스크랩하여 내 생각을 함께 남겨둔다면 언젠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 서평을 남기는 것처럼 잡지나 뉴스 기사에 관한 생각을 글로 남긴다면 나도 나중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대단한 소설 작품 하나를 쓸 수 있지 않을까?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사람은 모두 나이를 먹는다. 그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좀처럼 알지 못한다. 머리가 벗어진다는 건 어떤 느낌이며, 성욕은 어느 정도가 있는지, 노안은 어느 정도 불편한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리적인 것인 동시에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의식도 미묘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하다. 20세의 건강한 청년이 '어차피 나이 먹으면 배 나오고 머리 벗어지고 신장병으로 죽을 테니'라고 생각한다면, 할 수 있는 일도 못 할 것이다. - p.29


<에스콰이어> 기사에 따르면 풀코스 마라톤에 출장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훈련량은 '일주일에 80킬로미터씩 두 달 동안 계속 달리는 것'이다. 하루에 약 12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마라톤에 출전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 p.48


헤르페스는 아주 흥미로운 병이다. 감염되어도 전혀 발병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혈액 내에 항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숫자로 말하면 감염되어 발병하는 사람은 전체의 십분의 일 정도다. 그러나 십분의 일이라고는 해도 미국에서는 약 천만 명에서 이천만 명의 음부 헤르페스 환자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는 해마다 이십오만 명씩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안심할 수 없다. - p.60


만약 반빙하소설이란 것이 실제로 있다면 나도 꼭 읽어보고 싶다. 반쓰나미소설, 반지진소설, 반분화소설, 반일식소설, 반폭풍파란홍수소설.. 이런 것도 소설가 쓰쓰이 야스다카 씨 풍으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 - p.75


그리스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상당히 까다롭다. 어째서 까다로운가 하면 대부분의 그리스 영화관은 여름에는 밤 9시쯤에 문을 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여는가 하면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영화관에 지붕이 없는 것이다. 지붕이 없으니 주위가 캄캄해지지 않으면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 대단하지 않은지? 옛날에 학교 운동장에서 곧잘 해주던 야외 영화 감상회와 비슷한 느낌이다. 스크린은 테니스 연습용 벽을 새하얗게 칠한 것 같고, 의자는 땅바닥에 파이프의자를 늘어놓는 게 전부다. 터무니없다고 하면 뭐 터무니없기도 하지만 요금이 200엔 정도로 싸다. - p.97


어디까지나 일반론이지만, 공포 소설 작가가 진지하게 공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유머 소설 작가가 진지하게 유머란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만사가 상당히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 p.112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현대와 같은 정보 과밀 사회에서 모든 명성은 근본적으로 과대평가라고 생각한다. 과소평가의 개념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소평가라고 주목받는 것 자체가 이미 과대평가이다. 어려운 세상이다. - p.129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달리기를 위한 음악으로 가장 좋은 것은 '스타스 온' 풍의 메들리송이다. 리듬이 안정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단순해서 편하게 달릴 수 있다. 그리고 스터프나 크루세이더스 같은 심플한 퓨전음악도 나쁘지 않다. 극히 평범한 아메리칸 록뮤직도 달리기에 어울린다. - p.152


나도 고양이를 꽤 많이 키운 사람이어서, 애완동물을 잃은 사람들의 기분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동물은 언젠가는 죽는 법, 그것도 대부분은 갑자기 죽어버린다. 그러니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잘 키우는 것이 애완동물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 p.173


운석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한 가지는 그 온도다. 지상에 막 떨어진 운석은 뜨겁고 연기가 풀풀 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그것은 아주 차갑다. 어쨌든 그것은 몇백만 년 동안 영하 200도에서 냉동되었던 것이니, 그렇게 쉽게 뜨거워지거나 하진 않는다. "차가워서 손을 댈 수 없을지도 몰라요"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세상은 참 다양한 일로 가득차 있구나 싶어 정말 감탄스럽다. - p.222


나는 원래 남들 앞에서 얘기하고, 개인기를 보이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것은 팔 년 전인데, 그때 부른 노래는 '이누노오마와리상(개 순경아저씨)'이라는 동요였다. 다시 떠올려봐도 불쾌하지만, 내게 '이누노오마와리상'을 시킨 것은 '생활향상위원회'라는 재즈 그룹에 있던 하라다라는 술버릇 나쁜 피아니스트다. 하라다가 주정을 부리며 나한테 억지로 '이누노오마와리상'을 부르게 했다. 재즈 뮤지션과 어울려서 좋았던 적이 없다. - p.275


