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의 신 - 충주시 홍보맨의 시켜서 한 마케팅
김선태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튜브 채널을 자주 찾는다면 충주시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는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이 만든 영상을 최소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은 2016년 당시 산척면사무소 공무원을 시작으로 2018년 충주시 본청 홍보담당관실에 발령받고 SNS 홍보를 시작했으며 조길형 충주시장의 권유로 충주시 유튜브를 운영해, 2024년 2월 기준 62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면서 전국 지자체 중에서 최다 구독자수를 기록했다.

이후 여러 예능프로그램과 뉴스에 출연했고 타 유튜브와의 협업을 통해 본인은 물론 충주시를 널리 알리고 있는데 최근에는 직접 터득한 유튜브 마케팅 비법을 담은 홍보의 신 책을 출간했다.

홍보의 신에서는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충주시 유튜브를 하게 된 계기, 맨땅에서 시작해 지자체 1등 유튜브를 만든 콘텐츠 기획 전략, 유튜브 채널 체급 키우기, 공식 유튜브를 담당하게 된 실무자를 위한 비법 등을 총 219페이지에 담아냈다.

61만 원이라는 예산만을 사용하여 62만 명을 돌파한 유튜브 채널을 만든 충주맨 김선태 주문관은 MBTI가 ISTJ로 남들에게 다가서기보단 내향적인 성격이고 인센티브, 유튜브 수익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맡은 바 업무에 충실했다.

타 지자체 유튜브처럼 단순히 정책만을 담은 영상이 아니라 기획, 촬영, 출연, 편집을 모두 맡아 누구에게나 재미있을 법한 주제와 B급 감성을 통해 홍보의 패러다임을 바꿔냈고 최근에는 대통령이 언급할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유튜브를 운영하면서 계속해서 성공하진 못했다. 유튜브 채널 운영 초반 업로드한 충주사과 맞추기 영상은 다른 지역 농민의 불만을 일으켰고 시청 앞에서 시위가 발생할 정도로 역효과를 냈다.

당시에 겪었던 고충과 실수를 통해 유튜브를 운영함에 있어 한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됐고 홍보의 신 책에는 당시 있었던 이야기와 함께 교훈을 모두 담았다.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은 책 홍보의 신을 통해 유튜브 마케팅 비법으로 '변주', '일관성', '트렌드', '진정성', '패러디', '협업' 등 직접 도전하고 성공했던 방법을 누구나 알기 쉽게 말해준다.

관짝 밈, 조커 분장, 충 스미스, 스케치 코미디, 축제 디스, 공무원 연금 줄이기, 인수인계 부조리함, 하수처리장 하이라이스 먹방 등 일반적인 지자체 유튜브에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획을 통해 남들과는 다른 컨셉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유튜브 마케팅에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소재만을 생각하기보단 자유 주제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도움되는 내용이 많았다.

책 홍보의 신에서는 유튜브를 운영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물론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알려준다. 채널을 키우기 위해 무리수를 한다던지 타인을 비방하는 것, 억지로 구독자수를 늘리는 것은 오히려 악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이 쓴 책을 읽으면서 약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을 주제로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를 운영했던 것을 돌이켜보면서 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주제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담아 전문적인 리뷰어로 발전해야만 원하는 목표를 뛰어넘을 수 있다. 올해에는 블로그와 SNS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하나로 통합해 일관성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싶다.

나처럼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을 통해 마케팅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충주맨 김선태 주무관의 홍보의 신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제가 생각하는 충주시 유튜브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그냥 '충주시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정보 전달이 필요하다고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서울이나 수도권 등 다른 지역의 젊은이들은 충주시를 모릅니다. 글쎄요. 역사책에서 잠깐 본 중원경, 고구려비, 탄금대 전투 정도나 알까요? 아니요,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충주시라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충주시 내부에서 이런 좋은 정책을 펼친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좋은 정보를 전달해도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충주시만 알린다면 다른 구체적인 정보 전달은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 충주시를 알리면 정보 전달은 필요 없다고 했죠?

정보 전달에 집착하지 않는 순간 기획의 폭이 굉장히 넓고 자유로워집니다. 기존 기관들이 그렇게 집착했던 정보 전달이라는 허황된 고집에서 벗어나는 순간 신세계가 펼쳐지는 셈입니다. 바로 그 순간 홍보의 본질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 48

유튜브는 명백하게 대외 홍보 채널입니다. 유튜브에 충주시민만 필터링하는 기능은 없겠죠? 그러니까 충주시민이 아니라 전 국민이 타깃입니다.

한국어 전체를 타깃으로 잡는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연령층을 공략할 수는 없겠죠? 그러면 어떤 연령층만 공략해야 가장 효과적일까요? 바로 젊은층입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바이럴 마케팅 때문입니다.

바이럴 마케팅은 소비자들 사이에 소문이나 여론을 조장해 바이러스가 퍼지듯 입소문이 나는 것을 활용하는 마케팅 방식입니다.

