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방임론자 혹은 리버테리어니즘의 맹점은 인간 사회의 자기조정작용을 오직 시장에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자기조정작용을 "시장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말로하자면 '등가교환'이란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댓가도 없는/바라지 않는 증여나 약탈도 있다. (최근 금융위기 국면에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하는 일련의 정책 과정들을 보면 사실상의 약탈 혹은 증여나 다름없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조정작용을 등가교환 시장적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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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13-03-0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탈이나 증여가 교환에 비해서는 예외적인 듯이 보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약탈이나 증여가 언제 발생하는가를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인간세계 내의 모순이 비등점에 이르면 그걸 해소하기 위한 뭔가가 초래되게 되고 그것이 약탈이나 증여 같은 것일 수 있다. 평소엔 안 보이지만 항시 잠재적으로 머무는 것으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란 것이다. 모순의 폭력적 해소를 피하기 위해 교환시장 외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의 방법은 과학적 접근과 민주적 참여를 통해 취하는 것이 인간-자연 세계의 자기조정작용에도 부합하는 것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全존재를 걸고 한판의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이 도박에선 자기만의 승리가 보장되는 자기만의 울타리같은 것이 없다. 오직 이기든지 패하든지 둘 중 하나다. 주인이 되든지 노예가 되든지 둘 중 하나다. 가치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아름답던지 추하던지 둘 중 하나다. 정의롭던지 부정하던지 둘 중 하나다. 진짜던지 가짜던지 둘 중 하나다. 이 도박판에서 나만의 세계, 울타리, 우물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 또는 중2병의 세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은 바로 중2병 취향에 그럴싸한 말을 입힌 것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선 세상 또는 타자와의 정면승부다. 그것에 비스듬히 서는 일은 없다. 비스듬히 서게 되면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정면으로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생긴 열패감을 그는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우주를 만들어 보상받으려 한다. 아인랜드식 자기탐닉적 사고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중2병이다.

 

진리는 전체집합이다. 총체성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총체성의 폭력을 말하곤 한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겁쟁이란 소리를 듣기 싫기 때문에 이들은 총체성과 위계적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한다(내파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계적 이분법을 탈피하는, 유일하게 실제적인 방법은 이분법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계/지위/권력을 파괴하는/무효화하는 것이다. 이런 도전이 전제되지 않은 한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하려한다는 건 결국 문제의 핵심으로부턴 비스듬히 서겠다는 말이다. (나름 위계적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자기만의 방/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만 놀겠다는 것이다. 

 

전체집합이 아닌 부분집합이다. 부분집합 속에서 왕이 되고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이 아인랜드식 방식이다. 명목상 천재-개인과 바보-군중의 이분법이지만 군중과 천재는 이 부분집합으로 맺어져 하나의 갈라파고스섬이 된다. 아인랜드의 자기탐닉적 세계는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맥락이다. 서브컬쳐 취향 공동체 = 일본 갈라파고스 = 아인랜드의 판타지왕국... 이런 묶음.... 비주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적극적 선택의 결과인 양 하는 것. 일종의 여우의 신포도. 비주류는 보편성에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고 가짜이며 부정하고 추한 것이다. 다만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유효한' 싸움을 계속하는 한 그것은 적어도 보편성의 예비군이다. 하지만 싸움을 회피한 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비스듬히 선 채 회피한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다. 패배를 승리로 각색하려는 것, 그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아인랜드는 패배한 것이지만 그것을 마치 승리인 것마냥 뒤집어 각색했다. '정신의 승리'법. 

 

연애도 마찬가지. 전존재를 건 도박이 바로 연애, 사랑이다. 그것에 비스듬히 선 채 연애를 하게 되면 결국 자기만의 방에 갇혀 버린다. 그/그녀와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자신과 연애를 하는 꼴이다.