나는 부자가 되면 목소리게 예쁜 일본의 여자대학 출신의 비서를 고용하여 이발할 동안 로버트 B. 파커의 소설을 낭독하게 하고 싶다. 나는 옛날부터 비서를 고용한다면 여자대학 출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어떨까?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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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예술견문록 - 중국 현대미술을 탐하다
김도연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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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떠오르는 국가 중 하나를 꼽으라면 누구든지 중국이라고 할 것이다. 언론이나 방송, 조정래 작가의 정글만리를 읽으면 중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대국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예술 시장을 가진 나라는 어디일까? 그것도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미술 작가인 쩡판즈의 '최후의 만찬'이 250억 원에 낙찰된 것만 봐도 중국이 왜 최고의 예술 시장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쓴 저자인 김도연 님은 이화여대에서 한국화와 서양화를 공부한 후 중국 중앙미술학원 예술 관리학과에서 아시아 예술시장으로 석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현재 크로스오브센터와 ICA 예술 마케팅 아트 매니저로 예술 기획을 하고 있는 그녀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 예술을 알라기조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림과 예술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미술 애호가처럼 미술관을 찾아가거나 미술 작가들에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여기에 소개 된 작가들 또한 처음 봤으며, 중국의 예술이란 이렇게 거대하고 놀라운 곳이라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느끼게 되었다.


책의 시작은 중국 북경에 있는 798 예술구의 소개로 시작한다. 798 예술구라는 곳을 알지 못했던 나에게 있어서는 저자 김도연 님의 소개와 관련 사진들을 볼 때면 정말 다른 세상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한때 공장이었던 그곳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간이었다.


798은 예술동네다. 길을 지나가면 작가들이 인사를 건네고 카페에 앉으면 옆자리에서 방금 시작한 전시의 큐레이터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구 저편 아프리카에 불어 있는 섬만큼이나 생경한 예술을 이야기하며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798 예술 마을이다. 처음 798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뉴욕의 소호와 첼시를 이야기한다. 거친 공장과 창고에서 에술의 생산기지로, 그리고 상업화되는 그 과정과 변화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자유로운 면에서 798은 소호, 첼시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변한다 해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골목 사이에 반짝 하고 빛나는 그 시간과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철저히 대형 브랜드숍, 고급 디자이너 부티크들과 레스토랑으로 관광객들의 성지가 된 트렌디한 소호에 비해 798은 아직 바깥 세계와는 분리된 특수한 공간이다. 밀려드는 상업자본 안에서도 798은 아직 여전히 예술을 중심으로, 이를 위해 움직인다. 이는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현실적인 공장의 담, 그리고 중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의 담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담 안에서 예술가들은 이를 뛰어넘기 위해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꿈을 꾼다. - p.50


798 예술구의 소개 다음으로는 차오창띠에 대해 설명해준다.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구로 알려진 차오창띠는 자본주의가 들어간 798 예술구과는 다르게 상업화가 되지 않아 진정한 예술구라고 불리는 곳이다. 차오창띠를 소개하며 그곳에 있는 화랑들과 미술관을 통한 현대 미술의 관점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는데, 예술을 잘 몰랐던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설명을 해주어 예술에 문외한이더라도 예술구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중국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에 대한 소개와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미술학원 미술관부터 금일 미술관, 국가 미술관, 중국 미술관까지 다양한 미술관을 소개하며 전시하는 갤러리들을 통해 중국 현대 미술에 대해 알 수 있었으며 작가들의 생각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괜찮았던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은데 그림체와 그들의 말한 내용을 읽을수록 예술에 관심이 많지 않았던 내가 중국 예술 문화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팡리쥔 - 시리즈2


저는 예술가보다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평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죠. 저는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떤 작가들은 예술이란 삶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아주 숭고하며 고립된 것이라고 생각하죠. 예술가들에게는 종종 자신을 대중에서 떼어놓고 마치 '비인류'처럼 생각하는 큰 병이 있어요. 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저와 대중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상하이 사람이든, 베이징 사람이든, 랴오닝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그들의 욕망, 좋고 나쁨은 99% 다 똑같아요. 만약 이 공통점을 모르고 대중을 그저 바보 취급한다면 그건 마치 눈만 있고 마음이 없는 것과 같아요. - p.192