온라인상에서 홍보의 성패는 이 바이럴 마케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입소문을 내야 성공할 수 있죠. 유튜브 사용 시간은 고연령층이 가장 길지만, 그것을 즐기고 공유하면서 유튜브뿐만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로 확장시켜주는 활성 사용자층은 주로 젊은층입니다. 그 연령층에서 입소문이 나야 채널이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 51

제가 만약 몇억 원의 예산을 사용해 대형 유튜브들처럼 촬영팀을 몰고 다닌다면 제 영상을 보고 진정성이 느껴질까요? 원래부터 가져왔던 충주시 유튜브의 고유한 콘셉트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일각에서는 '김선태 주무관이 세금을 아끼려 예산을 세우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저를 너무 과대 포장하는 말입니다. 물론 세금을 아끼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재생목록이 아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극단적인가요? 방송국 유튜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KBS, MBC, SBS 채널들을 볼까요? 만약 전부 모아놓는 방식이 유리하다면 방송국들도 그런 방식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있죠?

SBS의 경우 뉴스, 예능, 스포츠, 드라마, 음악 전부 다 다른 채널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해당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올리죠. 심지어 인기 있는 콘텐츠들은 아예 하나의 독립적인 채널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채널처럼 말입니다 - 75

쇼츠는 앞으로 '잡아올 물고기'들을 유인하기 위한 콘셉트를 구성해야 하고, 일반 동영상인 경우 '잡아놓은 물고기'를 위한 콘텐츠를 구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채널이 성장할 때는 쇼츠가,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면 일반 동영상의 중요성이 더 높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느 하나에 치중하기보다는 쇼츠와 일반 동영상 모두 신경 쓰는 게 가장 좋습니다 - 80

온라인상에서 홍보에 성공하고 싶다면 무조건 바이럴을 활용해야 합니다. 바이럴이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아예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저절로 바이럴 마케팅이 되는 홍보를 생각한다면 훨씬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공한 유튜버 대부분이 이런 바이럴 마케팅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만큼 온라인상에서 콘텐츠가 확산되는 데에 바이럴 마케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도 처음부터 바이럴 마케팅을 목표로 삼진 못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다 보니 간접적으로 얻은 효과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더 빠르게 성공에 다가가기 위해 바이럴 마케팅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 101

만약 상급자가 아니라 동료 직원과 기획한다면 좋은 콘텐츠가 나올까요? 서로 잘 협의해 진행한다면 말입니다.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혼자 기획할 때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별 과제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조별 과제가 유독 힘든 이유가 뭘까요?

모두가 바보들이어서? 모두가 무책임해서? 사실은 조원들의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이 제각각이다 보니 결과물 또한 엉망이 되고마는 것이죠.

특히 유튜브 영상 제작은 고도의 개성과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기획부터 촬영, 편집, 출연까지 모든 것에 개성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1인 총괄 제작 방식입니다. 실제로 파격적인 영상으로 유명한 광고회사 '돌고래유괴단'의 방식도 이와 같은데요. 한 개의 프로젝트를 개인이 맡아 총괄하는 방식을 이용합니다. 개인의 자유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죠.

이 같읁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영상의 기획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느 사람은 바로 기획자이기 때문입니다.

기획자가 촬영하는 게 가장 잘 반영한 연기를 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기획자가 편집까지 해야 원래의 기획 의도에 맞는 맛깔난 편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직적인 의사결정이나 팀 단위의 프로젝트는 유튜브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만들고 싶다면 간섭하면 안 됩니다. 그 누구든 - 109

유튜브에서 가장 잘나가는 콘텐츠츠 역시 먹방이죠. 저는 먼저 먹방이라는 소재를 잡았습니다. 그다음 충주시 어디에서 먹방을 해야 가장 재미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완전히 거꾸로 생각해본 것이죠.

충주시청 어디에서 먹방을 해야 가장 재미있을 것 같나요? 그때 제가 생각했던 것은 하수처리장이었습니다. 하수처리장 오수 옆에서 하이라이스 먹방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 충주시 하수처리장을 홍보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면 어땠을까요? 이미 하수처리장이라는 주제가 정해진 상태였다면 저는 먹방을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제가 정해진 순간 하수처리장의 시설이나 기계적인 특징에 집중했겠죠. 혹은 악취 속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의 근무 여건에 더 집중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 주제로 시작하는 방법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짜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 125

다른 지자체나 초보 유튜버들이 모두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구독자를 억지로 모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지자체의 경우는 보통 직원을 동원하려 합니다. 구독 협조 공문을 보내 타 지자체에까지 구독을 독려하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억지로 구독자를 모으는 행위는 사실 자살골에 가깝습니다. 당장의 조회수와 구독자수가 늘어날지 모르지만, 거품이 꺼지면 조회율과 클릭률을 저하시켜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채널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개인 유튜버 중에도 가장 빠른 성과를 위해 주변 지인을 동원하거나 혹은 업체를 통해 구독자를 늘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절대 지양해야 합니다.

내 영상을 진짜 마음에 들어 하고, 또 방문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진짜' 구독자들이 구독해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자라면 콘텐츠에만 올인하십시오. 유튜브만큼 여러분에게 유리한 채널은 없습니다 - 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지음 / 위너스북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튜브 채널 빠더너스를 구독하기 전 문상훈이라는 분을 알게 된 건 우연히 보게 된 한 영상이었다. 직업을 가지고 강의하는 사람들보다 더 전문적이고 알기 쉽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그맨, 배우로 활동하는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해 방송됐던 드라마 'D.P'(김루리 역)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김정훈 역)에도 출연했던 문상훈은 현재 유튜브를 통해 문쌤이라는 한국지리 일타강사 캐릭터로 활동하고 있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유명 인터넷 강의 업체 회장과 만나 스카웃 제의까지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실제 그의 빠더너스 강의 영상을 보면 납득이 될 정도다.

