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피츠 이후의 문화는... 쓰레기이다' 서구 문명 아니 지구 문명은 양차대전과 그에 뒤이은 그칠 줄 모르는 야만적 상태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아도르노는 이 야만의 맥을 계몽에서 찾았고, 더 올라가서 서구 형이상학의 틀거리에서 찾았다. 그는 서구 사상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서구의 역사는 도구적 이성의 발달사였고, 현대의 야만은 그것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판단한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과 가장 다른 점은 두 번째 단계에서의 부정성(그러니까 반정립)이 다시금 세 번째의 종합적 긍정성에로 이행되지 않는데 있다. 아도르노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성으로 대치되는 데에서 '동일성 사고'의 전형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동일성 사고 안에서 주체성의 원칙만을 절대시하는, 그리하여 객체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경험적 내용들을 배제한 채 단지 순수하게 형식적으로만 치닫는 기만성이 숨어있다고 지적한다.아도르노는 베르그송처럼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들로부터 시작하거나 후설처럼 의식의 흐름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의 총체성을, 동일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념적 사고를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비판을 통해 도달하려는 바와 개념을 통해 파악하려는 사태의 비동일자가 결코 개념 속에 포섭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동일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의 철학적 사고란 '개념을 통해서 개념을 넘어서려는 노력'하는 것이다. 개념은 대상의 질적 다양과 구체성을 양적으로 추상화하고 동일성에 포섭시키는 도구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동일성의 가상을 파괴하는 사고의 힘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철학적 사고의 자기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의 경우 사유는 논리적 총체성의 요구가 기만이란 점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확장된 사유라고 볼 수 있을까? 화두와 면벽수행... 어쩌면 이것이 개념의 동일성 속에 갇혀 있는 몽매한 속세에 대해 아도르노가 취한 대응방식인 듯 하다.