팡리쥔 - 홍색 기억


저는 항상 제 주변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아요. 90년대 샤면에서 그 아이들이 제 현실이었다면 지금은 제가 생활하는 이 도시가 저의 현실이죠. 베이징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어요. 마치 생명체처럼요. 그 안에 파이프도, 큰 벽들도, 창문도, 매화나무도, 물도 있어요. 나는 내 작품이 좀 더 열려 있기를 바래요. 언젠가 나에게 '모호하다는 것은 더 열려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적 있죠? 나는 그 이야기가 참 좋았어요. 더 확장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나는 마음에서 본 것을 늘 갖고 다니는 드로잉북에 그려요. 그것은 내 상상이면서 진실이죠. - p.174

 



펑쩡지에의 작품


저는 염속을 염染과 속俗이라는 두 글자의 뜻으로, 즉 두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어요. '염'이란 시작적인 것이예요. 이 글자는 원래 색이나 빛이 선명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즉 색채를 포함한 표현 언어 그 자체의 강렬함을 이야기해요. 그 반면 '속'이라는 것은 그 안에 반영하고 있는 내용을 말하죠. 세속적인 생활이나 리듬상태를 가리켜요. 그래서 염속주의 예술이라는 것은 작품 내외에 드러나는 두 가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에요. 단순히 색깔이 화려한 작품이나 통속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이 시대와 세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특정한 표현 방법을 가진 일련의 작품들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 p.208



샹징의 작품


혹시 중국에서 활동을 하는 여성 작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그들이 다 커플이라는 거예요. 더구나 작가인 남편도 거의 대부분 유명한 작가들이죠. 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언젠가 미국의 평론가가 저에게 왜 그러냐고 묻더군요. 그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그렇더군요. 저 또한 그렇고요.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아요. 중국에서 여성 작가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요. - p.272



쉬빙 - 지서


<지서>는 완전히 표식문자 아이콘으로 이루어진 책이에요. 천서가 글자처럼 이루어진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은 반면, <지서>는 글자가 하나도 없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죠. 그리고 이 책은 어떤 문화, 언어와 상관없이 현대인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처음 이 책을 생각하게 된 것은 비행기 안이었어요. 공항과 비행기 안은 언어와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래서 그 어떤 공간보다도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래서 그 어떤 공간보다도 그림과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하죠. 예를 들면 비행기 안에 있는 안전 설명서도 불과 몇 개의 그림으로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놓았잖아요? 사실 몇십 년 전의 안전 설명서는 이렇게 간단하고 쉽지 않았어요. 점점 편하고 알아보기 좋게 변한 것이죠. 우리의 생활은 변하는데 언어는 그만큼 변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인류는 아이콘을 더 증가시키고 있어요. 바로 이런 아이콘으로 만들면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웠어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오랫동안 우리가 쓰는 아이콘을 수집했습니다. 1999년부터 시작했는데 최근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모티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어요. 우리는 사실 매일 '그림을 읽으며'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 중예요. - p.296



까오위 - 호랑이를 때리다


내 꿈은 디즈니가 되는 거예요.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좀 더 재미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잖아요. 정말 재미있는 세계를 만들 거예요. 저도 재미있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요. - p.319



이 외에도 중국 현대 미술에 한 획을 긋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인터뷰가 나오며, 쉬빙과 까오위처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젋은 예술 작가들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미래에도 최고의 예술 부흥 나라가 되겠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대한민국 역시 정부와 국민들이 예술에 관해 관심을 가져 중국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나라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을 보는 내내 중국의 예술 작품들을 보면서 언젠간 꼭 한 번 중국의 798 예술구와 차오창띠, 유명한 미술관들을 관람하고 떠나야겠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는 중국의 젊은 작가들을 만나며 이 단단한 거품, 그리고 그 거품이 낳은 힘찬 파돌르 느낀다. 중국 미술의 푸요로움이 이들을 키운다. 중국의 젊은 작가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이들에게 대학 졸업전시는 데뷔전과 같다. 매년 각 미술대학의 졸업전시는 갤러리들과 컬렉터들이 새로운 작가를 찾는 모색과 기회의 장이 되고 있다. 이 졸업전 작품들은 학생 작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완성도와 수준을 갖고 있다. 이런 젊은 작가들의 전시를 보고 나올 때면 중국 미술을 믿지 않을 수 없다. - p.19