문상훈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공개할 때면 유튜브에서 보여준 것과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이라는 에세이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당시 나름대로 빠르게 예약구매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며칠 전 초판 2쇄를 받고 2024년 첫 책으로 읽게 됐다.

약 150페이지에 달하는 에세이 책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에서는 문상훈이 평소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과거에 기록했던 내용을 통해 총 3부로 나누어 독자들에게 말해준다.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있어 웃음이라는 것과 행복, 일상에 대한 생각을 담아냈는데 평소 시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여러 비유적인 표현법을 보면 평소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문상훈 책 뒷부분 추천의 글을 쓴 유병재의 말처럼 낮에 모아 밤에 펼쳐냈을 단어가 책에 담기기까지 얼마나 처절하고 웃겼을지, 아직 쓰지 않은 단어들이 부럽다는 말을 보면서 글쓰기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빠더너스 문상훈처럼 꾸준하게 일기 작성과 글쓰기를 하고 있지만 내 머릿 속에 담긴 생각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새해를 맞아 읽기 좋은 에세이 책을 찾거나 평소 일상에 관한 글쓰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쓰면 좋을지 고민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래에 적힌 구절을 참고하고 문상훈 에세이 책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으로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일기장을 덮어놓고 천장을 보면서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기분도 남 눈치 보면서 들고 생각도 다른 사람 허락받고 하다니.

취향과 호오의 기준이 내게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정말 좋은 건지 자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게 된다. 나는 뭐 하나 하려고 해도 늘 누가 옆에서 지켜봐 주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득 외롭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라는 것도 알겠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도 어렴풋이 알겠는데,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어렵다.

나는 누군가 보고 있다고 해야지만 춤 비슷한 것이라도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 타보는 두발자전거 뒤에서 아빠가 잡아주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자전거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어린아이에서 한 발짝도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언제까지 누굴 앞에 앉혀둘 수는 없으니 혼자 해 버릇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과,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며 아빠를 확인해야만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든다.

결국 나는 오늘도 일기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덮는다. 나는 언제쯤 누가 보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를 잘 들여다볼 수 있을지, 커가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 35

밤에 그린 낮의 그림들과 낮에 적어낸 밤의 반성문들을 구태여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밤이 되어야만 밤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할 것 같다.

낮에 스텝이 꼬이면 그 스텝을 풀어내려 바보같이 밤까지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밤에 쓴 글은 그다음 날 밤이 되어야만 퇴고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매일 밤 반성을 하고 후회를 하고도 또 내일 같은 실수를 하겠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다짐은 밤만 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들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냥 그렇게 하는 그들 옆에 앉아 같이 밤을 세우고 싶다. 오랫동안 다닌 사우나의 단골들처럼 익숙하게, 암묵적으로 정해진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의 모래시계를 바라보는 것, 하루가 얼마나 더러웠는지, 네가 미웠고 내가 잘했는지, 혹은 반대였는지 속으로 생각하며 모래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 48

스무 살이 지나고 꿈의 크기와 미련의 크기가 역전되어가는 과정을 넘기면서 그 시절을 자주 회상한다. 꿈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미련의 크기는 커질수록, 내가 소년일 때 배웠던 낮과 밤의 지식들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지 보따리를 뒤적이게 되는 것이다.

담아 두었던 세상의 진짜 이야기 중 나는 지금 어디까지 확인했고 무엇이 남아있는지, 하굣길에 마중 나왔던 보도블럭과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여전한지 궁금하다.

어른들은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공부는 다 때가 있다고들 하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내 경우를 생각하면 그때가 아니었다면 언제 또 그 열정으로 웃음과 유행을 탐닉했을까 싶다. 십 대의 질투와 결핍, 세상을 알고 싶은 마음보다 더 강한 동력이 있을까.

6년 남짓한 교복 시절을 자양분으로 평생을 먹고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호기심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십 대 때 듣던 라디오와 친구들의 웃는 얼굴에서 찾았다.

가끔 길에서 만나게 되는 교복 입은 친구들에게 내가 뒤늦게 알게 된 것들을 전해주고 싶다. 아니, 사실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은 사람은 두말할 것 없이 2000년대 중반의 소년 문상훈에게 - 53

커가면서 알게 된다는 세상 물절과 현실, 한계를 되도록 모르고 싶다.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과 되는 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바보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말이 겸손의 너스레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믿어서 실패할 때의 데미지가 작았으면 좋겠다. 성공이 어색하고 실패가 익숙하면 좋겠다.

시도해온 일들보다 도전해볼 다음 기회가 훨씬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가 내가 나이가 들어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이유를 싱겁게 나이나 세월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도전할 힘도 용기도 없는 것을 굴복으로는 더더욱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 58

어떤 분야에서 실력 있는 사람의 조건 중 하나는 내 실력이 부족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상대방을 실망시켰을 때 더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야만 그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에 대한 기댓값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의 좌절감은 익숙해지지 않지만, 오히려 더 정확한 값을 위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혼잣말을 삼키기로 한다.