 

복지국가와 그 불만, 복지국가는 세금을 요구하고 세금은 불만을 초래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의 사례,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수혜자였던 두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이 둘 사이에는 묘한 정신병리적 공통점이 있다. 맹렬한 자기애와 끝없는 공허함, 정서적이고 친밀한 관계맺기의 서툶이다. 소시오패스. 얄팍한 인간적 유대를 맹렬한 지위 추구(구별짓기)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구조? 보수주의는 이 병리적 심성을 보수주의를 낭만화하는데 얼굴로 이용했다. 시민사회의 동료의식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던 심성은 자기탐닉의 탈출구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를 적대적으로 배치시키는 워프를 경험하게 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는 복지국가 시민사회 속에서 원만히 녹아들지 못한 대중 심성들을 대표하며 보수주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도전을 막아내기 위해) 그런 심성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포퓰리즘과 보수주의의 접점이 생기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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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13-03-0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류를 교체하는 것이야말로 역동성을 부르고 실질적인 발전을 낳는다. 주류를 교체할 염두를 못 내면 비주류 마이너로 만족하게 되고 이는 사회 문화 정치적 정체를 초래한다. 주류가 되지 못한 마이너는 정서나 사고구조를 바꾸는 일을 못하고 그저 스타일만 챙기게 된다.

간달프 2013-07-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중2병이 이른바 포퓰리즘화된 자유지상주의의 심리적 온상이다. 자기만의 영역을 성역으로 삼아 성을 쌓고 군림하거나 불안에 떠는 것... 그게 바로 신경질적으로 "자유"를 외치는 자들의 행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타자, 그리고 사회다.
 
 전출처 : 정재형님의 "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한국 현대사"

"6,25전쟁 북침가능성 이론"이라뇨? 커밍스가 그런 말 한 바 없는 걸로 아는데. 그와 관련된 주장의 요점은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한국전쟁에 대한 자신의 "전체적 강조점은 내전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난다"입니다. 그리고 정주영의 조선업 진출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저자 스스로 믿기 어렵다는 전제하에 쓰여진 겁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한국현대사를 처음 접하는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흥미를 돕기 위해 인용한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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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0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이리언"에서 리플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어떤 사태란 괴물과 자본이 교차하는 일이다. 이 둘은 아주 비슷하다. 일단 그 기생성. 그리고 자기운동적인 증식성. 하나는 그걸 구체성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추상성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이 둘이 핵융합하게 된다면? 인류는 비키니 섬처럼 되지 않을까? 리플리는 임금 노동자로써 전혀 해병대스럽지 않은 - 해병대는 자유(/본)주의의 수호자 아니던가? - 무기들, 아니 무기라기 보다는 '연장들'을 들고 에이리언과 맞선다. "낫과 망치"를 연상하시면 되겠다. 10월 혁명의 상징이자 소비에트연방의 국기. 그리고 '보리 이삭' 추가요.

봉준호의 "괴물"!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겹쳐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금방 알게 된다. 한강 다리 위에 서게 되면 안다. 봉준호가 왜 한강이 그렇게 집착할까? 그가 괴물을 봤다는 건 거짓말일 거다. 그가 본래 본 건 이 사회에서 퇴로가 막힌 막장 인생의 自由入水 순간을 포착한 걸게다. 그리곤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새끼들, 끝까지 둔해빠져가지고서는..."

현서 가족들이 괴물을 보았지만 국가(또는 시스템)는 그걸 못 본다. 이 영화에 먹는 장면, 먹히는 장면, 누군가를 먹여주는 장면,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넘쳐 난다. 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욕 덩어리다. 왜 그럴까?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소비에트 연방 상징들에는 태극과 건곤감리나 별들과 줄무늬가 아니라 보리이삭이 있었다는 점 상기해 보자) 그러나 국가(시스템)은 그걸 모른다. 그것은 엉뚱한 창("바이러스"!)으로 세상을 들여다 보고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해결책이 먹혀들지 않게되면 이미 실패한 해결책을 되살리려고 더 얘를 쓴다. 해결책이 뽀록나면 시스템도 뽀록나니까 어쩔 수 없는 게다.