작품을 만드는 것은 작가다. 그리고 그 작가를 만드는 것은 그가 먹는 밥과 다니는 학교와 만나는 친구들까지, 그가 생활하며 만나는 모든 것이다. 즉 작가 주변의 모든 공기와 소리와 온도가 작가를 만든다. 그래서 때로는 작가가 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도 작품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사회의 소리만이 들리는, 그런 특수한 시대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더 그러하다. 작가들은 아직 언어로 변하지 않은 눈물, 절망과 희망을 작품에 담아내는, 형形이 없는 것을 형形으로 옮기는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p.22


싱싱화회는 해산되었지만 이들이 시작한 변화의 바람은 여전히 공기 중에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에는 변화와 이를 저지하는 움직임이 번갈아가며, 때로는 동시에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오염을 제거하는 운동'은 자산계급 사상의 침투를 경고했으며 많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현실에 실망하여 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동시에 덩샤오핑이 주장한 개혁개방에 의해 서양 문화와 정보들이 빠르게 중국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한 예로 중국 미술관은 1978년 3월 프랑스 19세기 농촌 풍경화전을 시작으로 5년 동안 인상파, 독일표현주의, 피카소 등 수많은 서양 작품들을 중국에 소개했다. 이러한 서양예술은 이제까지 중국인들이 보아왔던 '붉은 그림'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이런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자각에 의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예술의 변화가 형상을 갖춘 것이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나타난 '85년 신조미술운동'이다. - p.34


798은 예술동네다. 길을 지나가면 작가들이 인사를 건네고 카페에 앉으면 옆자리에서 방금 시작한 전시의 큐레이터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구 저편 아프리카에 불어 있는 섬만큼이나 생경한 예술을 이야기하며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798 예술 마을이다. 처음 798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뉴욕의 소호와 첼시를 이야기한다. 거친 공장과 창고에서 에술의 생산기지로, 그리고 상업화되는 그 과정과 변화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자유로운 면에서 798은 소호, 첼시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변한다 해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골목 사이에 반짝 하고 빛나는 그 시간과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철저히 대형 브랜드숍, 고급 디자이너 부티크들과 레스토랑으로 관광객들의 성지가 된 트렌디한 소호에 비해 798은 아직 바깥 세계와는 분리된 특수한 공간이다. 밀려드는 상업자본 안에서도 798은 아직 여전히 예술을 중심으로, 이를 위해 움직인다. 이는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현실적인 공장의 담, 그리고 중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의 담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담 안에서 예술가들은 이를 뛰어넘기 위해 더 자유롭게 생각하고 꿈을 꾼다. - p.50


2003년 미국 타임지는 798예술구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예술 중심 22개 중 하나로 선정했다. 또 같은 해 뉴스위크는 그 해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베이징을 선정했는데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798의 발전을 통해 본 베이징의 문화적 잠재력이었다. 이미 798은 베이징, 중국을 넘어 세계적인 예술구가 되어 있었다. 결국 2004년 5월 17일 베이징시는 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798을 예술구로 지정하고 보호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 p.55


어쩌면 현대미술은 798처럼 많은 사람에게 이해받고 편안하게 알려지기보다는 아직도 차오창띠처럼 외롭고 외딴 섬처럼 허허한 것인지 모른다.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축제라 비판받고 오히려 대중들은 거리감을 느낀다. 차오창띠는 넓은 공간에서 상업과 섞이지 않은 더 날것의 예술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외딴 세계에서 나오는 순간 마주치는 현실은 저녁이면 동네에 들어서는 시장과 야채를 싣고 달구지를 끌고 가는 지친 노인의 모습이다. 이것이 예술과 현실인 것일까. - p.96


중국에는 '가장 먼저 게를 먹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영역에 처음으로 도전하고, 그 난관을 극복해 가장 빛나는 영광과 이익을 갖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금일 미술관과 그 창립 멤버들은 중국의 미술관 영역에서 '가장 먼저 게를 먹은 사람들'이다. 금일 미술관은 베이징시 정부 어떤 부서를 찾아가 어떻게 신청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미술관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베이징 금일 미술관 유한회사를 설립했고, 베이징 문화국의 공익성 미술국 비준을 받았으며, 이를 근거로 베이징 민정국에 미술관을 등록했다. 문화국도, 민정국도 처음으로 민간에게 미술관 허가를 내주다 보니 더듬더듬 길을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걸어온 길은 그 후 수많은 민영 미술관들을 위한 틀이 되었다. - p.144


