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꿸 수 있는 소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창녀-지식인 관계가 아닐까? 일제시대에서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한국의 지식인들의 위상은 어떠했나? 그들은 이중 삼중으로 소외된 존재였다. 우선 서양 근대의 추종자이지만 서양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전통으로부터도 소외되었으며 그리고 현실권력(일제-군부독재)으로부터도 소외당해야 했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지식인의 지배적 매체였던 문화기호가 문자에서 영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문자보다 더 직접적이고 표현적이고 원시적이었다. 이에 대해 지식인들은 영상매체로 전향하거나 문자문화를 새롭게 혁신하려 했다. (이는 서구에서 모더니즘이란 형태로 예술분야에서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 조선에서는 일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계몽적이고 도시적인 작품 대신에 토속적 소재의 소설들이 쓰여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는 원시적인 도착을 통해 기존의 문화양식을 혁신하겠다는 열정이다. 레이 초우는 이를 <원시적 열정>이라고 칭했다. 이 원시적 열정을 위해 소모된 것은 대개 그 사회에서 땅에 더 가까운 존재들(과거에는 버려지고 지워졌던 존재들)이다. 제국이라면 열대나 오지의 원주민이 되고 한국 같은 곳에서는 (토속적 여자나 창녀 등의)여성이 된다. 이런 구도는 7-80년에 호스티스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지식인(혹은 좌절한 남성)들은 창녀에 의지하며 창녀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혁신한다. <영자의 전성시대>나 <바보선언> 따위...

90년대 들어서면 이런 구도가 약간 비틀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장선우의 <나에게 너를 보낸다>나 <거짓말>같은 영화다. 운동권 지식인이 섹스를 하면서 정치적 저항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은 7-80년대 호스티스 영화의 음흉한 욕망과 논리를 발가벗기는 통열함이 있다. <거짓말>에서는 그 음흉하게 전도된 논리를 언급하기는 커녕 아예 섹스 그 자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선우는 일종의 씻김을 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없는 미녀>에서도 지식인-창녀관계가 반복된다. 여기선 한국영화 속의 지식인-창녀 관계의 최종 결말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지식인-창녀 영화 속에서 창녀란 항시 지식인의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한데 - 이 영화에서는 최면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실존하는 여성들을 제물로 삼았고 마침내 그것은 괴물로 돌아와 통렬한 복수, 아니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로 완결된다.

임권택의 판소리라는 소재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 <서편제>의 경우, 임권태의 '원시적 열정'은 판소리라는 전통연희로 옮겨진다. 판소리는 결국 창녀의 대체물로, 이미 임권택은 <티켓> <娼> 등에서 창녀 소재의 영화를 찍어왔었다. 임감독이 영화노동자에서 영화작가로 위치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런 영화들이 양산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임권택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한국문화를 짊어진 지식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위치이동을 위해 일종의 원시적 정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임권택은 새로운 지식인으로, 문화 파괴자이자 문화 수호자가된다. 글빨로 선 지식인의 시대가 가고 영상으로 선 지식인의 시대가 왔고, 글빨이나 날리는 평론가들이 그를 공경한다. 영상은 문자가 잡아채지 못하는 진실성, 직접성 등의 매체가 가되고 임권택은 전통적 문자 문화의 허위와 위선을 깨부수고 투명한, 새로운 지배 매체의 수호자가 된다. 그러나 그 등극의 과정은 창녀, 판소리 따위의 "원시적 제물"을 필요로 했다. 시대착오적인 임권택은 이제 무대에서 돌아앉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weetmagic 2004-08-1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늘 하던대로 ^^ ;;; 펌질을.....

간달프 2004-08-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녀'라는 말보다는 창녀라는 말이 맥락에 맞을 것 같네요. 기녀(기생)는 아무래도 격식있는 문화/문명/전통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원시적"인 느낌은 없는 듯 하걸랑요. 기존의 전통적 문화를 대체할 새로운 문화를 찾는 것이 모더니즘의 특징 중 하나고, 그걸 위해 원시적인 것을(꿈, 섹스, 감각, 동물, 밀림, 원시인/토인, 아이, 근육노동자(혹은 창녀), 폭력, 정신병자 따위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거든요.
 