"바이러스는 여기(강두의 뇌수)에 있어야 해!"

현서 가족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건조하게 가자면 '주변인', 감정 섞자면 '낙오자들'이다. 각각 우리 사회의 어떤 인물 유형들 중 하나를 대변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윗세대 인물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급행료와 관공서 연줄이 익숙한 세대다. 그는 총을 잘 쏘는데 아마도 그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양시켜야 했던 공격성 탓인지도 모른다. 그가 실패했을 때 자포자기하고 아들에게 먼저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는 장면은 내겐 이렇게 들렸다.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우리로 충분한 거야~"

현서의 상실과 함께 모였던 가족은, 현서 할아버지가 사라지자 다시 흩어지고 마지막 현서와의 대면 순간에야 다시 뭉칠 수 있게 된다. 의미있는 배치다. 가족들은 현서를 구하려하는데 그것은 표면 상의 가족의 일원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되찾거나 발견하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괴물은 어떻게 잡히나? 리플리가 노동자의 연장으로 괴물을 잡았듯이, "괴물"의 가족들은 양궁(한국에서 스포츠는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의 탈출구다. 사실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나?), 신너와 화염병, 그리고 쇠파이프로 잡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의 씬과 함께 대단히 시적인 데, 이 두 장면은 서로 호응하는 것 같다. 죽느니 화염병을 들어라?

괴물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독극물 방류라는 사태는 미군 부대의 유지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외국에 좀 더 싼 값에 주둔하면서 세계 패권도 지키겠다는 발상의 결과아닌가? 주둔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정부를 길들이려고 동맹약화니 하면서 대중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노련한 미국 협상술. 결국 돈이 문제고 괴물은 돈의 논리가 낳은 결과다.

"에이리언"에서는 리플리라는 노동자 영웅이 괴물과 자본이 만나는 것을 막아내지만, 애석하게도 "괴물"에서는 둘 사이의 교배로 출발하여 현서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러나 현서의 죽음(즉 한 소년의 구출)은 다른 가능성을 낳는다. "매점 서리"를 하는 길거리 소년은 화폐에는 손대지 않는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만 취한다. 사실 옛날 농촌에서는 '서리'를 용인하기도 했고 "까치밥"이란 개념도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돈의 논리를 개입시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생명에 대해 불경한' 짓이다. 현서와 그 서리 소년의 세계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데 현서 자신이 그것을 체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 강두가 이어받는다.

"너~ 현서 아니?"

아버지가 현서가 보살펴 준 아이를 껴안고 하는 말이다. 그래 그 말이다. 우리는 현서를 알까? 아마도 알꺼다. 현서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현서와 같은 일부분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모른 채 하는 거다. 왜 모른 채 할까?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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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6-08-1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시스템이 '괴물'을 보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자기 체제의 어두운 면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한강으로 떨어짐 = 실직자가 한강으로 떨어짐. 연상 이미지... 2)봉준호는 일부러 논리적으로 허술한 구조를 택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이 개인이나 특정한 행동 하나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 자체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Mephistopheles 2006-08-1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괴물을 보고 다시 간달프님의 이 페이퍼를 곱씹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가을산 2006-08-11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운 것은 없어도 '서리'를 준수하는 아이들과
"바이러스는 여기(강두의 뇌수)에 있어야 해!" 하는 식자들의 대비가 돋보였어요.

간달프 2006-08-2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의 글을 봤는데 수긍이 가는 면도 있네요. 냉소적 좌파의 정치적 영화라고 규정하는 듯 한데... 계급적 연대를 부추키는 측면보다는 정치적 세계 전체를 저 편으로 떼어놓아 버리는 듯한 느낌도 드네요.

sweetmagic 2006-10-03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어요, 그런데 아직 영화를 못 봤네요..
영화가 더욱 궁금해 집니다. ~ !!
 

