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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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우리나라 애서가들에겐 유명한 '연금술사'의 저자인 파울로 코엘료는 전 세계 170개국 이상 81개 언어로 번역되어 2억 1천만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한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첫 작품은 '순례자'이다. 이후 '브리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아크라 문서', '불륜'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지난 2009년에 쓴 '연금술사'는 한 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작가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 책을 읽은 이유


책을 한창 읽기 시작할 때 우연히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그 후 그가 쓴 책이라면 필독서로 넣을 만큼 대부분 구매했지만 막상 책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겐 아직 어렵기도 했고 작품마다 길지는 않았으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파울로 코엘료가 '스파이'라는 신간을 낸다는 소식에 다시 도전하고자 읽게 됐다.


# 줄거리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에서는 실존 인물인 마타 하리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본명은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이나 책에서는 남편의 성을 딴 마르헤르타 마클레오트라고 나오기도 한다. 


그녀는 학창 시절 학교 교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성적 노리개로만 생각했던 남편에 대한 아픔을 갖고 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살던 암스테르담을 떠나 프랑스 파리의 한 클럽에서 밸리 댄스를 선보이며 유명세를 띄게 됐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1차 대전이 발생하기 직전 전성기가 끝난 그녀는 스파이로 지목되어 수감하게 됐고 자신의 무죄를 알리고자 했지만 결국 파리 교외에서 총살을 당하고 해부용 시신으로 처리됐다.


# 느낀 점


2016년 국내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되었던 페미니스트,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 역시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에 대한 주제가 담겨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고 무시를 받은 마타 하리가 어떻게든 살고자 하여 벌인 일과 골칫거리를 회피하고자 거짓말을 하고 마타 하리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운 정부 고위층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마타 하리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프랑스에서 버려졌다는 말을 하며 비난하면서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과거의 영광과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잊지 못한 그녀는 어떻게든 파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자신과 주위에 일어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과거로만 돌아가고 싶었던 그녀, 수감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과 관계를 맺은 남자들이 구해줄 거라는 잘못된 믿음은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죄가 없다? 어쩌면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겁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이 도시에 첫발을 디딘 이후로 죄가 없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정부 기밀을 원하는 자들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결국은 내가 조종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죄로부터 도망쳤고, 나의 가장 큰 죄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이용한 것이라고는 상류사회 상롱에서 떠도는 풍분들뿐이었지만 나는 스파이라는 죄명을 선고받았습니다 - 26


추억은 종잡을 수 없는 단상들과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이미지로, 그리고 사소한 흔적 하나, 의미 없는 소음 하나로 지금도 숨막히게 조여오는 것들의 이미지로 가득차 있습니다. 빵 굽는 냄새가 감방으로 흘러드는 시간이면 자유롭게 카페를 오가던 날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그건 나를 둘러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외로움보다 더욱 나를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추억은 우울이라는 악마를 동반하지요. 아, 나는 그 잔인한 악마에게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죄수의 노랫소리를 듣는 일, 한 번도 나에게 장미와 재스민을 가져다준 적 없는 팬들에게 얼마 안 되는 편지를 받는 일, 어떤 도시에서의 한 장면, 그 당시에는 간과하고 지나쳤으나 지금은 내가 방문한 나라로부터 내게 남겨진 전부가 된 그 장면을 떠오르는 일, 추억은 항상 승리합니다. 그리고 추억과 더불어, 우울보다 더욱 무서운 악마가 다가옵니다. 회한이라는 악마. 수녀들이 방문해 잠깐 얘기할 때를 제외하면, 이 감방 안에서 나의 유일한 동반자는 회한입니다. 회한은 신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회가 '육체의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이유로 나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두 마디 말을 건네올 뿐인데, 그러면 마치 과거로 흘러가느 이 강에 뛰어들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것처럼 내 입에서는 추억들이 터져나옵니다 - 28


해바라기 씨앗이란다. 하지만 해바라기 씨앗 그 이상의, 네가 배워야 할 가치가 담겨 있단다. 이 씨앗들은 네가 다른 꽃씨와 구별하지 못할 때라도 언제나 해바라기도 피어날 거야. 아무리 원한대도 장미나 우리 나라의 상징인 튤립으로 변할 수는 없어. 타고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죽을 때까지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게 된단다 - 32