<서구중심주의>는 기본적으로 서구인들이 자기 경험에 좀 더 충실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이런 측면에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또한 서구중심주의가 서구와 비서구를 구경꾼과 구경꺼리로 구분했고 그로인해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것이 <反오리엔탈리즘>이다. 반오리엔탈리즘마저도 자기 경험에 충실하자는 차원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연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오리엔탈리즘이 한국에 와서는 오히려 자기 경험을 소홀히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근대주의, 근대적 경험, 전통의 단절 혹은 그것의 파괴, 서구화, 도시-산업화 등등 뭐라고 불리우든 간에 그것들이 '서구적 응시'의 부산물로 규정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서구(혹은 서구적 응시)의 오염이 없었던 요소들에 대한 재발견/재평가로 대체하려고도 하고, 또는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의 절충적 전략으로 회귀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럼 20세기 한국인들의 경험은 <서구적 응시>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추상 속에 사상(捨象)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유란 자유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그것은 불쾌감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막에서만 자유롭고 사유하며 불쾌하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쾌도 쾌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처음 엄마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때 아이는 불쾌감과 함께 자기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불쾌감과 함께 자기 의식이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아이는 엄마로부터 분리된 후 불쾌와 쾌적을 구분하게 된다. '나'라는 의식은 불쾌와 연관되고 '나'라는 의식이 얕아질 때 쾌적과 연관된다. 부모가 아이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는 상황에서 아이는 자기 의식이 옅은 쾌적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아이는 불쾌의 '나'를 의식하게 된다. 또한 '불쾌의 나'를 의식하게 되는 때는 부모가 전지전능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때 인생이란 것에 묻는 아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개 이것은 4-5세 경이라고 한다)

아이가 또래집단에 귀속되기 시작하면 이런 '불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긴다. 대체로 이런 과정은 커가면서 공동체에 귀속되거나 이탈하면서 반복될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적용시켜 본다면 '근대성'이란 것은 '불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일체화되었던 앎을 분리시켜 삶이나 세계를 상대화시켜 보는 태도는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윤리를 금욕과 축적의 역설적 연관으로 보는 베버의 사고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쾌적함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공동체로부터의 망명자, 추방자의 사고다. 사유함은 불쾌함과 연관된 것이다.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나는 생각하면서 존재한다"라고 풀었다. 좀 바꾸면 '나'는 불쾌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아기의 자기 의식이 불쾌와 연관되듯이 사유하는 존재의 증거 역시 불쾌와 연관이 있다.

인간의 자의식(혹은 반성능력)이란 것은 왜 생긴 것일까? 인간 정신은 진화의 최고단계라는 거창한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해 자연에 부적합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자연에 최적의 적응을 달성한 결과로 지능과 반성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자연에 대한 부적응 상태로 인해 불쾌에 지속적으로 휩싸여있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의식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식이 확장하다보니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들지 않았을까? 지옥은 이 부적응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에 대한 상상이고 천국은 더 나은 상태에 대한 상상이란 식으로 말이다.

이른바 '유기체적 사유'라느니 '동양적/전일적 사유'라느니 하는 것들은 언제나 쾌적한 상태를 꿈꾼다. 주체(나)가 없으면 불쾌도 없다. 이 속에서 자유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안빈낙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피에르 상소류의 서구발 유유자적주의는 근대의 불쾌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것이 대항하고 있는 것은 불쾌와 축적이 역설적으로 뒤엉켜있는 서구자본주의다. 그들은 축적을 포기함으로써 그것과 함께 뒤얽혀있는 불쾌를 거둬내려 한다. 불쾌가 자유와 결합된 문제라는 것을 동양 풍의 '자유' 개념으로 해소하려한다. 분리되었던 앎(주체, 의식, 존재자)은 삶(자연, 분수, 존재)에 다시 결합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실패할 것이 뻔하며 그 좌절감이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나치즘이나 황도주의처럼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weetmagic 2004-08-1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가 엄마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쾌도 쾌적도 존재하지 않는다..여기서의 쾌 불쾌는 생리적 관점에서 쾌 불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싫어한다는 것의 의사 표현으로서의 쾌 불쾌를 말하는 거예요 ??
'나'는 불쾌하면 존재하는 것이다...부분을 보면 인간의 회의적인 자세를 자의식-반성능력-이라고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만...자의식-반성능력-과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간달프 2004-08-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리적일수도 있고 표현적인 것일수도 있겠죠.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흡수하다가 쉬고 흡수하다가 쉬고 하는 반복적인 상태만 지속되는 것 아닐런지요? 일케 생각해요. 쾌는 불쾌에 수반되어 초래된 것이라고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생리적/표현적이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것이라고 보고 싶네요.