국가 박물관에서 꼭 빠짐없이 봐야 할 곳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1층 1호 전시관의 <현대 미술 중요 작품 소장전>을 권한다. 붉은 벽면에 높게 전시된 작품은 언뜻 근대 유럽의 샬롱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중국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다. 정치와 역사를 담고 있는 이 50여 점의 작품들은 처음 중국 예술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모두 비슷한 '붉은 그림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시장에 처음 방문했던 날,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대학원 시험을 위해 열심히 외웠던 그 작품들이 모두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만 보던 모나리자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고 반가웠던 그런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 작품들 속의 상징성과 역사를 생각하면 이 방 하나에서도 반나절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모든 작품들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p.150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억해 버린 작가는 행복하기도 하지만 불행하기도 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 표현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인정받고 소통되는 것은 모든 작가의 기쁨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것이 너무나 강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로 인해 작가를 묶어놓기도 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다를 때 기대는 작가들을 묶어놓는 족쇄가 된다. - p.182


팡리쥔 - 저는 예술가보다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평생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죠. 저는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떤 작가들은 예술이란 삶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아주 숭고하며 고립된 것이라고 생각하죠. 예술가들에게는 종종 자신을 대중에서 떼어놓고 마치 '비인류'처럼 생각하는 큰 병이 있어요. 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저와 대중은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상하이 사람이든, 베이징 사람이든, 랴오닝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그들의 욕망, 좋고 나쁨은 99% 다 똑같아요. 만약 이 공통점을 모르고 대중을 그저 바보 취급한다면 그건 마치 눈만 있고 마음이 없는 것과 같아요. - p.192


펑쩡지에 - 선명하고 강한 핑크와 그린, 그리고 그 안에 떠 있는 듯한 거대한 얼굴의 여인들, 그들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색 속으로 휩쓸려갈 듯했다.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커다란 화면 안의 사람들은 '아름답다'라기보다는 '기괴하다'라는 표현이 더 적당했다. - p.198


펑쩡지에 - 저는 염속을 염染과 속俗이라는 두 글자의 뜻으로, 즉 두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어요. '염'이란 시작적인 것이예요. 이 글자는 원래 색이나 빛이 선명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즉 색채를 포함한 표현 언어 그 자체의 강렬함을 이야기해요. 그 반면 '속'이라는 것은 그 안에 반영하고 있는 내용을 말하죠. 세속적인 생활이나 리듬상태를 가리켜요. 그래서 염속주의 예술이라는 것은 작품 내외에 드러나는 두 가지를 다 아우르는 개념이에요. 단순히 색깔이 화려한 작품이나 통속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이 시대와 세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특정한 표현 방법을 가진 일련의 작품들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 p.208


황루이 - 미술은 현실, 3차원의 것을 2차원인 평면에 나타내거나 2차원을 3차원인 입체로 나타냅디ㅏ. 어떤 형식이든 결과물은 2차원, 3차원이라는 것에 묶여 있어요. 하지만 시는 달라요. 완전히 상상의 것이죠. 시라는 것은 어떤 시간, 시대, 상황이 있을 때 꽃을 피워요. 그때의 베이다오, 망커의 시를 보면 정말 그래요 불가사의할 정도죠. 하지만 우리, 그림을 그리는 이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 p.228


황루이 - 798은 어떻게 보든 하나의 성공 사례예요. 모든 것은 변해요. 그렇지만 저는 798이 그 존재 자체로 아주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2002년 제가 처음 798에 작업실을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요. 당시 798이 예술가들만을 위한, 예술계 사람들만의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을 찾아요. 순수한 예술만을 위한 공간에서 상업자본이 들어오고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죠. - p.232


샹징 - 혹시 중국에서 활동을 하는 여성 작가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그들이 다 커플이라는 거예요. 더구나 작가인 남편도 거의 대부분 유명한 작가들이죠. 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언젠가 미국의 평론가가 저에게 왜 그러냐고 묻더군요. 그 질문을 받고 생각해 보니 정말로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그렇더군요. 저 또한 그렇고요. 그때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아요. 중국에서 여성 작가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요. - p.272