꽃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름다움도 시듦도 지나가고 새로운 씨앗을 남길 거야. 네가 기쁠 때나 아플 때, 슬플 때에도 그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어. 모든 것은 지나가고 늙고 죽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 32


내 첫번째 조언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당신의 공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말아요. 사랑은 독이에요. 한번 사랑에 빠지면 당신은 더이상 당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게 돼요. 당신의 심장과 머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해버리죠. 당신의 존재가 위협받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뭐든지 하고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사랑이라고 부르는, 설명할 수 없고 위험한 그 무엇은 땅 위에서 당신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습만 남겨두지요 - 81


사람들은 인생이 그렇게까지 복잡하지 않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인생은 대부분 복잡한 겁니다. 단순한 건 아이스크림이나 인형을 원하는 것, 바보 같은 금속 공으로 나뭇조각을 맞히려고 애쓰며 땀흘리는 저 남자들, 집안의 가장으로서 책임이 클 저 남자들처럼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건 간단하지만 명성을 한 달 혹은 일 년 이상 유지하는 것은 어려워요. 특히 그 명성이 육체와 관련되어 있을 때 더욱 그렇지요. 한 남자를 온 마음을 다해서 원하는 건 단순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 남자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고  세상 무엇과도 가족을 바꾸지 않을 사람이라면 모든 게 불가능해지고 복잡해집니다 - 82


세상 모든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어요. 사랑이라고 불리는 잔인한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유죄인 이유는 그들이 과거를 바라보며 어째서 미래를 위해 그토록 수많은 계획을 세워두었는지 자문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기억을 조금 더 멀리 더듬어본다면, 씨앗이 뿌려진 날을 기억하고 그 씨앗에 거름을 주고 마침내 뽑아낼 수 없는 나무가 되기까지 키워낸 시간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 83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는 길을 잃는 법도 없습니다 - 86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항상 눈으로 볼 수 있는 상대와 대화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겨우 십 년 사이에 '본다'와 '말한다'가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익숙해졌다고 여기고, 그것이 우리의 반사신경에 일으킨 거대한 충격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로 인한 실제 결과는 말이죠. 우리가 전화기에 대고 이야기할 때 어떤 마술적 황홀경과 아주 흡사한 경지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는 거죠 - 112


난 이미 프랑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내게서 단물을 빼먹고 나를 내쳤으며,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부리던 재주를 똑같이 따라 하는 러시아 예술가들, 또는 아마도 포르투갈이나 노르웨이, 스페인 같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을 이들을 더 애호했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라에서 배운 이국적인 무언가를 선보이기만 해도 새로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프랑스인들은 바로 믿어버리고 마니까요.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 120


한 나라가 강대국이 되면 항상 지불해야 할 대가가 따릅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지만 누구에게든 런넝과 파리 중에 어느 곳으로 여행하고 싶은지 물어보세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답은 센 강이 가로지르고, 대성당과 옷가게, 극장, 화가, 음악가들이 있는 도시, 더 대담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폴리베르제르, 물랭루주, 리도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장들이 있는 바로 그 도시일 겁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냐고만 물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따분하게 생긴 시계탑과 절대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 왕인지, 아니면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이름 붙인,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과 기념비적 건축물인 개선문과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상품들을 내놓는 샹젤리제 거리인지 - 121


인생은 왜 나로 하여금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일을 겪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힘든 순간들을 견딜 수 있는지 보기 위하여,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하여, 내가 무언가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지만 그러기 위해 다른 방법, 다른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혼의 어둠 속에 빠뜨리거나 나를 인도할 단 하나의 손길도 없이 늑대들과 다른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숲속을 걸어가게 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 125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아침식사가 오기 전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세요? 나는 춤을 출 것입니다. 음정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일 겁니다.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보여줄 테니까요. 나라는 자유로운 여성을! 자유야말로 내가 항상 찾아온 것이니까요. 사랑을 찾은 적은 없었습니다. 비록 사랑이 내게 왔다가 떠나갔고, 사랑 때문에 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했고, 나를 추적하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지만요. 하지만 나 자신의 이야기를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베를린에 도착한 그날 아침부터 인생은 너무 빨리 흘러갔고, 나는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추기가 힘이 듭니다 - 126