‘착한 사람’ 예로센코…
[한겨레21]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천재이자 기인이었으며 아나키스트였던 러시아 태생 맹인 동화작가의 동화같은 일생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아함을 가지는 순간이 있다.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명한 화가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쓰네(中村 彛·1887~1924)의 1920년 작, <예로센코씨의 초상화>(エロシェンコ氏の像) 때문이다. 깊은 인상을 주는 청결하면서 예민해 보이고 왠지 표정이 어두워도 보이는 한 젊은이의 그림…. ‘예로센코’와 같은 성씨나 외모로 봐서 러시아 계통에 속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본에서 명작의 주인공이 된 이 ‘맹인 시인’(그림 밑 설명)의 이름을 본국 러시아에서도, 구미 지역에서도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잘 모른다. 과연 한 외국인 맹인이 어떻게 해서 일본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는가?

4살 때 성수를 뿌리다 눈을 잃다 일본의 아동 문학, 사회주의 역사, 동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방랑 시인 예로센코(1889~1952)는, 중부 러시아 벨고로드의 오부코브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적인 종교인이었던 친척들은 홍역을 앓았던 4살의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정교회의 완쾌 기도 형식대로 그 눈에 ‘성수(聖水)’를 무리하게 뿌렸는데 파란 하늘과 지붕 위의 비둘기 보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못 보게 되고 말았다. 일손이 되지 못해 가정에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눈먼 아이는 군대식 규율로 유명했던 모스크바 맹인학교에서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수업 때는 인종주의에 젖은 교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철 불볕에 피부가 많이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재학 시절에는 벌받느라 고생하고 졸업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 연주로 생계를 이었는데 그의 비장미 넘치는 음악으로 부르주아적 청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예로센코는, 한 톨스토이주의자로부터 에스페란토라는 새로운 ‘만국의 언어’를 익히고 1912년에 영국 유학 길에 나섰다. 음악 공부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군사주의적 억압의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런던에서 거물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의 제자가 돼 “진화란 상호 경쟁이 아닌 상호 사랑으로 인해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배운 그는 영국 경찰에 의해서 ‘불온 인물’로 분류돼 1914년에 일본으로 가 도쿄 맹(盲)학교의 청강생이 됐다. 세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살육으로 접어들었던 1914년에 전쟁을 무엇보다 혐오하는 예로센코의 생애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공동 언어로,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상부상조의 사상을 공동 이념으로 하는 초(超)국가·초(超)인종적 세계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예로센코는, 톨스토이·크로포트킨을 흠모했던 일본의 진보계 인사와 친하게 되었다. 나중에 진보적 연극의 선구자가 된 아키타 우쟈쿠(秋田 雨雀·1883~1962)는 그로부터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를 배웠으며, 여성 수필 문학의 개척자 소마 곡고(相馬黑光·1876~1955)는 예로센코를 자신의 집에다 투숙하게 해주고 함께 예술과 정치를 토론했다.

천재적 어학 능력을 보유한 예로센코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2년 만에 일본어로 소설과 시를 쓸 정도로 일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지금도 아동 문학의 고전으로 여기는 <등잔의 이야기>(提?の話)나 <복숭아 색깔의 구름>(桃色の雲) 같은, 깊이와 아동에게 쉬운 아름다운 언어를 겸비한 일본 근대 동화 선집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었다.

“세계는 가족일 뿐”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일본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로 살려고 했던 예로센코는, 그 당시에 판쳤던 인종주의는 물론 ‘동양적 가치론’까지 ‘민족’의 허구를 유지시키려는 착취자의 도구로 정확하게 파악했다. 아키타 우쟈쿠의 일기장을 보면, 나중에 일본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던 예로센코와 1916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인도의 저명한 시인 라벤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와의 공석 논쟁 이야기가 나온다. 타고르가 “동양 정신의 진수인 일본 정신”을 들먹였던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사고 구조에 맞는 “물질·합리성 일변도의 서구 기독교적 문명과 정신적 아시아 문명의 차이”를 논하자 듣다 못한 예로센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질에 동서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의 이야기는 중점을 다르게 둘 뿐 구조상으로는 서구 인종주의자들의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 궤변과 동질적이다. ‘서양’과 ‘동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민족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지배층의 수법일 뿐,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다”라고 일갈했다.