업다운 게임은 적은 시도로 정답을 맞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숫자를 알아내어 필요할 때에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매일 스스로와 상대방에서 실망하고 실망시키며 답을 찾아갈 것이다 - 66

좋아하는 마음은 더 은은할수록 아름답지만 서운한 마음은 가장 적나라하게 파헤칠수록 잘 전달된다. 나는 반대가 좋은데,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가장 구체적으로,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은은하게 돌려서 듣고 싶은데 자꾸 반대로 해야 한다.

팔다리가 찢어진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내 감정들을 공항 검색대 위에 짐처럼 바리바리 다 꺼내 놓아야만 이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매번 서글프다.

그럼에도 꺼내 놓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해 없이 잘 설명하려면, 내 감정의 경위서를 먼저 작성하고 그 마음들을 공감 받으려면,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지내려면, 아 나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 가는 수준의 감정으로만 세상을 살고 싶다 - 80

내가 만약 죽기 직전에 삶에 대한 미련이 크다면 그것은 쌓아 놓은 돈이나 남겨둔 가족들 때문이 아니라 그 돌들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좋았던 기억은 좋아서 동그랗고, 불행했던 기억은 자꾸 매만져서 동그래진 그 돌들, 원래 모양이 어땠는지 구분할 수 없다. 무엇을 두고 가고 무엇을 두고 갈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 들고 가고 싶은데 내 힘으로 들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기억을 하나라도 두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죽기가 싫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삼십 년 남짓의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아까워서 죽기 싫은데,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난 뒤에 죽는다면 얼마 슬플지 벌써부터 무섭다.

내가 죽는 순간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좋은 기억이 될 테니 그 기억까지 가져가고 싶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내 모든 기억들 - 84

내가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행복은 많지 않다. 행복했던 기억 속에서 내가 했던 행동이나 상황을 재현해볼 뿐이지 행복한 감정을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웃음이나 즐거움의 호르몬이 나오는 것을 보고 쉽게 행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문득 행복했었구나 하고 떠오르면 그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행복은 늘 결과론적이다.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도, 지금이라고 짚어줄 사람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 모두는 너무 쉽게 행복을 바라고 강요해 온 것은 아닐까.

인생의 목적이나 태어난 이유 같은 것들을 말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행복이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염세적인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물질만능주의 같은 부정적인 것의 반의어로 행복하면 됐다는 말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가 돈도 아니고 비겁한 승리도 아니고 행복이라니,

행복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우리는 그 과정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지경인 것이다. 행복은 결과나 과정과 상관없이 맨 앞에 있는 우선순위가 된다 - 89

네가 밉다고 할 때는 다섯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열을 세고 말하기로 한다. 말이 앞서고 글이 앞서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하기로 한다.

상대의 표현이 서툰 것을 보고 마음이 작다고 여기지 않는 사려가 있으면 좋겠다. 내 비유와 언어유희가 또 내 마음을 새치기 했다고 알려주기로 한다.

내가 미안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운 사람에게 저울질한 마음 만큼만 내밀기로, 그 마음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며 살기로 한다. 겉껍질이 아니라 알맹이가 커진 마음을 더 여러 사람에게 더 솔직하게 내밀 수 있게 내가 더 깊어지기로 한다.

드는 생각과 기분을 다 이야기 하지 않고 그냥 그 앞에 조용히 두고 오는 법을 알아가기로 한다. 오늘 밤에는 꼭 - 123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난시 같아서 너무 가까우면 두 개로 번져 보이고 너무 멀어도 흐릿하게 잘 안 보인다. 연인들이 서로를 자세히 보고 보이고 싶은 마음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싸우고, 너무 멀리 벌어지면 그대로 멀어진다.

사랑에는 거리 조절이 중요하다. 혼자 하는 사랑은 가장 잘 보이는 거리에 너를 두고 마음의 초점을 맞추면 된다. 좋아하는 식물처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오래오래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 잘 사랑하게 된다.

널 사랑하는 마음 이전에 존중하는 마음으로 널 대한다. 짝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을 먹고 자란다. 꽃을 꺾는 사람을 두고 꽃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다.

원래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꽃다발도 잘 사지 못한다. 열렬히 사랑하다 잘 삼킨 짝사랑도 뜨거운 연애만큼 오래 기억된다. 혼자 하는 사랑을 해봐야, 잘 해봐야 서로 하는 사랑도 잘 할 수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젠 안다. 그래서 일기장에 적힌 그 이름들이 고맙다 - 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문 있는 사람 - 나를 알아가는 시간, 셀프 인터뷰
이승희 지음 / 북스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0년 '기록의 쓸모'를 시작으로 이승희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그때마다 주문해서 읽곤 한다. 수많은 작가 중에서 이승희 작가의 책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또래에 규모과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마케터라는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곳에서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서 볼 때면 자칫 놓치거나 보지 못했을 정보를 알 수 있고, 소품이나 아이템을 수집하는 취미와 더불어 여행을 좋아하는 모습에서도 비슷해 친근감이 든다. (심지어 MBTI E와 I가 반반인 것도 같다)

무엇보다 치과 마케팅으로 시작해 배달의민족 우아한형제, 네이버 마케팅센터에서 오랜 시간 마케터로서 활동한 한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배우고 싶어 온라인 도서 쇼핑몰에 관심작가로 설정해놨는데 최근 셀프인터뷰를 담은 '질문 있는 사람'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구매 후 읽어봤다.