이 모든 걸 더 일찍 얘기했어야 했겠지만 나는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 내가 성공한 공연 기획자가 된 건 그 날 밤 빈에서 본 모든 것에서 비롯되었을 거예요. 내일이면 내가 소속된 부대의 지휘관에게 신고하러 갑니다. 나는 당신의 공연을 보러 파리에 여러 번 갔어요. 당신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용가'라거나 '예술가'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이들 때문에 마타 하리가 영역을 잃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작업이 존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 때문에, 오로지 사랑 때문에,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상관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목적이었습니다 - 131


피아노는 정말로 화음이 틀리면 안 됩니다. 진정한 죄란 우리가 죄라고 배운 그런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조화와 동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말하는 참과 거짓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나는 그를 향해 돌아서서,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겠으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어요. "죄악은 신이 창조한 게 아니고, 우리가 절대적인 것을 어떤 상대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려 할 때 만들어졌어요.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죄와 규칙, 악에 맞서 싸우는 선을 결정하다보니 결국은 각자 자기가 옮다고 생각하죠" - 133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곳이 어떻게 천국일 수 있단 말인가요? 나는 행복을 찾았던 게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라 브레 비 La vraie vie', 진정한 삶을 원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상심의 순간들이 함께 있고, 충성과 배신, 두려움과 평화의 순간들이 공존하는 진정한 삶, 내가 미행당하고 있다고 거지가 말했을 때, 나는 이전에 맡았던 그 어떤 역할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나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독일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인 척하며 실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이기게 만들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신이 수학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신이 만일 사람이라면, 신은 상대방의 수를 앞질러 생각하고, 미리 무너뜨릴 전략을 준비하는 체스 선수일 것입니다 - 157


사랑의 진짜 얼굴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걸까?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이 신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바를 깨닫습니다. 사랑이란 타인에 대한 믿음이며 그 얼굴은 항상 신비롭게 감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요. 우리는 매 순간 감정과 느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암호를 풀려 하거나 알아내려고 하는 순간, 마법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굴곡지기도 하고 밝게 빛나기도 하는 길을 따라가고,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바닷속 가장 깊은 곳으로 이끌려 갈 때에도 우리를 끌어주는 그 손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겁에 질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궁전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끄는 발걸음을 두려워하거나 우리에게 모든 것이 밝혀지기를 원한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 208


불행히도 오늘 일어난 일은 어제도 일어났고 내일 또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거나, 아니면 인간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육체는 쉽게 지친다 해도 영혼은 언제나 자유로우니, 언젠가는 우리가 세대를 거듭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 지옥의 수레바퀴에서 헤어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비록 생각이 늘 제자리에 머문다 해도 그보다 더욱 강한 힘이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할 때에 상대방과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말도 서류도 회의록도 진술도 고발도 변호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전도서의 한 구절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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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 대한민국이 선택한 역사 이야기
설민석 지음, 최준석 그림 / 세계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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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한 후 더욱 인기가 높아진 학원 강사 설민석 씨는 현재 '태건에듀' 대표이사와 '이투스' 대표 강사를 맡고 있다. 역사에 관한 강의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옮겨 설명하는데 탁월하며, 핵심적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하여 수험생들에게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끊임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동안 집필한 책으로는 '설민석의 무도 한국사 특강', '전쟁의 신, 이순신', '역적의 아들, 정조', '국사대백과' 등이 있다.


# 책을 읽은 이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난 다른 이들보다 역사에 무지했다. 학창시절 역사에 관심이 없어 공부하지 않았을뿐더러, 평소에 책을 읽는다고 해도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나이를 하나둘 먹을수록 예전보다 역사에 관해 관심이 가게 됐고, 우연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설민석 씨라는 역사 강사의 책이 인기가 많은 것을 알게 돼 구매해서 읽게 됐다. 유시민 씨의 '나의 한국 현대사'가 1959년부터 2004년까지 담고 있다면 설민석 씨의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을 이끈 27명의 임금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 줄거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왕들의 세자 시절과 함께 그들 옆에 있었던 여러 왕후들에 대한 이야기, 그 시대에 터진 다양한 사건에 대해서 설민석 씨가 상세히 알려준다. 책 중간중간에는 독자들이 궁금해할 내용을 초등학생들도 알기 쉬울 정도로 친절히 설명해준다.