쉬빙 - <지서>는 완전히 표식문자 아이콘으로 이루어진 책이에요. 천서가 글자처럼 이루어진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은 반면, <지서>는 글자가 하나도 없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죠. 그리고 이 책은 어떤 문화, 언어와 상관없이 현대인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처음 이 책을 생각하게 된 것은 비행기 안이었어요. 공항과 비행기 안은 언어와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래서 그 어떤 공간보다도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에요. 그래서 그 어떤 공간보다도 그림과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하죠. 예를 들면 비행기 안에 있는 안전 설명서도 불과 몇 개의 그림으로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놓았잖아요? 사실 몇십 년 전의 안전 설명서는 이렇게 간단하고 쉽지 않았어요. 점점 편하고 알아보기 좋게 변한 것이죠. 우리의 생활은 변하는데 언어는 그만큼 변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인류는 아이콘을 더 증가시키고 있어요. 바로 이런 아이콘으로 만들면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웠어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오랫동안 우리가 쓰는 아이콘을 수집했습니다. 1999년부터 시작했는데 최근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이모티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어요. 우리는 사실 매일 '그림을 읽으며'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 중예요. - p.296


궈홍웨이 - 예술가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을 하더라도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자랑 데이트를 해도, 도박을 해도, 영화를 봐도 그것이 작품을 하기 위한 준비며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도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고정관념을 갖고 있잖아요. 늘 보던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면 아주 기쁘죠. 마치 어렸을 때 개미가 그냥 기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주 놀라고 신기했던 것처럼 말예요. 아마 그런 기분을 아직도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어요. 바나나를 먹고 난 뒤 그 껍질 위에 아크릴 바나나 껍질로 그렸어요. 바나나 껍질이 말라 시들어버리자 결국 이 아크릴 바나나 껍질만 남는 거죠. - p.335


다른 많은 직업들처럼 이들도 처음브투 예술가로 태어나지 않았고, 시대 안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비슷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특별한 공통점을 하나 묻는다면 나는 이들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창조를 하는 것이 직업인 작가라면 사실 모든 일은 자신 안에 있다. 모든 문제도, 해결도 자기 안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민하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어쩌면 깨지기 쉬운 두 개의 유리공을 함께 놓아두는 것처럼 불안하고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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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론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박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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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4년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 많고 잘 팔리는 최고의 작가는 누구일까?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대부분 한 번은 봤을 법한 '용의자x의 헌신', '백야행', '유성의 인연' 등 책, 영화, 드라마로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는 정말 대단한 작가이다. 그는 1년에도 여러 번 신작을 내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번 신작인 질풍론도 역시 발간 일주일 만에 100만 부가 팔릴 만큼 그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으로 봤을 때 그는 어느 연령대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추리 소설을 쓴다. 그는 20년이 넘는 작가 생활을 하면서 책을 발간할 때마다 이해하기 쉽고 빠르게 궁금증을 유발해내고, 수학, 물리학, 역사와 일본의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해주고 매번 참신한 분야의 소재를 이용하여 치밀한 구성과 함께 날카로운 문장으로 그의 스타일을 질리지 않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이번 책 질풍론도의 주제는 바로 '바이러스'이다. 나는 여태까지 다양한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바이러스라는 주제를 사용한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봐서 읽기 전부터 큰 기대를 했다. 간단한 책 속의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구즈하라라는 인물이 다이어 대학 의과 대학에서 K-55이라는 초미립자 바이러스를 훔쳐 아무도 모르는 스키장의 한 공간에 묻는다. 그는 바이러스를 땅에 묻을 때 테디베어 인형을 나무에 묶어 수신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 후, 의과 대학 소장에게 돈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하는데 의과 대학 소장인 도고 마사오미는 구리바야시에게 그 물건을 어떻게든 찾아오라고 말하는 순간 바이러스를 묻은 구즈하라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소지품에서 나온 수신기와 여러 장의 사진들을 가지고 구라바야시는 자기 아들 슈토의 도움으로 그 스키장을 찾아가게 된다. 구라바야시는 아들 슈토와 가료다케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으로 가서 테디베어 수신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곳에 있던 안전 요원인 네즈 쇼헤이와 세리 치아키에게 사람을 죽이는 바이러스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백신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그 물건을 찾게 한다. 바이러스를 찾는 과정에 중간중간 의문의 인물인 오리구리 에이지가 방해를 하지만 스키장에 있던 사람들이 협력하여 결국 K-55 바이러스를 찾게 된다. 하지만 오리구리가 그 바이러스를 다시 훔쳐 달아나는데 그 후의 상황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가 정말 최고의 추리 소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300~400페이지가량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책 속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고 나 자신이 꼭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 책은 궁금증과 긴장감 있는 진행 과정으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이한다. 책을 다 읽었을 때쯤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가 어떻게 매번 다양한 아이디어로 추리 소설을 쓰는지 궁금하였다. 매번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와 다양한 소재들을 이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과 추리력을 키워낼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최고의 추리 소설 작가인지 매번 감탄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독자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가의 글 실력이 정말 감탄이 나오게 한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스키장이 번창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다. 스키나 스노보드 인구가 늘어나는 것, 그것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늘어나는가.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에서 화제가 되면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취미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인간관계가 생명선이 아닐까 하는 대답에 종착한다. 어떤 취미든 놀이든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 권유를 받음으로써 흥미를 갖게 되는 살계가 대부분이다. - p.82


