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이리언"에서 리플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어떤 사태란 괴물과 자본이 교차하는 일이다. 이 둘은 아주 비슷하다. 일단 그 기생성. 그리고 자기운동적인 증식성. 하나는 그걸 구체성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추상성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이 둘이 핵융합하게 된다면? 인류는 비키니 섬처럼 되지 않을까? 리플리는 임금 노동자로써 전혀 해병대스럽지 않은 - 해병대는 자유(/본)주의의 수호자 아니던가? - 무기들, 아니 무기라기 보다는 '연장들'을 들고 에이리언과 맞선다. "낫과 망치"를 연상하시면 되겠다. 10월 혁명의 상징이자 소비에트연방의 국기. 그리고 '보리 이삭' 추가요.
봉준호의 "괴물"!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겹쳐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금방 알게 된다. 한강 다리 위에 서게 되면 안다. 봉준호가 왜 한강이 그렇게 집착할까? 그가 괴물을 봤다는 건 거짓말일 거다. 그가 본래 본 건 이 사회에서 퇴로가 막힌 막장 인생의 自由入水 순간을 포착한 걸게다. 그리곤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새끼들, 끝까지 둔해빠져가지고서는..."
현서 가족들이 괴물을 보았지만 국가(또는 시스템)는 그걸 못 본다. 이 영화에 먹는 장면, 먹히는 장면, 누군가를 먹여주는 장면,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넘쳐 난다. 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욕 덩어리다. 왜 그럴까?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소비에트 연방 상징들에는 태극과 건곤감리나 별들과 줄무늬가 아니라 보리이삭이 있었다는 점 상기해 보자) 그러나 국가(시스템)은 그걸 모른다. 그것은 엉뚱한 창("바이러스"!)으로 세상을 들여다 보고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해결책이 먹혀들지 않게되면 이미 실패한 해결책을 되살리려고 더 얘를 쓴다. 해결책이 뽀록나면 시스템도 뽀록나니까 어쩔 수 없는 게다.
"바이러스는 여기(강두의 뇌수)에 있어야 해!"
현서 가족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건조하게 가자면 '주변인', 감정 섞자면 '낙오자들'이다. 각각 우리 사회의 어떤 인물 유형들 중 하나를 대변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윗세대 인물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급행료와 관공서 연줄이 익숙한 세대다. 그는 총을 잘 쏘는데 아마도 그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양시켜야 했던 공격성 탓인지도 모른다. 그가 실패했을 때 자포자기하고 아들에게 먼저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는 장면은 내겐 이렇게 들렸다.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우리로 충분한 거야~"
현서의 상실과 함께 모였던 가족은, 현서 할아버지가 사라지자 다시 흩어지고 마지막 현서와의 대면 순간에야 다시 뭉칠 수 있게 된다. 의미있는 배치다. 가족들은 현서를 구하려하는데 그것은 표면 상의 가족의 일원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되찾거나 발견하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괴물은 어떻게 잡히나? 리플리가 노동자의 연장으로 괴물을 잡았듯이, "괴물"의 가족들은 양궁(한국에서 스포츠는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의 탈출구다. 사실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나?), 신너와 화염병, 그리고 쇠파이프로 잡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의 씬과 함께 대단히 시적인 데, 이 두 장면은 서로 호응하는 것 같다. 죽느니 화염병을 들어라?
괴물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독극물 방류라는 사태는 미군 부대의 유지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외국에 좀 더 싼 값에 주둔하면서 세계 패권도 지키겠다는 발상의 결과아닌가? 주둔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정부를 길들이려고 동맹약화니 하면서 대중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노련한 미국 협상술. 결국 돈이 문제고 괴물은 돈의 논리가 낳은 결과다.
"에이리언"에서는 리플리라는 노동자 영웅이 괴물과 자본이 만나는 것을 막아내지만, 애석하게도 "괴물"에서는 둘 사이의 교배로 출발하여 현서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러나 현서의 죽음(즉 한 소년의 구출)은 다른 가능성을 낳는다. "매점 서리"를 하는 길거리 소년은 화폐에는 손대지 않는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만 취한다. 사실 옛날 농촌에서는 '서리'를 용인하기도 했고 "까치밥"이란 개념도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돈의 논리를 개입시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생명에 대해 불경한' 짓이다. 현서와 그 서리 소년의 세계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데 현서 자신이 그것을 체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 강두가 이어받는다.
"너~ 현서 아니?"
아버지가 현서가 보살펴 준 아이를 껴안고 하는 말이다. 그래 그 말이다. 우리는 현서를 알까? 아마도 알꺼다. 현서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현서와 같은 일부분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모른 채 하는 거다. 왜 모른 채 할까?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