제가 '자의식'이나 '반성능력'이란 말을 쓴 것이 적절했는지 자신없네요. '죄의식'이라... 그것과는 좀 다를 듯 하네요. 죄의식이란 아마 나의 소속 공동체와 연관이 있겠죠. 그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코드에 어긋날 때 발생하는 것이겠죠. 제가 여기서 불쾌와 연관시킨 '나'는 좀 다른데요. 뭐랄까... 공동체 내부의 꽉막힌 동어반복에 대한 의심, 회의 따위와 연관이 있어요. 나아가 나의 생각이란 것이 이 공동체의 동어반복의 복사물에 불과한 것 아닐까하는 '불쾌'도 되고요. 그렇다고 그 공동체 바깥으로 영원히 나갈 수도 없겠지만요. 그런 식으로 자각하니 참을 수 없지요...

대체로 자의식이나 반성(성찰)이란 말을 기능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걸 반대로 사용하는 거죠. 어떤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의 내부 체계에 적합한 주체와 성찰능력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과 반성을 자족적 공동체에 대해 역기능적으로 위치시켜 본 거죠. (죄의식이라면 공동체에 대한 역기능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겠죠.) 흔히 말하듯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나의 생각은 공동체의 동어반복적 순환에 갇혀 있으므로 거기에 '나'는 없다. '나'는 다른 곳에(동어반복 바깥에) 있다는 것이죠.

대충 위에 쓴 글은 '가라타니 고진'의 글들에서 필 받아서 막 쓴 겁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서도^^;;;;;; <탐구 1>.<탐구 2>. 혹은 <언어와 비극> 등을 추천해요.
 


김인식의 <얼굴없는 미녀> (2) - 매개된 욕망과 반복강박, 경계성 장애

영화를 잘 보면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정신과의사는 아내를 포기하다시피 했다가 제3의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게 되자 아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생긴다. 그러나 아내는 그 사이 죽어버린다. 그는 아내의 애인이 이미 죽은 아내에게 걸어오는 전화를 계속 받으면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복수'라고 여긴다. 이번엔 외환딜러의 경우를 보자. 그 역시 아내 몰래 오입질을 하지만 아내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외도를 그만두고 아내에게로 돌아가려고 한다. "나 그 여자 못 버려" 왜 못 버려? 애착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그의 아내는 죽어버린다. 그는 아내의 애인(정신과 의사)이 이미 죽은 아내에게 걸어오는 전화를 계속 받으면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복수'라고 여긴다.

이 두 인물은 두 가지 착오를 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의 사랑(혹은 애착)이 애착의 대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아내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대답하지 않고 흐느껴 우는 전화 속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복수'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바로 얘기하자면 그들의 애착은 아내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제3자에 의해 매개된 애착(욕망)일 뿐이다. 남이(그것도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근사한 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 때문에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따라서 전화 속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것이 '복수'가 아니라 매개된 열정을 아내가 죽은 상태에서도 지속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르네지라르의 유명한 '3각형 욕망이론'을 영화적으로 풀어놓은 것인 듯 하다. 모든 욕망은(요구가 아닌) 타자의 욕망이다. 게다가 제3자에 의해 매개된 욕망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애착하지만 그것은 그 누군가때문에 애착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누군가를 애착하기 때문에 그 누군가를 애착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나는 어떤 이를 사랑한다고 여기지만 왜 사랑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대답할 수 없다. 나의 사랑(애착)은 설명할 수 없는 외부(혹은 '제3자' 혹은 넓게보면 '사회')에 의해 매개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의정을 매력적이다라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정말 이의정을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혹은 매스컴에 의해) 귀엽다고 판단해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다.)