# 느낀 점


설민석 씨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하며 그 당시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을 설명해준다. 보통 이러한 역사책은 그동안 수없이 나왔지만 '조선왕조실록'이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로서 큰 인기가 있는 이유는 누구나 알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503페이지에 일반 소설책보다 큼에도 재미있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쉽게 이야기를 풀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기 전만 하더라도 난 조선의 왕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했었는데 불과 몇백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몇 일 전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해주는 설민석 씨 덕분에 역사에 무지했던 내가 조금이나마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정도전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신권 중심의 세상이었습니다. 정도전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왕조체제에서 오는 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조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아들로 대를 잇기 때문에 성군이 나올 수도 있지만, 폭군이 나올 수도 있지요. 따라서 어떤 자질의 왕이 즉위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본 겁니다. 소위, 복불복이라는 거지요. 성군이 나오면 괜찮지만, 폭군이 나오면 나라가 망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폭군이 나와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시스템, 메뉴얼을 만든 것이 정도전이지요 - 52


보통 나라를 세운 왕을 '태조'라 하고, 이에 버금가는 업적을 쌓은 왕을 '태종', 제도와 문물을 완성시킨 왕을 '성종'이라고 합니다. 즉, 태조를 세운 창업군주는 '조'를 쓸 수 있고, 이후의 왕들은 태조의 종통을 계승한 것이므로 '종'이라고 쓰는 게 원칙이에요. 하지만, 종통을 계승하지 않고 계승권 밖에 있던 자가 임금이 되면 입승왈조라고 해 '조'를 씁니다. 세조와 인조가 그런 경우이지요 - 60


조선시대 왕들은 크게 2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답니다. 첫째, 훌륭한 임금, 성군, 반대로 이상한 왕을 뭐라고 부르지요? 폭군이라고 하지요. 대표적인 성군은 세종과 조선후기 정조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폭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연산군이지요. 그런데 두 가지 타입에 해당되지 않는 제3의 군이 있어요. 그게 바로 태종 이방원, 세조 수양대군, 영조 같은 인물이에요. 일례로 영조는 왕이 되기 위해 피바람을 쓰나미처럼 일으켜요. 그것만 본다면 그야말로 광폭한 폭군이지요. 그런데 막상 왕위에 오른 뒤에는 애민정신으로 나랏일과 백성을 보살핍니다. 결국 성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폭군도 아닌 제3의 군인 거예요 - 90


세종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하들의 사직서였습니다. 유능한 관료야말로 조선을 이끌어갈 동력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종이 오늘날의 리더였다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처벌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재미 삼아 세종을 악덩 사장으로 비유를 해보았는데요. 세종은 아마 신하들을 조금 피곤하게 해서라도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겠지요? - 118


만 원권 표지 앞면에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다섯 개의 봉우리 위에 해와 달이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지요. 이 일월오봉도는 임금이 앉는 용상 뒤에 놓인 병풍에 그려져 있던 그림입니다. 조선 왕실의 왕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요. 만 원권 뒷면을 보면 여러 개의 점이 찍혀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이것은 별자리에요. 태조 이성계 때 만든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입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는 '혼천의'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어요.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이지요. 세종은 장영싱을 통해 혼천의를 만들 것을 지시합니다 - 123


오늘날 많은 이들이 측우기를 장영실이 발명할 거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문종이 만든 거랍니다. 물론 세종 때 다양한 과학기구가 장영실에 의해 발명된 건 맞아요. 하지만 실록에 측우기는 장영실이 아닌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작품이라는 게 명확히 기재되어 있답니다 - 143


1453년 10월 10일! 김종서의 집에 복면을 쓴 검은자들이 떼거리로 들이 닥칩니다. 퍽! 수양대군이 사람을 모아 불시에 김종서 집에 쳐들어가 쇠몽둥이인 철퇴로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 등을 모두 제거해버린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김종서가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김종서 세력을 숙청하지요. 또한 당시 수양대군의 책사였던 한명회에 의해 조정 신료들의 목숨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졌고요. 계유년 하룻밤에 조선의 정치 판도가 뒤집힌 사건! 그리고 수양대군이 절대적 권력을 갖게 된 정변인 계유정난이 발발한 것입니다. 계유정난은 '계유년에 발생한 어지러운 난을 바로잡았다'는 뜻이에요.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역모를 진압하고 세상을 평정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승자인 수양대군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뿐 시살을 수양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난이라고 볼 수 있어요 - 161