총 100개의 셀프인터뷰를 담은 '마케터 숭' 이승희 작가의 책 '질문 있는 사람'에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케팅 일을 하며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담아냈다.

전작 '기록의 쓸모', '별게 다 영감', '일놀놀일'과 비교하면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지만 이에 더해 새로운 생각과 최근에 있었던 사건과 결혼 생활 등을 담아내어 하나의 성장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도 주었다.

책 '질문 있는 사람'에서는 크게 네가지 주제와 에필로그로 100개의 셀프인터뷰를 모아놨다.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는 질문들', '좀 더 빨리 했으면 좋았을 질문들', '앞으로 자주 해야 할 질문들', '언제가 나를 이끌어주는 질문들'은 사회 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 알았으면 좋은 내용, 나처럼 직장 생활을 한지 10년이 넘은 사람들 중 앞으로 성장과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해준다.

마케터이기에 마케팅 관점으로 작성한 내용이 많지만 하루의 일상부터 회사 생활, 경험, 기록, 글쓰기, 불안, 인관관계, 소비, 독서 습관, 번아웃 극복, 돈, 인생 계획, 여행, 나다운 것 등을 셀프 인터뷰로 알려주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면 좋은 책이라 생각이 들었다.

'마케터 숭' 이승희 작가의 '질문 있는 사람'을 읽으면서 머릿 속에 간직해온 고민 중 하나인 '가짜 경험'에 대해 가장 공감이 됐다.

최근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인지,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인용한 타인의 생각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본인의 경험이 아닌 제3자의 경험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심각한 문제는 그 경험과 생각이 가짜뉴스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그 가짜뉴스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해놓고 시간이 흘러 틀린 정보임을 아는데도 자존심에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짜 경험'이 주는 폐해를 알 수 있고, 나 역시도 대화를 할 때 함부로 부풀려 말하거나 가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희 작가가 책 '질문 있는 사람'을 통해 언급한 '나쁜 경험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공감이 됐다.

나 역시 언젠가 마케터 숭처럼 100개의 주제로 셀프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 아직까지 경험이 부족하고 지식 또한 많이 쌓지 못하였기에 현재로서는 공감가는 주제를 담을 수 없지만 지금보다 더 노력하는 삶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남겨보고 싶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질문하는 시간은 영감이 되기도 하고,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고 싶은 도전 앞에서 망설여질 때, 나만의 뾰족한 것은 대체 어디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내 안에서 나은 질문은 마치 나도 몰랐던 방향타인 것 같이 든든해진다.

무엇보다 좋은 질문은 누군가와 의미 있는 대화를 마련해주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주기도 한다. 어쩌면 나의 일상을 바꾸는 건 답이 아닌 '좋은 질문'이 아니었을까 - 4

무언가를 잘하는 것보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 내 정의에 따르면 매력적인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캐릭터를 드러내다가도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자신을 변주하는 사람이다.

본업, 부업, 취미, 특기처럼 그 사람의 삶 전반에서 볼 수 있고, '그 사람답다'는 말과 닮았다는 점에서 매력은 퍼스널브랜딩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 24

일 잘하는 마케터는 조금 다르다. 협업을 잘하고 실무를 잘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기준이다. 이에 더해,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는 노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맥락을 잘 파악하고, 그 맥락 속에서 타이밍을 잘 잡는 사람. 그래서 나는 일 잘하는 마케터는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영역에서나 필요한 태도지만, 마케터는 특히 더 귀찮아하는 기준이 아주 낮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마다 다시 살펴보고,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 44

인플루언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통해 영향력을 만들어낸다면 마케터는 그 시장에서, 그 시장을 만들어온 이들과 함께 임팩트를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아니라 일 잘하는 마케터로서 존재감을 갖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혼자서는 못하는 일이라서 함께하는 것에 가깝다. 커피 업계든, 배달 업계든, IT 업계든, 그 큰 업게를 나 혼자 좌지우지할 수 없지만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임팩트를 주고 싶다. 그때 나의 존재감이 도움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고 - 61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나를 잘 알면 다른 사람에게 맞출 것도 없이 그 자체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그 스스로를 '마케터'라고 생각한다. 이승희=마케터, 그래서 언제나 내 무게중심은 상대방에게 좀 더 기울여져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유심히 듣고, 취향을 발견할 때,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을 때, 나는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애초에 나는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 해주면서 성취감을 얻는 사람이다. 무게중심이 남에게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게 나인데, 시대에 맞춘다며 억지로 나에게 무게중심을 가져오려고 하면 그게 더 힘들고 불행한 일 아닐까 - 65

처음부터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툭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상을 보고, 책을 읽고,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 보면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날이 온다.