구리바야시는 K-55 용기가 깨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봄바람을 탄 초미립자는 거침없이 산기슭까지 내려올 것이다. 여름을 맞이할 때까지 사토자와 온천 마을에서 사고가 날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흡입탄저 증세는 인플루엔자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 치료는 나중 문제일 것이다. 설령 탄저라고 판명이 나도 페니실린 등의 항생물질은 전혀 듣지 않는다. 명색이 유전자 조작을 한 생물병기다. - p.146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이야. 일확천금을 노리려면 어딘가에서 한탕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 그때가 올 때까지 가만히 수더분하게 기다려야 해. 느려 터지고 둔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인간, 주위 사람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이며, 숨죽이고 있는 거야. 그러면 분명 기회는 와. 중요한 것은 그때 절대 주저하거나 정에 얽매이지 말 것.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돼. - p.218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리 없잖아. 유키, 이것만은 알아주렴. 자신이 불행하다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 실격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몫마저 행복해지길 바라야 해. 그러면 분명 그 행복이 넘쳐흘러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불행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들도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껏 행복을 만들어서 그 가엾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돌아가도록 애쓰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건 믿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노조미가 죽어서 괴롭지만, 이렇게 가게에 나오는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즐겁길 바라기 때문이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알아주겠니? - p.350


그것도 그렇지만, 다카노 씨네 가족 얘기에도 감동했어. 어딘가에서 불행을 만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자신들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걸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그런 건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내게는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걸 계속하는 것이 분명 누군가를 위한 것도 된다. 그렇게 믿기로 했어.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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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앤 스콧 지음, 강경이 옮김, 이정호 그림, 안지미 아트디렉터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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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주문할 때마다 보통 온라인 서점을 이용한다. 구매하고 싶은 책들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고 쌓아두었던 포인트로 할인을 받고 가끔 덩달아 주는 사은품까지 편리하게 배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온라인으로 책을 구매하는 습관이 길들어 있었기 때문에 서점은 가끔 길거리를 지나다가 구경하러 가거나, 급히 읽고 싶은 책(이런 경우는 내가 원하는 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을 사러 가는 경우 외에는 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 때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자 저자인 앤 스콧은 펭귄 책을 사모으려고 토요일 아침마다 서점에 가는 오빠를 따라나서면서 애서가가 된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렸을 적부터 누나가 책을 많이 구매하고 읽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 역시 책을 읽는 습관이 길들었는데 주인공과 내가 그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 친근감이 들었다. 저자는 오빠와 함께 길을 지나가다 주운 오렌지 상자를 주워 자신만의 첫 책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책장이 나의 첫 서고였기에 작가와 나의 공통점이 정말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책에서는 자신이 사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영국의 런던, 미국 뉴욕, 아일랜드 코네 마라 등 총 18곳의 고서점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추억과 상상력을 더하여 이야기해 나간다. 몇백 년 동안 자리를 지켜 낸 서점들과 지금은 없어진 서점들에 관해 이야기해 나가며 그곳의 풍경과 인테리어, 직원들과의 대화, 그곳에서 만난 유명한 작가와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 내용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그 서점들에 대해 얼마나 애착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점을 통해 친구를 만나고 사랑을 주고받고, 지식과 교양을 쌓아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애서가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이 소개하는 서점에 있는 유명한 책들의 초판을 보며, 실제 유명한 작가와 예술인(셰익스피어, 루이스 스티븐슨, 모차르트 등)들이 이곳을 다녀오지 않았겠냐는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이해 나간다. 책을 읽으며 나오는 작품들과 작가들의 이야기들 대부분은 내가 처음 들어보고 생소하여 책을 읽는데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주인공이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들이 읽으면서 과거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은 이렇게 책을 읽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나오는 18곳의 서점들처럼 테마와 역사가 있는 서점들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내가 사는 이곳에서 보기가 힘들다. 서점이 단순히 책을 진열하여 판매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고 문화가 있고 다양한 즐길 거리가 존재한다면 아무리 온라인 서점이 강세더라도 그곳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계속 생기지 않을까? 이젠 중고등학생들의 참고서나 도서관에 낙찰 판매하는 것으로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테마 서점을 기획하여 손님들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 역시 온라인 서점보다 그곳에서 사람과 문화를 만나고, 온라인에서 쉽게 지나치는 책을 우연히 만나며 더욱 많은 책을 만날 수 있는 애서가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거리에서 보면 컴펜디엄서점의 유리문은 늘 열려 있었고, 넓은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책들이 보였다. 그 거리는 얼마나 분주했던가, 고르지 않은 길 위에서 짐을 싣는 사람, 옮기는 사람, 차에 타는 사람, 출발하는 사람, 분주한 거리를 건너 서점 안에 들어서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준비된 지성, 새로운 발견이 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다. "혹시.. 있나요?" 하고 물으면 솔향기 풍기는 책장 사이로 서점 직원이 틀림없이 다가오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에 익숙해졌고 내 삶 속에서 그곳의 형체와 질서를 이해했다. 내 마음 속의 세계, 이마고 문디(Image Mundi : 세상의 이미지) - p.19