한명회의 살생부라고 혹시 들어봤나요? 야사에 따르면 한명회가 살생부를 작성했다고 전해져요. 이는 조정대신들의 목록으로, 죽일 자와 살릴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던 거지요. 계유정난 당시 한명회는 궁궐 앞에 무사와 대기합니다. 그리고 궁궐로 들어오는 대신 중에서 자기 자기와 반대파인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요. 조선 대신들의 목숨이 한명회 한 사람 손에 달려 있던 겁니다. 가장 잔인하면서 단순하게 세조의 반대파들을 제거함으로써 세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거지요 - 177


성종의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경국대전의 왕성입니다. 우리가 성종의 여러 업적 중에서도 딱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바로 '경국대전의 완성'이라고 말해도 될 만큼 중요한 사실이지요. 조선에는 '경국대전' 이전에도 여러 법전이 있었지만, 사회 전반의 법을 두루 다루는 법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비로서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지요. '경국대전'은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손자인 성종에 이르러 완성해 반포하게 됩니다. '경국대전'은 굉장히 세밀해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자적인 내용이 담겨있지요. '경국대전'의 '형전'에는 자녀균분 상속법이라든지, '호전'에서 매매 및 사유권에 대해 절대 보호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만의 독자적인 고유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삶의 다방면을 법으로 규정하였고 이를 지키도록 장려하지요.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일을 처결하는 게 아닌, 모든 것이 법에 기반을 둔 국가 제도가 자리 잡힌 겁니다 - 206


연산군 11년 6월,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 관리인 '채홍준사'를 파견하지요. 또한 천 명의 기생들을 둡니다. 그중에 재주가 뛰어나면 '운평'이라고 하였고, 재주뿐만 아니라 미모가 아름다운 ㄱ ㅣ생은 '흥청'이라 불렀어요. 이들은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가 세원 원각사(현 탑골공원)에 수용되지요. 연산군은 수많은 기생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깁니다. 이러한 놀이 때문에 국고는 텅텅 비게 되고,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한 거지요 - 227


도교가 어떤 종교인지 아나요? 도교는 무위자연과 신성사상을 기반으로 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인데요.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검소하게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지금까지도 우리 생활 곳곳에 도교의 숨결이 살아있답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 모두 다 신선이잖아요? 이런 것들이 다 도교의 영향이지요. 도교는 유교 국가인 조선의 국기 기관에까지 미쳤답니다. 조선의 관청 중에 소격서라는 곳이 있는데요. 이곳에서 도교와 관련한 제사와 의식을 행했거든요. 그런데 조광조가 이것을 폐지하자 주장하지요 - 239


조선시대의 관직은 1~9품이 각각 '정', '종'으로 분류되어 있는 18품계입니다. '정'과 '종' 중에서 '정'이 더 높은 관직이에요. 즉, 똑같은 정3품, 종3품이라 할지라도 정3품이 더 높은 거지요. 만약 정3품의 관리 자리가 빌 경우, 종3품의 관리가 대리로 업무를 맡아보기도 했답니다 - 244


재위기간이 38년이나 되는 왕(중종)이지만, 후손들이 왕보다 조광조를 더 기억하고 있다는 건 무얼 말할까요? 왕의 업적보다 신하인 조광조의 업적이 더 위대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에는 아쉬운 점도 있어요. 바로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것이죠. 조광조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너무 급진적인 개혁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는 항상 주변을 살펴가며 차근차근 해나가야겠지요 - 248


명종에게는 자식이 없었어요. 외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으나 14세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했거든요. 중종의 적자였던 인종과 명종 모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중종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자손에게 넘겨져야 했습니다. 즉 중종의 손자 중에서 선택되어야 했던 거지요. 이때, 선택된 사람이 바로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입니다. 인종과 명종에게는 조카뻘이지요. 드디어 16세의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제14대 임금, 선조입니다 - 273


1592년 4월에 시작한 전쟁은 다음 해 봄까지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화되자 명나라와 일본은 전쟁에 대한 강화교섭을 시작해요. 그런데 1596년 9월, 일본이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요구를 해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 첩으로 보내라고 하지 않나, 조선의 경기, 충정, 경상, 전라 지역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지 않나, 또 조선의 왕자와 신하들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도요토미의 무례한 협상 요구 조건으로 인해 회담은 결렬되었고, 1597년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 297


