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자유의 불가능성을 인식하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고, 그것은 불쾌감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사막에서만 자유롭고 사유하며 불쾌하다.  

아기가 엄마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쾌도 쾌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처음 엄마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때 아이는 불쾌감과 함께 자기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불쾌감과 함께 자기 의식이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아이는 엄마로부터 분리된 후 불쾌와 쾌적을 구분하게 된다. '나'라는 의식은 불쾌와 연관되고 '나'라는 의식이 얕아질 때 쾌적과 연관된다. 부모가 아이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는 상황에서 아이는 자기 의식이 옅은 쾌적상태에 놓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아이는 불쾌의 '나'를 의식하게 된다. 또한 '불쾌의 나'를 의식하게 되는 때는 부모가 전지전능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때 인생이란 것에 묻는 아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개 이것은 4-5세 경이라고 한다)

아이가 또래집단에 귀속되기 시작하면 이런 '불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생긴다. 대체로 이런 과정은 커가면서 공동체에 귀속되거나 이탈하면서 반복될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적용시켜 본다면 '근대성'이란 것은 '불쾌'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일체화되었던 앎을 분리시켜 삶이나 세계를 상대화시켜 보는 태도는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윤리를 금욕과 축적의 역설적 연관으로 보는 베버의 사고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쾌적함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공동체로부터의 망명자, 추방자의 사고다. 사유함은 불쾌함과 연관된 것이다.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나는 생각하면서 존재한다"라고 풀었다. 좀 바꾸면 '나'는 불쾌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아기의 자기 의식이 불쾌와 연관되듯이 사유하는 존재의 증거 역시 불쾌와 연관이 있다.

인간의 자의식(혹은 반성능력)이란 것은 왜 생긴 것일까? 인간 정신은 진화의 최고단계라는 거창한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해 자연에 부적합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자연에 최적의 적응을 달성한 결과로 지능과 반성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자연에 대한 부적응 상태로 인해 불쾌에 지속적으로 휩싸여있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의식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식이 확장하다보니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들지 않았을까? 지옥은 이 부적응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에 대한 상상이고 천국은 더 나은 상태에 대한 상상이란 식으로 말이다.

이른바 '유기체적 사유'라느니 '동양적/전일적 사유'라느니 하는 것들은 언제나 쾌적한 상태를 꿈꾼다. 주체(나)가 없으면 불쾌도 없다. 이 속에서 자유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안빈낙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피에르 상소류의 서구발 유유자적주의는 근대의 불쾌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것이 대항하고 있는 것은 불쾌와 축적이 역설적으로 뒤엉켜있는 서구자본주의다. 그들은 축적을 포기함으로써 그것과 함께 뒤얽혀있는 불쾌를 거둬내려 한다. 불쾌가 자유와 결합된 문제라는 것을 동양 풍의 '자유' 개념으로 해소하려한다. 분리되었던 앎(주체, 의식, 존재자)은 삶(자연, 분수, 존재)에 다시 결합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실패할 것이 뻔하며 그 좌절감이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나치즘이나 황도주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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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1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가 엄마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불쾌도 쾌적도 존재하지 않는다..여기서의 쾌 불쾌는 생리적 관점에서 쾌 불쾌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싫어한다는 것의 의사 표현으로서의 쾌 불쾌를 말하는 거예요 ??
'나'는 불쾌하면 존재하는 것이다...부분을 보면 인간의 회의적인 자세를 자의식-반성능력-이라고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만...자의식-반성능력-과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간달프 2004-08-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리적일수도 있고 표현적인 것일수도 있겠죠.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흡수하다가 쉬고 흡수하다가 쉬고 하는 반복적인 상태만 지속되는 것 아닐런지요? 일케 생각해요. 쾌는 불쾌에 수반되어 초래된 것이라고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생리적/표현적이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것이라고 보고 싶네요.

제가 '자의식'이나 '반성능력'이란 말을 쓴 것이 적절했는지 자신없네요. '죄의식'이라... 그것과는 좀 다를 듯 하네요. 죄의식이란 아마 나의 소속 공동체와 연관이 있겠죠. 그 공동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코드에 어긋날 때 발생하는 것이겠죠. 제가 여기서 불쾌와 연관시킨 '나'는 좀 다른데요. 뭐랄까... 공동체 내부의 꽉막힌 동어반복에 대한 의심, 회의 따위와 연관이 있어요. 나아가 나의 생각이란 것이 이 공동체의 동어반복의 복사물에 불과한 것 아닐까하는 '불쾌'도 되고요. 그렇다고 그 공동체 바깥으로 영원히 나갈 수도 없겠지만요. 그런 식으로 자각하니 참을 수 없지요...

대체로 자의식이나 반성(성찰)이란 말을 기능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그걸 반대로 사용하는 거죠. 어떤 공동체가 있고 그 공동체의 내부 체계에 적합한 주체와 성찰능력이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과 반성을 자족적 공동체에 대해 역기능적으로 위치시켜 본 거죠. (죄의식이라면 공동체에 대한 역기능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겠죠.) 흔히 말하듯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나의 생각은 공동체의 동어반복적 순환에 갇혀 있으므로 거기에 '나'는 없다. '나'는 다른 곳에(동어반복 바깥에) 있다는 것이죠.

대충 위에 쓴 글은 '가라타니 고진'의 글들에서 필 받아서 막 쓴 겁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서도^^;;;;;; <탐구 1>.<탐구 2>. 혹은 <언어와 비극> 등을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