정신과 의사는 제 3자에 의해 촉발된 열정을 지속시키기 위해 피암시성이 강한 경계성 장애자를 도구로 삼고자 한다. (어쩌면 특별출연한 이사비도 그런 정신과 의사의 노리개가 되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경계성 장애의 여자(김혜수)가 병동 복도에서 정신과 의사의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고 1년 후에 정신과 의사의 진찰실에서 최면도구로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언급하는 장면은 그녀가 처음부터 정신과 의사의 매개되고 좌절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는 그가 아내를 욕망하게 했던 구조/형식을 다시 반복하게 하려고 그녀에게 거짓 과거를 최면으로 주입시킨다. 그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이란 형식에 빠져들때 강력한 성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반복강박적으로 재생된다.

'얼굴없는 미녀'란 말은 말이 안된다. 우선 얼굴이 없다면 괴물이지 미녀는 아니다. 그런데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말이 된다. 제3자(혹은 사회)에 의해 미녀로 보일 수도 있고 추녀로 보일 수도 있다. 그녀가 내재적으로 어떤 요건을 갖추었느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오리지널한 얼굴이 없이 텅빈 괄호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돌아다닐 뿐이다. 그럼 진짜 그녀의 얼굴은 어디 있을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정말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느 순간 괴물로 돌아오는 미녀에게 기겁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weetmagic 2004-08-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 글보니 영화 못 보겠어요...
어쨌든 또 퍼갑니다

간달프 2004-08-1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비관적인가요?

sweetmagic 2004-08-1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심하게 동감하는 바, 제 눈에 그게 다 안들어오면 좌절할 것 같아서요 ^^;;
 

 한 남자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홀로 앉아있다. 그가 왼편 거울을 볼 때 그는 자신을 떠난 아내를 보고, 오른편 거울을 볼 때 자신을 방문한 환자를 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한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의 거울상과 만나고 그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일 뿐이다. 그가 거울 밖의 타자(他者)를 만나려 할 때 언제나 거울상과 어긋난 존재와 대면할 수 밖에 없다. 그 어긋남으로 인해 집착이 생긴다. 그는 자신의 거울상과 실제 타자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그 어긋남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인물들이 서로에게 비춰진 거울상처럼 반복된다는 것이다. 일정한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무한하게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마치 연쇄무늬를 가진 벽지같다. 특별출연한 이사비 부분은 연쇄무늬의 벽지 끝부분이 잘려나간 것과 같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다. 애정사를 테마로 삼고 있지만 인간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타자 그 자체와 만나지 못한 채 나르시시즘의 방에 갇힌 자들의 무한한 연쇄로 구성된 사회말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자기 밖의 괴물만큼이나 더 무시무시한 사회다.

이런 사회 속에서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나'의 확장태로 타자가 없는 대신 '다른 자(異者)'가 있다. '다른 자'란 나 아닌 자로 규정되는 자로, 나의 존재에 의존해 있는 것에 불과하여 결국 나의 나르시스즘의 확장형식(거울상)일 뿐이다. 따라서 남자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은 얼굴이 없다. 그는 남의 얼굴에서 자기만을 볼 뿐이다. 이 때 타자가 억압된다. 어디에서 억압되나? 그 남자 주인공의 정신 속에서 억압된다. 그것은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온다. 백인들이 흑인 노예의 반란을 끊임없이 두려워 하듯이, 자본가들이 임금노예들의 봉기에 노이로제가 걸리듯이, 가부장적 남자들이 아내와 딸들에게 살해위협을 느끼듯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weetmagic 2004-08-1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갔습니다 ㅠ.ㅠ;;

간달프 2004-08-12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윗매직님~ 궁금한 거 있는데요. 이모티콘 눈썹이에요 눈물이에요?

sweetmagic 2004-08-13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 간달프님이 입을 여셨다 !!

저.... 저 그 그게요 - 아 떨려서 말도 안나와 ... -

... 워...원래는 누..... 눈썹인데요.
저 저는 가...감도...오..옹의....눈물이라고 우기고..싶어요.
아... 아니 우길래요 ...

푸다닥....


바보 바보
" ㅠ ㅠ" 는 눈썹이구요 눈물은 " T . T " 를 많이 써요 라고 왜 말 못해 !!

히히 ^^;; 감동의 눈물이라구요 ~~ !!

간달프 2004-08-1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꾸 잘 안해서 미안해요. 담 부턴 꼭 대꾸할께요^^ 말대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