병으로 지친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동의보감' 저술을 지시하지요. '동의보감' 편찬사업은 선조 당시에 시작되었는데, 왜란으로 잠시 중단되었거든요. 이를 1601년에 광해군이 재개하여 240여 종의 의서를 종합한 최고의 의서 '동의보감'이 탄생하게 됩니다. 사실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은 당시 유배지에 있었어요.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의원이던 허준에게 그 책임을 물어 유배를 보냈기 때문이지요. 허준은 1년 8개월 동안의 유배지 생활을 하면서 드디어 '동의보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이후 한양에 돌아와 광해군에게 이를 바칩니다 - 309


광해군과 인조(당시 능양군)는 서로 삼촌과 조카 관계입니다. 인조는 삼촌인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높았어요. 그 이유는 광해군이 자신의 불안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위협이 될 만한 종친들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종친 견제로 인한 한 왕족의 반발과 폐모살제 및 중립외교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서로 일치하면서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몸을 숨겼으나 금세 발각되었고, 강화도 교동에 유배됩니다. 이후 유배지는 제주도로 옮겨져요. 광해군은 1623년 49세의 나이에 폐위되었으나, 18년의 유배생활 끝에 1641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318


후금운 조선 정부의 천명배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어요.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조선에 망명하자, 조선이 그에게 가도라는 섬에서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고 군사를 원조한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명나라르 치려면 조선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괄의 잔당 세력들이 조선 침략에 앞장섰으니, 후금으로 서는 이게 웬 떡이야 싶었겠지요. 결국 1627년 1월, 3만의 후금 군대가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문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합니다. 이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요. 후금은 더는 전쟁을 계속 하지 않을 테니, 명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말 것을 당부하지요. 그리고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조선은 그간 오랑캐로 여겼던 후금과 화친을 맺고, 후금은 군대를 철수하니, 이것이 1627년에 발생한 첫 번째 호란, 정묘호란입니다 - 325


여러분, 잠실이 원래 섬이었다는 거 아세요? 여의도와 마찬가지로 한강의 섬이었는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 매립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거지요. 잠실에 삼전동이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에 원래 나로터였는데, 그 나루터로 인조가 끌려간 거예요. 매서운 한겨울이니 한강 물이 꽁꽁 얼어 있었겠지요.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 제단을 쌓고 청나라 황제가 올라가 있었는데, 그 얼음 바닥에서 인조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하지요. 즉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을 닿을 때까지 3번 숙여요. 그렇게 3번,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한 겁니다. 이때, 이마가 바닥에 쿵!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닿아야 합니다. 결국 인조는 이마가 찢어져 온몸이 피로 물들어요.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 사건'입니다 - 329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표류한 서양인이 누군지 아세요? 바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입니다. 일본이 아닌 제주도에 온 이 사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다시 네덜란드로 보내줘도 되겠지만, 당시 조선은 서양인이 들어오면 절대 돌려보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부에서 은밀히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잖아요. 혹시라도 그 정보가 외부로 새어나갈까 걱정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벨태브레이를 서울로 끌고 옵니다. 결국 벨테브레이는 당시 최고 부대였던 훈련도감에서 일하게 됩니다. 황당하지요? 그런데 도망갈 수도 있으니, 아예 도망을 못 가게 용의주도하게 수를 써요. 다리르 부러뜨렸냐고요? 그게 아니고 조선 여자와 결혼을 시켜요. 그런데 아이까지 생겼네요. 그러니 그의 입장에선 처자식 놔두고 도망갈 수 없잖아요. 결국 이름을 박연으로 바꾸고 조선땅에 눌러삽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네덜란드 상인들이 또 제주도에 표류하게 됩니다. 역시 서울로 끌려와요. 이 사람들이 그 유명한 하멜 일행이에요 - 342