단순히 연예인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만 봐도 그렇다. 그 연예인이 나에게 뭔가 해줄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처럼 살고 싶거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기도 힘든데 힘껏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데는 그 사람에게서 나만이 느끼는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결국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남에게서 시작하지만 나로 귀결되는 것이 모든 콘텐츠의 마력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스스로 셀프 인터뷰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86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날 선 조언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 그것을 좋아할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데 시간 쓰길 주저하고 아까워하는 것 같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효율을 따지게 된다면, 그럴수록 '좋아하는'에 집중해서 다르게 봐야 한다 - 119

사람은 누구나 하나쯤 '이미 엎질러진 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없더라도 언제든 생길 수도 있는 문제다. 심리상담을 하면서 그런 문제는 해결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엎지르지도 않았는데 공들여 닦을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냥 '물이 엎질러졌구나' 하고 드령다보는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 당장 달라지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엎질러진 물은 결국 마를 테니까 - 155

'생각'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까 내 생각인지 네 생각인지 헷갈릴 때가 많은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어야 '생각하는 힘'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것 같은데, 유튜브에서 본 유현준 교수님, 송길영 부사장님의 말씀에 빌려보면 '생각하는 힘'이란 이런 거다.

'천 개의 책을 읽어도 질문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냥 천 명의 생각을 읽은 것과 같다' 책을 읽으면서 질문하고, 나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 천 권을 읽으면 천 개의 생각을 떠올릴 줄 아는 게 '생각하는 힘'이다. 책을 잘 읽는 법이란 곧 생각하면서 읽기, 질문하면서 읽기와 같다 - 169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느 정도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좀 더 큰 집에 사느냐 작은 집에 사느냐 하는 차이야 있겠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에 열 끼를 먹을 수 없고, 하루 24시간 이상의 시간을 살 수도 없다.

주어진 시간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표현력이 클수록 비슷한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다. 자신이 어떻게 은유하면서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은 풍요로운 생각과 표현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 176

보고 나서 '경험 하나 했다' 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내가' 한다면 어떨까"라고 생각해야 한다. 책이든 유튜브든 어떤 매체에서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 대중이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명확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의 전문성이 살고, 듣는 사람도 마음 편히 믿을 수 있으니까. 편해서든 그들의 단호함에 기가 눌려서든, 받은 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자신만의 색을 찾기도 전에 잃게 된다. '근데 이게 맞나, 나는 어떻게 생각하지?' 하며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건 간접경험에, 아니 모든 경험에 해당되는 중요한 포인트다 - 226

부부든 친구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생각의 싱크로율'를 맞추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함께 더 많이 대화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가치관을 단단하게 다지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이때 중요한 건 속도다. 방향만 크게 다르지 않다면, 서로의 속도를 존중해가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한 사람만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둘 다 정체되지 않고 지치지도 않도록, 사랑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성장으로, 성장에서 믿음으로 - 268

흔히 말하는 '느낌적인 느낌'에만 머물러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 가짜 경험은 나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유튜브 영상이든 인스타그램의 카드뉴스, 온라인에 떠도는 무료 PDF 등 콘텐츠가 너무 많다. 좋은 자료를 후루룩 보기만 해도, 갖고 있기만 해도 '안다'고 생각될 때도 많다.

스스로 생각해야 할 주제를 대신 요약 정리해주는 사람도 많다. 보다 보면 익숙해지고, 너무 익숙해서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이건 마치 글쓰기에 대한 강연을 본 후 '난 이제 글쓰기 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나의 글을 한 줄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나의 언어와 행동으로, 결과물로 구현해낼 수 있을 만큼 아는 건지 돌아보자. 그렇지 않다면, 나쁜 경험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계속 질문해야 한다. 어떤 경험이든 경험 자체에는 죄가 없다 - 2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초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통해 정지아 작가를 처음 알게 됐다. 책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를 둔 딸 고아리의 1인칭 시점으로 줄거리가 진행되는데, 장례식장에서 그(고상욱 씨)를 아는 친척과 지인들의 대화를 통해 생전에 몰랐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내용을 담았다.

지난 9월 말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제38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정지아 작가는 평소 즐겨찾는 술과 위스키를 주제로 담은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는 없는 밤이니까요'를 출간했고 몇 주 후 온라인 도서 쇼핑몰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소설을 읽고 작가의 문체와 함께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푹 빠졌던 나는 에세이를 통해 정지아 작가의 일상과 생각을 알고 싶었고 그렇게 평소처럼 도서를 주문하고 읽었다.



에세이 베스트셀러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쓴 정지아 작가는 1965년 전라남도 구례 반내골에서 태어나 중앙중학교 대학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1990년 당시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를 내 당선되었으며, 이후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을 공개하며 이효석 문학상, 한무숙 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오영수 문학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지아 작가가 지난 9월 초에 발간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그녀가 좋아하는 술과 위스키를 통해 대학교를 다녔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사건을 통해 만나왔던 인연을 말해준다.

30대 당시 군사정 시기에 수배 생활 중 방문했던 지리에서 처음 마셨던 위스키부터 가족, 친구와 함께 나눈 이야기, 여러 나라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경험, 인연, 추억 등을 담은 34편의 이야기를 만나는 동안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전편을 보는 듯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에세이 베스트셀러에는 시바스리갈부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인 조니워커 블루가 나오며 책을 읽기 전만 해도 몰랐거나 이름으로만 들어본 캪틴큐, 패스포트, 시바스 리갈, 로얄살루트, 맥켈란, 히비끼, 아와모리, 아이리스 등을 알게 됐고 평소 술을 좋아하는 나는,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을 통해 처음 들은 위스키와 외국술을 따로 찾아보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전개에 이끌렸다.