인도 시인 타고르와 뜨거운 논쟁

그 말에 놀란 타고르가 “당신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 따졌고 그는 “원래 러시아에서 왔지만 지금 일본 시인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타이, 버마, 인도 등지를 돌며 전래 동화를 수집하고 인도에서 영국 경찰들에게 잡히고 일본 감옥의 맛도 본 일이 있었던 예로센코에게는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신음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쪽 언어를 단 몇 개월에 익혀 그쪽 사람으로서 함께 글과 말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같이 했다. 돈키호테의 정신과 근대적 세계 무정부 혁명가의 의식이 그에게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을 중국어로 옮기기도 한 그의 막역한 친구 루쉰(魯迅·1881~1936)이 이야기했듯, 세계 혁명가인 그에게 일본은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세계를 살인자들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 동맹을 조직한 예로센코는,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뒤에 1921년 6월4일에 일본에서 강제 추방을 당한다. 일제에게 그는 일개의 ‘외국계 불온 분자’였지만, 본국 ‘붉은 러시아’도 괘씸한 아나키스트에게 처음에 입국을 불허했다. 낙심한 그는 상하이에 체류했다가 1922년 2월부터 루쉰의 소개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 교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루쉰의 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아나키즘을 공부했던 정화암(鄭華巖·1896~1981) 등의 조선 혁명가들과도 교류했으며, 그의 강의에는 수강자가 500명씩이나 몰려와 학생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야말로 ‘입신양명’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주’란 있을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어렵사리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는 물론 공산당 치하의 소련이 폭력 없는 미래 사회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일어 통역원이 되었는데, 일본인 학생 사이의 대화 내용을 일러바치라는 소련 비밀 경찰의 요구를 거절하자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독재를 싫어했던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가능했던 해외 에스페란토 대회에서의 참가차 외유를 이용하여 사실 서구로 얼마든지 망명할 수 있었는데, 그는 소련 체제하에서의 고생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소련 오지의 소수 민족 맹인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오지의 여러 맹인학교 교직에 서고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용되는 투르크멘어의 점자를 개발하기도 한 예로센코는 결국 빈곤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고향인 오부코브카에서 생을 마쳤다.

마을에서 ‘착한 사람’으로 통했던 그가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풀 냄새를 맡는 것을 매일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후에 연구자들은 지역의 촌로에게 들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아키타 우자쿠를 비롯한 예로센코의 일본 진보계 친구들이 그가 일본에서는 근대 문학의 고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소련 당국에 알리고 나서야 이름도 없었던 ‘착한 사람’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졌다.

고향의 풀 냄새를 사랑했던 세계인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공산당 시절은 물론 군사적인 민족주의가 새로이 ‘지도 이념’으로 등장되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도 ‘위험 사상의 보유자’로밖에 안보일 것이다.

장애인에게서 느끼는 세계 혁명가의 정신

지금도 도쿄 미술관에서 그의 초상화 앞에서 러시아인을 위시한 외국인들은 “그가 누구인가”라고 궁금해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도 한다. 천재이자 기인이었던 동화 작가이자 아나키스트. ‘착한 사람’ 예로센코….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시력이 없는 사람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문학적·혁명적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그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그의 장애인 차별의 부정·극복의 의식은 선구적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배웠으면 하는 것이,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크로포트킨이 진화의 원천이라 여겼던 인류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 그리고 세계 민중을 인종이나 민족별로 나누려 하지 않았던 세계 혁명가의 정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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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9-1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폭스바겐님 서재에서 이 글을 보고 따라 왔습니다. 퍼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간달프 2004-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주셔서 고마와요. 퍼가지만 마시고 좋은 글 있으시면 코멘트로라도 퍼다주세요. 상부상조^^

숨은아이 2004-09-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블루님 서재에서 보고 왔어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퍼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