숙종은 조강지처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장희빈의 미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요. 또 왕비가 된 장희빈은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고 방자하게 행동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더욱 숙종의 마음을 떠나게 했고요. 그리고 여기서 숙종의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니, 그녀가 바로 무수리 최씨입니다. 무수리는 궁궐의 최하층 천민이에요. 궁녀들의 옷을 빨아주는 천민이지요. 야사에 의하면 무수리 최씨는 인형왕후의 직계 몸종이었다고 해요. 어느 날 숙종은 헛헛한 마음으로 궁궐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방에 촛불이 켜져 있는 거예요. 호기심에 가 보니, 웬 어린 무수리가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고 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오늘이 인현왕후 생신인데, 궁궐 밖에 계시니, 이렇게라도 중전마마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고 답합니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의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그날 밤 그 방에서 그녀에게 술 한 잔을 따라 보라고 하지요. 그렇게 숙종의 환심을 얻은 무수리 최씨는 훗날 아들을 낳고 숙빈이 되고요. 이때, 낳은 아들이 연잉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이 되는 영조입니다 - 376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자고로 어진 임금이란 정치에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고 본 사람이 바로 영조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의지를 드러내는 비석을 세웠으니, 바로 탕평비지요. 오늘날 이 탕평비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요. 바로 성균관대학교 저문 왼편에 있습니다. 보통 대학교 정문의 왼편에는 경비실이 있을 것 같은데, 성균관대학교에는 탕평비가 있는 거지요. 그 이유는 무러까요? 그것은 바로 성균관대학교의 정문 자리가 성균관의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1742년에 미래의 관료 양성소인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당파와 관계없이 관리를 등용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거지요 - 396


보통 세자는 하루에 두세 번씩 왕실 어른들게 문안을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이선은 병을 핑계로 문안을 드리러 가지 않아요. 그리고 영조 역시 아들을 부르지 않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불신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이선의 비행은 왕실 집안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뒤주에 가두게 하지요. 이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왕이 세자를 죽인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임오화변입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1762년 임오년이라고 해서 그리 부릅니다. 영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역적이 되어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이름, '사도'이지요 - 414


조선후기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 유입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천주교도 있었답니다. 천주교는 오늘날의 가톨릭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정신을 강조했으며 조상에 드리는 제사를 거부하는 것 등의 교리가 특징이지요.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거니와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매우 중요한 예로 생각한 조선에서는 당연히 이를 오랑캐 종교라 치부합니다. 그런데 정조 때부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해요. 그중에는 나랏일을 하는 신하들도 여럿 있었고요. 당시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거지요.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자마자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됩니다. 1801년에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이지요. 당시 박해를 주도했던 세력이 바로 정순왕후 측근인 노론 강경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의 박해는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명분이었지요. 특히 정조 시절 성장했던 남인 세력이 이때 몰락하게 되는데, 그중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 이후로 무려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하게 되지요 - 448


조선 정부는 순조 때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엄하게 벌하고, 대대적인 숙청과 귀양을 단행했습니다. 현종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가작통'의 시행입니다. 오가작통은 말 그대로 다섯 집을 하나로 묶는 것인데요. 다섯 집을 묶어 하나의 통으로 보았고, 이 다섯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 명이라도 나타마녀 나머지 네 집을 엄하게 벌한 겁니다. 원래 오가작통은 춘추전국시대 법가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웃을 서로 감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백성을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한 구황제대로 사용되기 시작했지요.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백성들을 감시하기보다는 다섯 집이 서로 도와가며 살도록 한 겁니다. 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서 이러한 오가작통의 의도가 변질된 거지요. 이를 통해 얻은 정보로 범죄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는 데 사용한 겁니다. 더욱이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부역을 피하고자 떠돌아다니느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오가작통을 통해 이웃에 연대책임을 물어 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거고요. 만약 한 가구가 도망가거나, 천주교 신자가 발생하면 나머지 이웃들이 고스란히 그 처벌을 뒤집어써야 했으니까요. 이렇게 오가작통을 이용해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게 바로 1839년의 '기해박해'입니다. 즉, 오가작통법 때문에 조선 사회는 이웃 간의 정이나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삭막한 사회가 된 겁니다 - 460


아버지 고종이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하자 이를 대신해 숙종이 즉위합니다. 하지만 고종과 숙종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에 나타나지 않아요. 식을 거행해야 하는데, 주인공인 두 사람이 등장하지 않은 거지요. 결국 다른 두 사람을 대리로 양위식을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순종이 왕이 된 1907년부터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단행해요. 조선의 입법권, 관리 임명권, 경찰권, 사법권 등을 야금야금 일본의 것으로 바꾸더니 1910년 8월 29일에는 조선의 주권을 아예 그들이 차지하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요. 이로써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500여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조선왕조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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