한편으론 1장에서 4장,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동안 만난 사람, 친구, 지인이 무척 많다는 것, 우연히 만나거나 스쳐지나갔을 법한 관계에서 대화를 이끌고 이후에도 오랜 시간 알고 지내는 정지아 작가만의 매력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 책에 대한 관심이 많고 자주 접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에세이 베스트셀러를 자주 찾아보곤 한다. 평소라면 만나지 못했을, 나와는 전혀 다른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의 일상과 생각을 책으로나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는 나처럼 술, 위스키를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사정권부터 현재에 이르러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걸 보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열아홉, 그때는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순백의 시간을 순백으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 28

나는 입 안에 든 시바스리갈, 그러니까 위스키 한 모금을 오래도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그날 처음으로 30년간 나의 일부였던 식도와 위의 위치와 모양을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위스키가 훑고 간 자리마다 짜릿한 쾌감으로 부르르 떨렸다. 나는 젖 먹는 송아지처럼 자꾸만 입술을 햝았다. 보다 못한 그가 700밀리 한 병을 주문했다. 그것이 나와 시바스의 첫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시바스리갈은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었다. 짜릿하고 달콤했던 건 위스키의 맛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과의 작별이었을지 모른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 35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어찌어찌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어찌어찌 살아내야 한다. 고통이 더 많은 한 생을.

소설적 성취? 사회적 명예? 죽는 수간부터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런데도 요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엄마 때문이고, 내가 없으면 오래 살아온 공간을 떠나야 할 나의 냥이들 때문이다.

나에게 마음 두고 있는 존재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이다. 데이브에게는, 그런 엄마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지도. 아니, 그런 존재가 있음에도 살아내기 어려운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을지도.

자기 손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쓸쓸한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나는 말했다. "마셔, 우리에게는 알코올이 있잖아. 알오코올처럼 인생에 잘 어울리는 게 없어" - 59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이것이 술의 힘이다. 최초로 술을 받아들인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 초원의 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해방의 하루, 숙취의 고통을 알면서도, 술 깬 직후의 겸연쩍음을 알면서도, 동물들은 그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어 또다시 몰려드는 것일 테다.

술은 스트레스를 지우고 신분을 지우고 저 자신의 한계도 지워, 원숭이가 사자의 대가리를 밟고 날아오르듯, 우리를 날아오르게 한다.

깨고 나면 또다시 비루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잠시라도 해방되었는데! 잠시라도 흥겨웠는데! - 67

남성의 교성이 세상의 자잘한 소음을 누르고 당당히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소리에 놀란 후박나무 잎사귀가 또 한 잎 고요히 내려앉았다.

이상하게 숙연해졌다. 살아 욕망을 분출하는 토마스 부부도, 죽어 고요히 떨어지는 후박나무 잎사귀도, 종말이 머나먼 태양에서 시공을 뚫고 지구, 그것도 누추한 내 집의 담 사이에 당도한 햇살도, 모든 존재가 서글펐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슬픔을 애도하며 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찔끔 떨궜다. 위스키든 소주든 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 96

그는 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원망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를 이해하려 애쓰기에는 아직도 그 마음이 너무 크다. 사촌들의 그 마음을, 맞고 자란 고모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간혹 뭐라 말할 수 없는, 인간의 모든 냄새가 벤 그 방이 그립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숟가락으로 떠 계란에 붓던, 큰아버지의 그 조심스런 손길이 글비다. 어저면 인생이란 그렇게 속절없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심사 복잡한 날이면 고립된 우주 같던 큰아버지의 방이 떠오르고,큰아버지에게 술 한잔 대접하지 못한 게 마음에 얹히고, 위스키가 아닌 소주가 그리워진다.

위스키로는 달래지지 않는, 소주로밖에는 달랠 수 없는 어떤 슬픔이, 우리 민족에게는 있는 모양이다 - 105

간혹 신라호텔에서 마신 로얄살루트 38년산이 그립다. 그 뒤로 몇 번 더 마셔보기는 했다. 누군가가 구례로 들고 온 덕에, 그래도 역시 처음 마신 그날, 샥스핀과 함께했던 그날의 38년산이 최고였다.

다시 할 수 없어서,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더 그립고 사무치는 것이 인지상정, 그래서 나에게 로얄살루트 38년산은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추억의 술이다 - 132

이런 젠장, 달팽이가 존나 빨라 봤자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작가로서의 내 인생이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존나 빠른 달팽이는 시바스리갈 700밀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꽐라가 되었다.

가관이었겠지만 뭐 괜찮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A는 맥주 세 캔에 취해서 나보다 빨리 기억이 끊겼고, 내 기억도 끊겼으니, 뭐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쿨하게, 어디에 가닿건 존나 빨리는 달려보자. 그게 그날의 결론이었다 - 164

히비끼 30년산은 묘한 술이었다. 부드러운데 향은 매우 강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단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쌌다. 그날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치과의사가 무서웠다는 야쿠자, 유부남 꼬봉과 임신한 딸아이 때문에 주먹 대신 돈 보따리를 안기는 야쿠자, 인간 세계의 밖에 있을 것 같던 그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꼬봉을 이혼시켰지만, 덕분에 그의 딸은 탈 없이 애아빠와 살게 되겠지만, 그게 속상해 위스키를 물잔으로 원샷하는 그가 나는 어쩐지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했다.