자리를 지키고 앉은 서점 직원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하더라도 작게 웅얼거렸다. 당연한 일이다. 이오나 출판사가 사라지고, 섬세하게 제본된 책들이 나무 책장에 말없이 꽂힌 이곳에서 소리를 낼 게 대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서점 밖에는 거친 자연이 있다. 마을을 지나 낮은 곳으로 흐르는 투명하고 거친 물살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서점 안에는 시간, 시간, 또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 엽서를 쓰고 있다. 시간이 흘렀지만 글의 형태도 내용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 p.53


그레일 서점은 내게 책 이상의 것을 선사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나 혼자서, 또는 아들과 함께 그레일 서점에 있을 때면 그곳의 밝은 음악과 대화, 그림, 책 읽기에 좋은 포근하고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나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나의 고질적인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p.106


북스오브원더는 살아다가 어떤 질문을 봉착했을 때 찾아가면 좋은 서점이다. 무엇이 현실이지? 혹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이런 질문, 나 역시 이 두 가지 질문을 품었었다. 그때야말로 무지개 너머 그곳으로, 거울 속으로 여행해야 할 순간이 아닐까? 책 선반에는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이 고민과 삶을 통해 제시한 해답이 가득했다. 그들은 상상을 통해 마음과 영혼의 장소를 탐색했다. 곰돌이 푸의 100만 에이커 숲과 나니아, 오즈, 미시시피 강, 마법에 걸린 독일 숲을 여행했다. 스코틀랜드 작가들은 자신의 반쪽인 어둠과 씨름하면서 어린 시절의 빛을 찾아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p.112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날개 달린 마차를 알고 있었다. 일과 삶 사이의 뼈아픈 선택에 대한 예이츠의 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양심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던 햄릿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관념 중 무엇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실수가 두려워, 비난이 두려워 뒤로 물러섰다. 우리는 지식을 통해 성장했지만 협상의 경험이 없었다. 그 긴 지식의 순례길 끝에 내가 다다른 것은 강렬한 감정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 감정을 불신했다. 내가 틀렸다. 나는 어려서 그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릴지 알지 못했다. - p.174


나는 온라인으로 책을 요청하고, 책값을 지불했다. 그랬더니 내가 요청한 책들이 진짜로 왔다. 누구로부터,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또다른 종류의 전설이 될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와 응답'의 관계 같기도 하다. - p.195


음악을 틀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큰 공간에서 리듬을 느꼈다. 어쩌면 내 심장의 리듬이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서점의 리듬이었는지도, 누군가 배달을 오고 사인을 하고 정리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일단 문이 닫히고 나자 서점은 다시 혼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었다. 아들이 부탁한 책이 다 포장되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들고 갈 책이 너무 많았다. 결국 그 아름다운 책들을 우편으로 보내기로 했다. 내 주소가 조용한 서점에 울러 퍼졌다. 지상에서의 나의 거처와 이곳의 마법이 서로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세상의 이미지, 이마고 문디에서 그게 어디쯤일까 생각해보았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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