한쪽에서는 야쿠자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들이 근엄한 모습으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친구의 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한쪽에서는 야쿠자 아저씨가 딸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히비끼를 물 마시듯 마시고, 그 풍경이 강하면서 부드러운 히비끼와 참으로 절묘하게 어울리는, 오사카의 첫 밤이었다 - 174

인터뷰의 마지막 날, 그의 아들이 스낵이라는 곳에서 술을 샀다. 스낵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룸살롱,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개방된 카페 같은 곳이었다.

자리마다 여자들이 접대를 한 다는 것만 비슷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그날은 위스키 대신 아와모리를 마셨다. 40도가 넘는 일본 소주였다.

안동소주 맛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캬, 하고 몸을 떨면서 나는 A의 눈빛을 떠올렸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A의 눈빛은 지독이 외롭고 고독했다.

시장에서 순대를 파는 엄마에게 가게를 하나 내주고 싶었다는 십 대의 A는 아직 그런 눈빛이 아니었으리라. 짝사랑 하는 조선 여자애의 치마를 들추는 일본애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며 A의 눈빛은 단단해지기 시작했을 테지.

A가 건너왔을 그 무참한 세월이 안타까워 나는 쓰디쓴 아와모리를 연거푸 들이켰다. 다시는 아와모리를 마시고 싶지 않다. 다시는 A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쓰라림은, 슬픔은, 저만치 두고 나는 벚꽃 분분히 흩날리는 이 봄처럼 가볍디가볍게 떠돌고 싶다 - 183

술이 들어가고 말은 차츰 사라졌다. 누군가는 뚫어져라 모닥불을 쳐다보고,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고요히 술을 마셨을 뿐인데 잠자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우리 곁에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들도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이런 순간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그날 알코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잠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경험했다.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달이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술이 천천히 우리의 혈관을 게우고, 모닥불은 사위고, 그렇게 초원의 밤이 깊어졌다 - 208

그도 나도 식사를 반 넘게 남겼다. 식사하는 내내 그는 밝게 웃었다. 조용한 식사가 끝났고,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의 외출도 힘에 부칠 만큼 쇠약한 상태였다. 그는 들고 왔던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Redbreast for you" 그는 가볍게 나를 안고 나서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Meeting you was greatest delight of my life" 대충은 알아들었다. pleasure나 happy와는 격이 다른 듯한 delight라는 표현이, 영어도 모르는 문외한인 주제에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우리에게 시간이 좀 더 허락되었다면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그와의 만남이 내 인생의 delight가 될 수 있었을까? 평생 몸담았던 교정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 216

아이리스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이미 세상에 없는 그가 떠오른다. 우리는 그때 잠깐이나마 서로 사랑했을까? 내가 붉은 가슴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다가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쉬울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제 그는 없다. 그가 준 레드브레스트도 없다. 다시는 레드브레스트를 마시고 싶지 않다 - 218

나는 아직도 할머니 편이다. 술이 소화제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술꾼이라도, 알코올중독이라도, 나처럼 날씨라든가 실연이라든가 이따위 핑계를 댈 수 있을 뿐이다.

술이 소화제라는 명언은 정말 술 덕분에 얹혀 있는 무엇인가를 쑫 내려본 경험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할머니의 마음에 얹혀 있던 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길은 없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할머니가 자신의 제사상이나 받으러 와ㅏ서 겨우 술을 마시겠구나 싶으면 안타깝다. 나라도 소주 한잔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 241

영태의 술은 운전할 때가 아니라면 아침도 낮도 가리지 않는다. 하늘이 고우면 고와서, 바람이 스산하면 스산해서, 노골노골 땅이 녹는 초봄에는 마음이 노골노골해서, 비가 한줄금 긋고 지나가면 맘이 괜시리 착잡해서 마신다.

어느 봄날 우리 집 개 호랑이가 주인집 닭 백 마리를 순식간에 학살한 날. 백 마디 닭의 사체를 치우고 온 영태는 마음이 심란해서 안 되겠다며 그 찬란한 봄날, 내내 소주를 마셨다.

백 마리 닭의 기구한 죽음과 보기 드문 대전투에서 승리한 호랑이의 전율과 앞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과 섬진강 쪽에서 물의 냄새를 품고 흘러온 고요한 바람과 말없이 오래 앉아 있으면 바위인가 싶은 고창 농부와 그걸 바라보는 나와 물인 듯 술인 듯 술술 들어가는 소주와, 참으로 오묘한 봄날이었다 - 280

답을 찾을 때도 있고, 못 찾을 때도 있다. 찾으면 유레카!를 외치며 축배를, 못 찾으면 연구과제가 생겼으므로 축배를 든다. 우리 집 술자리에서 참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다.

많은 친구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드러내며 울고, 자기를 넘어서기도 했다. 알고 보니 상처 없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에게 술은 자신의 상처는 물론 치졸한 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게 하고, 그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친밀하게 좁혀주는, 일종의 기적이다.

술 없이 이토록 솔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그만한 용기가 없어 술의 힘을 빌 뿐이다 - 3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